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54
454회. 팔은 안으로 굽는다
잠시 후 호위 홍정로와 고주일이 중양대주 상월검 백산우 앞으로 나아왔다.
백산우가 그만 가 보라는 듯 부대주 정차좌에게 손짓을 보냈다.
정차좌는 묵례를 하고 돌아갔다.
홍정로와 고주일을 지그시 살펴보던 백산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두 사람의 얼굴에서 두려움이나 긴장이 엿보이지 않았다.
무려 중양대의 대주가 전례 없이 따로 불러낸 상황인데도 말이다.
“회하에 빠졌다고?”
“예.”
“예.”
입이라도 맞춘 듯 간결한 대답이다.
담담한 어조에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니 의심한 게 미안할 정도다.
“쯧쯧! 날씨가 아직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어쩌다 빠진 건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미끄러졌습니다.”
홍정로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백산우가 이번에는 고주일을 보았다.
“자네는?”
“미끄러지는 홍 선배를 잡으려다가 같이 빠졌습니다.”
모범적인 답변이다.
하지만 백산우는 뭔가 꺼림칙했다.
내용이 아니라 두 사람의 태도가 문제다.
고작 상방의 중급 호위들에게서 도인들처럼 해탈한 느낌이라니?
무인에게 하체 수련은 기본 중의 기본.
다른 생각을 했다고 미끄러져 강에 빠진다는 건 상상의 영역이다.
그것도 두 사람이 동시에?
그쯤 되면 상상을 넘어 망상이 되고 만다.
“재밌군.”
백산우의 반응에 홍정로와 고주일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감정을 내보이자 백산우는 거칠게 밀어붙였다.
“중양대의 호위가, 그것도 무려 두 사람이, 미끄러져 강에 빠졌다는 말을 믿으라는 거냐! 너희들 눈에는 내가 그리도 무르게 보이더냐!”
홍정로가 습을 하며 답했다.
“대주님, 저희가 미끄러져 강에 빠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 강에 빠진 것은 사실이겠지. 왜 빠졌느냐가 문제지. 그렇지 않으냐?”
“그건 미끄러져서…….”
“너희들 몸에서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하던데.”
“상행 중에 옷을 자주 갈아입지 않다 보니……. 앞으로는 자주 갈아입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그 옷은 갈아입은 것이겠지?”
“예.”
“허면 입던 옷은 어디 있느냐?”
“갈아입고 버렸습니다. 너무 낡아 버릴 때가 됐다 싶어서요.”
백산우가 고주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론 너도 버렸겠지?”
“예. 저도 너무 낡아서…….”
“내가 찾아오라고 하면 찾아올 수는 있고?”
“…….”
허를 찌르는 질문에 고주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찾아오라고 할 줄은 몰랐기에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하지 못한 까닭이다.
백산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해 본 말이다. 내가 그깟 똥 묻은 바지를 어디에 쓰려고 찾아오라 하겠느냐?”
넘겨짚은 말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챈 홍정로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똥이 묻다니요. 저희가 애도 아니고 그럴 일은 없습니다. 버릴 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 그럼 너희들 몸에서 난 구린내는 어떻게 설명할 테냐?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꽤 여럿이 냄새를 맡았다는데.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냐?”
“말씀드렸다시피 오래도록 씻지 않아서 그리…….”
“홍정로.”
백산우가 말을 끊고 홍정로를 쏘아보았다.
“예.”
“네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항상 바른길을 가라’고 정로라 했다지?”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른길이냐?”
“……예.”
백산우가 안타까운 눈으로 홍정로를 보았다.
잠깐의 망설임으로 보아 바지를 버린 것이 냄새와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상행 중인 호위 두 사람이 바지에 변을 지릴 정도의 일이라니?
‘흠! 중양대 대주의 권위로도 알아낼 수 없다니 곤란하군.’
복면인들에게 한차례 기습당한 백산우는 지금의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너희 둘은 짐을 챙겨 백화상방으로 복귀하도록 해라. 오늘의 일은 상행을 마치고 나서 다시 묻도록 하겠다.”
