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56
456회. 강자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남직례성.
수현 천하강.
정오 무렵.
아홉 대의 마차와 짐꾼, 그리고 무려 서른에 달하는 무사들이 강변에 나타났다.
마차 지붕에 꽂힌 파란 바탕의 깃 발에는 하얀색으로 백화(百花)라 적혀 있었다.
남직례성으로 가고 있는 백화상방의 상단이다.
강을 살피고 돌아온 중양대주 상월검 백산우가 대행수 백일웅에게 다가갔다.
“날이 가물어 그냥 건너도 될 것 같습니다.”
“짐꾼들의 발이 젖지는 않겠는가?”
“건너가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게 하면 됩니다. 어차피 강을 건너면 합비이니 이참에 정비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흐음, 잠시 쉬어 가는 것은 상관없는데 정비할 게 있을지 모르겠군.”
부남현에서 복면인들을 만나 남궁세가로 보낼 물건이 전소(全燒)됐다. 그러니 합비에서 따로 확인해야 할 게 있을 리가 없다.
“남궁세가에 보낼 사죄의 예물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백일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남궁세가에 ‘주문한 물건이 모두 탔다’고 말만 하기는 뭐했다.
“강을 건너면 미시 말(오후 3시)까지 쉴 테니 적당한 자리를 물색해 주시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산우가 선두로 돌아갔다.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던 백일웅이 곁에 있던 백선화에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남궁세가에 어떤 예물을 드리는 게 좋겠느냐?”
“지금 우리가 가진 어떤 물건도 남궁세가의 눈에 차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래도 맨손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우리니까.”
“음, 어차피 남궁세가 전체를 만족시킬 물건은 없어요. 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한 사람?”
“네, 최소한 한 사람이 좋아할 물건은 있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 무엇을 주자는 말이냐?”
“응천부(應天府, 남경)로 가는 물건 중에 서안에서 흘러 들어온 고서(古書)가 있잖아요. 십전무후에게 어울릴 것 같은데, 어떠세요?”
“십전무후라…….”
“검왕이나 청운검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 십전무후라도 노려 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요. 어차피 남궁세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은 십전무후잖아요. 그녀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은데.”
“그것도 괜찮은 것 같구나. 내일 저녁이면 남궁세가에 도착할 게다. 그때까지 십전무후가 관심을 보일 만한 고서를 뽑아 두도록 해라.”
“예.”
백일웅이 흡족한 얼굴로 백선화를 보았다.
그녀는 단지 서기뿐 아니라 상단 운영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문득 백일웅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상단 후미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작은 마차 한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연 공자의 마차다.
며칠 전 조카와 싸웠다는 소리를 들은 뒤로 가급적 안 봤으면 하는데, 어째 더 눈에 띄는 것 같다.
잊을 만하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게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자신도 이런데 당사자인 조카는 오죽할까?
“흐음! 저 마차는 또 왔군.”
불편한 마음에 백일웅은 저도 모르게 한 소리 하고 말았다.
그 말에 뒤늦게 마차를 발견한 백선화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자신과 연 공자가 막말을 하며 싸운 일은 이미 상단에서 유명했다.
연 공자야 뜨내기니 상관없겠지만 자신은 다르다.
그 일로 백화상방 방주의 장녀이자 상방 서기의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리라는 믿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저 마차가 나타났으니 상단 사람들은 또다시 연 공자의 이야기를 입에 올릴 것이다.
백선화는 착잡한 눈으로 작은 마차를 보았다.
원망과 후회, 혐오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파도처럼 일어나 온몸을 덮쳤다.
진짜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눈앞이 아득해지더니 갑자기 숨까지 턱 막혔다.
“헉! 헉! 헉!”
백선화의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백일웅이 황급히 그녀를 다독였다.
“선화야, 신경 쓰지 마라. 숨을 천천히 쉬고. 천천히, 그렇지!”
가벼운 소란에 주변 상인들이 힐끔거렸다.
그래도 백일웅은 당장 숨이 넘어가는 조카를 돌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백선화가 일으킨 가벼운 소란 속에서도 백화상방은 계속 움직였다.
