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6
46회. 좋은 찻집 주인이 될 거야
오후가 되자 갑자기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컴컴한 하늘과 눅눅한 대기를 보니 겨울비라도 내릴 것 같다. 하필이면 도시를 벗어나자마자 날씨가 이 모양이라 다들 난감한 기색이었다.
부채주 탁고명이 생각난 듯 말했다.
“가만! 이 근방 어딘가에 낡은 사당이 있었는데, 기억나는 사람?”
구밀복검 심양각이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맞습니다. 오 리(2,500미터) 정도 더 가면 포씨 사당이 있습니다.”
“그렇지! 내가 지나가다가 본 기억이 나더라고. 자자! 서두르자. 길바닥에서 비를 맞을 수는 없잖아.”
탁고명의 재촉에 오봉십걸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다행히 오봉십걸들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전에 사당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멀쩡한 건 사당을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지붕과 벽이 있다는 게 어딘가!
탁고명은 사당을 발견하자마자 오봉십걸들에게 ‘나무부터 주워 오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간의 노숙으로 마른나무의 필요성을 아는 까닭이다.
채주인 풍연초까지 뛰어다니며 나무를 주워 왔다.
덕분에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양의 나무가 쌓였다.
연적하도 쉬지 않고 나무를 주워 날랐다.
그가 세 번째 나무더미를 들고 왔을 때, 갑자기 ‘후드득’ 소리와 함께 굵은 비가 쏟아졌다.
쏴아아아-.
조금 멀리까지 나갔던 이철산과 한채연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왔다. 그래도 두 사람은 수북 쌓인 나무를 보고 좋다며 키득거렸다.
부지런한 이철산이 부싯돌로 불을 피웠다.
기다렸다는 듯 모닥불 주위로 오봉십걸들이 모여들었다.
풍연초가 사당 한쪽에 있는 포씨의 위패를 보고 농담을 했다.
“그래도 포씨들 덕분에 잘 쉬었다가 가게 생겼네.”
고개를 주억거리던 탁고명이 세찬 빗줄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이거 금방 그칠 비가 아닌데요? 오도 가도 못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건량은 아직 많이 남았잖아?”
“예.”
“그럼 됐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푹 쉬었다가 가자고. 채연이와 소백이가 발에 물집이 잡혀 고생했잖아. 서두를 거 없어.”
한채연이 나뭇가지로 불을 쑤시며 한마디 했다.
“아! 탑하의 객점에 있을 때 비가 왔어야 하는데. 아쉽다, 아쉬워.”
“그러게…….”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닥불의 온기가 퍼지자 오봉십걸들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웅크리고 앉은 채로 잠들었던 연적하는 가벼운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아직 초저녁 같은데 비가 와서 그런지 창밖은 캄캄했다.
그래도 사당 내부는 모닥불의 불씨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사물이 보였다.
오랜 여행으로 지쳤는지 오봉십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잠들어 있었다.
옆에서 하소백이 ‘끄응’ 하며 가볍게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뒤척였다.
아무래도 그녀의 움직임에 잠에서 깬 모양이다.
그는 불씨에 나무를 더 넣을까 하다가 사람들을 깨우게 될까봐 그냥 있기로 했다.
멍하니 불씨만 바라보고 있는데 하소백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으음. 오라버니, 언제 깼어요?”
“조금 전.”
하소백이 비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힐끔 둘러본 후에 말했다.
“그거 알아요? 오라버니는 언젠가 산을 내려갈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지.”
“피이, 진짠데. 두고 봐요. 내 말대로 될 테니까.”
“나는 오봉산에서 평생 살 거라고 말한 적이 없거든?”
“그건 인정.”
하소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연적하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저는 언제쯤이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까요?”
하소백은 연적하를 살짝 바라보았다.
그가 함께해 준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는데, 차마 말을 못 하겠다.
“흠, 이삼 년 정도 수련하면 쉽게 패하지는 않을 거야. 그때부터 열심히 돈을 모아야겠지?”
“에구. 십 년은 걸리겠네요?”
“아직 젊은데 뭐가 걱정이야? 십 년 후에 찻집 주인이 된다고 해도 엄청 빠른 거 아냐?”
“하아! 그렇긴 하네요. 저 도와주실 거죠?”
“응.”