백산우는 둘을 돌려보내기로 했다.
갈 길이 아직도 먼데 수상쩍은 행동을 한 두 호위를 달고 갈 수는 없었다.
“예.”
각오했다는 듯 홍정로와 고주일은 지체 없이 답했다.
둘은 섭섭하다거나 억울한 표정도 아니었다.
자신들의 행동에 문제가 많으며, 누가 대주라도 그렇게 했을 거라는 걸 알아서다.
홍정로와 고주일은 마차에 실려 있던 개인 짐을 끄집어 내렸다.
두 사람이 묵묵히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백선화가 다가왔다.
“뭐예요? 어디 가나요?”
홍정로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대주님께서 먼저 동백현으로 가 있으라고 하셔서, 그렇게 됐소.”
“동백현으로 가라고 했다고요? 왜요?”
“우리도 모르겠소. 정히 궁금하면 나중에 대주님께 물어보시오.”
백선화가 의아한 얼굴로 두 호위를 보았다.
상행 도중에 호위를 돌려보내는 걸 본 적이 없어서다.
쫓아낸다면 모를까? 상행 도중에 느닷없이 본점으로 돌려보내다니?
짐을 다 꾸린 홍정로와 고주일이 백선화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조심해서 가세요.”
백선화의 작별 인사에 홍정로가 힐끔 고개를 돌렸다.
“백 소저.”
“예?”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소.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명심하시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면……. 하아! 등잔 밑이……. 됐소.”
홍정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연 공자에게 혀를 잘릴 수도 있으니 참아야 했다.
고주일이 잘했다는 듯 홍정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윽고 홍정로와 고주일이 멀어져 갔다.
그런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백선화는 황급히 백산우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냐?”
백선화는 백산우의 지친 얼굴을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상방에서 호위인 중양대는 독립적인 기관이다.
행수들도 나서지 않는 일에 고작 서기가 끼어들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
“숙부, 왜 호위 두 사람을 돌려보낸 거예요?”
“홍정로와 고주일을 말하는 거냐?”
“예.”
“그들이 너에게 찾아갔더냐?”
백산우가 눈을 찌푸렸다.
그는 두 사람이 백선화를 통해 결정을 번복하게 하려 한다고 오해했다.
“아니에요. 짐을 꾸리길래 왜 그러냐 물었더니 숙부가 돌아가라고 했다기에.”
“다른 말은 없고?”
“홍 호위가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다’고 했어요.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고도 했고.”
“허! 그것참.”
“왜요?”
조카가 궁금해하자 백산우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해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상행을 마치고 돌아가 다시 조사할 생각이다. 네 말을 들으니 그 두 사람이 호되게 당한 것 같구나.”
“옷에 실례를 할 정도로요?”
“그 정도로 공포스러운 상황이었던 걸 테지.”
백산우는 강호를 떠돌아다니던 중에 딱 한 번 그런 걸 본 적이 있다.
“도적들 짓이었을까요?”
“그건 아닐 게다. 세상의 어떤 호위가 도적을 ‘기인이사’라 칭하겠느냐?”
“아! 그럼 누구에게 당한 걸까요?”
백선화는 ‘등잔 밑이’라는 말은 까맣게 잊었다.
홍정로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는 바람에 그녀도 흘려들은 탓이다.
“모르지. 그의 말대로 세상은 넓으니까. 잠깐 스쳐 지나간 악연이었으면 좋겠구나.”
백산우가 복잡한 눈으로 상인들을 보았다.
하늘 밖의 하늘이면 천외천의 고수라는 소리.
홍정로와 고주일이 자신의 앞에서 끝까지 침묵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런 고수와 악연으로 계속 얽히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고민하고 있는 그의 눈에 손바닥만 한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회하를 건너기 전에 잠깐 본 연 공자의 마차였다.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일로 지체하다 보니 다시 따라잡힌 모양이다.