무릎까지 차는 강을 건너고 나서 상단은 몸을 말리고 식사를 하느라 분주하게 돌아갔다.
진두지휘하던 백산우는 뒤늦게 백선화의 소식을 들었다.
연적하를 눈여겨보던 문엽성이 ‘백 서기가 숨도 쉬지 못하고 괴로워했다’고 슬쩍 전한 것이다.
노기충천한 백산우는 상단의 후미로 말을 몰아갔다.
연 공자를 찾으러 간 것이다.
불가에서 양일과 함께 한가하게 건량을 뜯어 먹던 연적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중양대 대주인 백산우가 미친 듯 달려오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보니 좋은 뜻으로 찾아오는 것 같지가 않다.
잠시 후 말에서 솟구쳐 오른 백산우가 연적하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연 공자!”
내력이 가득 실린 소리에 주변 공기가 한차례 요동쳤다.
무림인이라도 오금이 저릴 상황이다.
“예?”
그러나 연적하는 마치 백치인 것처럼 순진한 눈으로 백산우를 올려다 보았다.
“분명히 우리 상단과 거리를 두라고 한 것 같은데! 어찌 이리 끈덕지게 달라붙는가!”
“어이쿠! 달라붙다니요? 목적지가 같으니 그런 거지요. 합비에 도착하면 보고 싶어도 못 볼 거예요.”
“정말 실망이군. 나는 그래도 마음 한편으로 자네를 측은하게 여기고 있었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사내 대장부가 구질구질하게 뭐 하는 짓인가! 왜 이렇게 우리 상단에 집착 하는가 말일세!”
“쩝쩝, 백 대협, 나는 그저 합비로 가고 있을 뿐이에요. 백 대협도 내 목적지가 합비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구질구질이니 집착이니 하는 말은 맞지 않아요.”
백산우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심각한 자신과 달리 연 공자는 건량을 한시도 입에서 떼지 않고 있었다.
자신을 무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
결국 백산우는 힘겹게 붙들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다.
“너 이놈! 백화상방과 내가 그리도 우습게 보이더냐!”
연적하의 앞으로 성큼 다가간 그는 후려칠 듯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잔뜩 흥분한 그를 연적하가 빤히 보며 말했다.
“왜요? 한 대 치시게요?”
그야말로 불난 데 부채질이다.
그러나 백산우는 차마 주먹을 휘두르지 못했다.
말아 쥔 주먹을 부르르 떨던 백산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자네 때문에 조카가 많이 힘들어 하네. 자네도 앙금이 남아서 그러는 걸 테지. 어떻게 해야 상단 주변에서 떠나 줄 텐가?”
연적하가 기이한 눈으로 백산우를 보았다.
특이한 사람이다.
완력으로 밀어붙일 듯하더니 그걸 참는다.
쥐꼬리만 한 뒷배에 의지해 난리를 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서는 백선화처럼.
“뭘 해 줄 수 있는데요?”
연적하의 얼굴에 악동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백화상방의 바닥을 보고 싶었다.
그래야 처벌의 수위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백선화가 자기중심적이라는 건 알지만 그런 이유로 밟기도 뭐하지 않은가.
“원하는 걸 말해 보게.”
“천 냥?”
순간 인간적이던 백산우의 눈빛에 날이 섰다.
그리고 언제 대화와 타협을 원했냐는 듯 냉정하게 돌아섰다.
“왜요? 너무 많아요? 깎아 드릴까?”
백산우가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됐다. 너라는 사람의 본래 모습을 보았으니 더 나눌 말이 없다.”
떠나려는 그를 연적하가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돈을 달라니까 태도가 달라지네요?”
“천만에.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에 달라진 것이다.”
백산우는 연적하를 속물로 여겼다.
그가 백화상방에 들러붙어 돈이나 뜯어내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와아! 아저씨 무섭다. 처음부터 나를 떠볼 생각이었나 봐요?”
백산우는 답하지 않았다.
사실 상대의 밑바닥을 보고 싶다는 것은 연적하만의 바람이 아니었다.
그도 궁금했다.
무림 고수에게 때리라고 얼굴을 들이미는 청년의 속에 뭐가 들었는지 말이다.