뒤늦게 마차를 발견한 백선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이 내쫓은 연 공자의 마차를 보니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백산우가 먼저 말했다.
“저건 연 공자의 마차로구나. 우리가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긴 한 모양이다.”
“우리를 뒤따라오는 것 같은데……. 다른 길로 돌아가 달라고 할까요?”
“내버려 둬라. 그도 합비로 간다고 했으니 고의로 그러는 건 아닐 게다.”
“그래도 불편하게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요. 눈에 안 띄게 멀찍이 떨어져 와도 될 텐데.”
“그도 혼사 문제로 마음이 급할 게다. 마주치는 게 신경 쓰이면 차라리 그를 다시 받아들이는 건 어떠냐? 합비까지 가려면 닷새는 더 가야 할 텐데.”
상단이 움직이면 은근슬쩍 등짐장수들이나 지방에 부임하는 관리가 따라붙기도 했다. 먼 길을 안전하게 가기 위해 상단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연 공자의 마차를 받아 주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백선화가 반대했다.
“그건 싫어요.”
백산우가 의아한 눈으로 조카를 보았다.
거상의 장녀답게 호불호를 분명히 하지 않고 두루뭉술 넘어가던 조카였다.
그런데 연 공자의 일에 대해서만은 분명하게 싫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평소의 너답지 않은 말이구나. 그를 꺼리는 이유가 따로 있느냐?”
“그는…….”
백선화는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그를 꺼리는 이유?
당연히 있다.
“호위들 앞에서 저를 우스운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우스운 사람?”
“네, 제가 마치 아버지 힘으로 성공한 사람인 것처럼, 호위들도 아버지 때문에 제 눈치를 본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그것도 호위들 앞에서.”
“흠.”
백산우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십 대 중반인 조카를 서기에 임명한 것은 방주인 백한생이다.
조카는 영민하고 사려가 깊어서 기대했던 만큼 서기의 일을 잘 해냈다.
처음 임명한 것은 골육지정이지만, 조카 역시 인정받기 위해 땀 흘려 일했다.
한때는 상방 내에서 그런 조카를 두고 여러 말이 오간 적도 있었다.
방주의 힘으로 성공했다느니, 그래도 일은 잘하니 다행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이제는 대부분 수그러든 과거를 연 공자가 무심코 건드렸던 모양이다.
“제가 아버지의 후광으로 상방에 자리를 잡은 건 아니잖아요. 중양대 호위들도 제가 바른말을 하니까 제 말에 따라 주는 거고.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모든 게 아버지 때문인 것처럼 말했어요.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노력을 아버지를 잘 둔 덕분으로 돌렸다고요.”
백산우는 멋쩍은 얼굴로 검병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일이 조카가 중양대를 야단친 것으로 시작됐다.
연 공자의 눈에 기이하게 보일 만도 하다.
어린 서기가 호위들을 야단치는데 중장년의 호위들이 찍소리도 못 하고 받아들였으니.
눈치 없는 그가 부친의 후광을 입에 올린 것이리라.
“그건 아니잖아요?”
백산우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에 상처 입은 조카에게 더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아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 않던가.
“그의 오지랖이 도에 지나쳤구나. 본래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내뱉던 사람이니 털어 버리거라.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기 객점이 망하길 바라는 사람의 말을, 뭘 그리 오래 담아 두고 있느냐.”
“네, 급하면 앞서가거나, 그게 아니라면 좀 더 거리를 벌려달라고 부탁해야겠어요. 닷새나 저 마차와 나란히 가고 싶지는 않아요. 지나친 요청일까요?”
“지나치긴. 상행에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면 응당 정리를 해야지. 더구나 일방적인 통보도 아니고 상대에게 선택권을 주겠다는 것인데.”
백산우는 이것으로 조카가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를 바랐다.
그런 정도의 제안은 연 공자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백화상방 방주의 장녀에게 찍힌 것 치고는 꽤나 훈훈한 결말이 아닌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