만약 사과 따위를 바랐다면 혹 달리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적하는 천 냥을 달라고 했다.
그 순간 백산우는 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터럭만큼의 연민을 버렸다.
“잠시나마 너를 측은하게 생각한 내가 한심하구나. 이후로는 상인이 아니라 강호의 방식대로 응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강호의 방식? 대놓고 협박하는 거예요?”
협박이냐는 말에 백산우가 돌아섰다.
“마지막 경고다. 더 이상 상단 주위를 얼쩡거리지 마라. 네놈 하나쯤 묻고 가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살기등등한 눈으로 쏘아보는 백산우에게 연적하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예, 예. 어련하시려고요. 어차피 내가 사과하라고 해도 안 했을 거잖아요. 처음부터 꼬투리나 잡으려고 물어본 거면서. 안 그래요?”
“…….”
백산우는 변명하지 않았다.
본래 강자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검진 강호에서 변명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 아니던가.
“강한 자만이 사과를 요구할 수 있고, 약자가 구할 것은 동정밖에 없다. 그런데 너는 유감스럽게도 동정 받을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그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연 공자에게 인생의 진리를 설파하고 돌아섰다.
연적하는 혀를 물고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그가 멀어지자 배를 잡고 발까지 동동 구르며 좋아했다.
“크큭! 아 미치겠네. 강한 자만이 사과를 요구할 수 있고, 약자가 구할 것은 동정밖에 없다!”
백산우의 말투를 흉내 내며 즐거워하는 연적하에게 양일이 물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재밌는 장면을 보고 웃어야지, 울어요?”
“쩝, 경고까지 받으셨는데 저녁에는 좀 거리를 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왜요? 칼 들고 뛰어올까 봐요?”
“백 대협이 강호의 방식대로 하겠다고 했잖습니까. 상방이 보통 때는 조용하다가도 한번 눈 돌아가면 물불 가리지 않습니다.”
“나는 보통 때도 물불 안 가려요.”
“예, 그러시더라고요.”
아침저녁으로 백화상방의 신경을 살살 긁는 사람이 오죽할까.
“공자님, 제발 부탁드리는데 저에게만 불똥이 안 튀게 해 주십쇼. 상방 사람들이 어찌나 눈알을 부라리는지 소화가 안 될 지경입니다.”
“아저씨,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 몰라요? 피할 생각만 말고 좀 즐겨 봐요.”
“제가 겁이 좀 많아서요. 파리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입니다.”
“말 궁둥이는 잘만 때리시면서.”
“에이, 때리는 것과 죽이는 게 어디 같습니까. 그런데 공자님.”
“예?”
“공자님은 왜 그렇게 백 소저를 싫어하십니까? 다른 상방의 후계자들에 비하면 꽤 착해 보이던데요.”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고요? 그럼 왜 백화상방을 따라다니며 괴롭히십니까?”
“바른말 한다고 날 쫓아냈잖아요. 이 정도로 끝내 주는 것도 많이 봐준 거예요. 백씨들이 악랄했으면 상단은 벌써 끝났어요.”
“아, 이게 많이 봐주신 거구나.”
양일은 새삼 연적하와 자신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거머리처럼 상단에 달라붙어 괴롭히는 게 많이 봐준 거라니.
그날 저녁.
양일은 여느 때처럼 백화상방의 후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차를 댔다.
그리고 부지런히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솥단지를 걸었다.
연이어 쌀과 마른 버섯, 육포를 잘게 찢어 넣고 푹 끓였다.
이른바 ‘버섯 육포 죽[香菇肉脯粥]’이다.
회심의 죽이 완성되자 양일은 마차에 처박혀 있는 연적하를 불러냈다.
두 사람이 버섯 육포 죽으로 배를 채웠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진 뒤였다.
양일이 꾸벅꾸벅 졸자 연적하는 그를 먼저 마차 밑으로 들여보내 쉬게 했다.
해시 말(오후 11시)쯤 되었을까?
연적하가 가물가물한 불씨를 살리고 있을 때, 호위들이 조용히 다가왔다.
마침내 백산우가 강호의 방식대로 움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