연적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소백은 그런 연적하를 보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원하는 대답은 저런 게 아니다. 조금 더 내밀한 관계를 원한다. 그런데 연적하는 그런 쪽으로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저어, 오라버니…….”
“응?”
“오라버니는 어떤 여자를 좋아하세요?”
“딱히…….”
하소백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다.
‘그런 쪽으로 느린 사람이 있다고 하더니…….’
열일곱이면 한창 여자에 관심이 많을 때 아닌가? 순수한 게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느끼한 눈으로 보는 산채의 남자들은 싫지만, 이때만큼은 연적하가 답답했다.
“저는 어때요?”
하소백이 연적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얼마 전 한채연은 ‘남자가 둔하면 여자가 이끌어 주면 된다’고 했다. 오매불망 연적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다.
“너는 좋은 찻집 주인이 될 거야.”
“…….”
하소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녀 관계에 숙맥인 것은 둘째치고 그는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고 있었다.
맥 빠진 얼굴로 앉아 있던 하소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뭇가지를 한 아름 안고 왔다.
그녀가 막 꺼져 가는 불씨 위로 나뭇가지를 올리려 할 때다.
“잠깐.”
“왜요?”
“쉿.”
연적하는 귀에 신경을 집중했다.
쏴아아아- 철벅. 철벅.
빗줄기가 만들어 내는 소음 사이로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크고 분명해졌다.
누군지 몰라도 비를 피해 사당으로 오고 있는 모양이다.
‘이 밤중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연적하는 의아한 눈으로 보고 있는 하소백에게 말했다.
“아직 불 살리지 말아 봐. 사람들이 오고 있으니까.”
그제야 하소백은 조용히 나뭇가지들을 내려놓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조심스러움이 몸에 밴 것이다.
우당탕. 쿵쾅.
불청객들이 요란하게 뛰어들었다.
덜렁거리던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에 잠들어 있던 오봉십걸들이 후다닥 일어났다.
사당으로 들어온 사람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중 하나가 날 선 소리로 외쳤다.
“웬 놈들이냐!”
오봉십걸들이 황당한 눈으로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다섯의 청장년인데 그중 둘은 어깨에 커다란 포대 자루를 메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딘가를 털어먹고 달아나는 도둑의 행색이다.
같은 업종이라 봐줄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남의 잠자리에 난입해 놓고 도리어 큰소리라니!
성질 급한 셋째 마형도가 버럭 화를 냈다.
“우리가 먼저 쉬고 있었는데 늦게 온 놈들이 무슨 개방구 같은 소리야! 어깨에 짊어진 포대 자루를 보니 도둑놈들 같은데, 어디 소속이야? 말해 봐 이 새끼들아!”
때맞춰 창밖으로 번개가 떨어졌다.
환한 빛이 실내를 밝힌 순간 포대 자루가 꿈틀거렸다.
“이런 씨발! 납치냐!”
마형도의 말에 남자들은 포대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동시에 두 사람이 사당의 입구를 막아섰다.
불청객들의 지휘자로 보이는 중년인이 ‘끌끌’ 하고 혀를 찼다.
“지지리 복도 없는 놈들이로군. 하필이면 여기서 우리를 만나다니.”
말과 함께 중년인, 잔혈마도 백수범이 허리에 차고 있던 유엽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나머지 네 사람도 각자 자신의 병기를 꺼냈다.
오봉십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군지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칼을 뽑다니?
뭔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일에 휘말렸다는 느낌이 든다.
황망한 가운데도 오봉십걸들은 즉시 연적하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자연스럽게 연적하가 맨 앞에 나서게 된 모양.
그제야 백수범은 기이한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열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보통은 아닌 것 같다.
“네놈은 누구냐?”
언제 뽑았는지 연적하가 박도로 사당 바닥을 북북 긁으며 되물었다.
“왜? 여기에 위패라도 세워 주시게?”
시정잡배와도 같은 그 모습에 백수범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열 명의 남녀가 어린놈을 앞세운 걸 보면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고수들 중에 저렇게 행동이 가벼운 이는 없었으니까.
다시 한 번 소년의 아래위를 살펴 보았지만 특별한 점은 없었다.
“쳐라!”
짧게 소리치며 백수범은 소년에게 달려갔다.
어차피 상대가 누구든 죽일 생각이니 길게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그그그극.
기이한 소리가 사당에 가득 울려 퍼졌다.
유엽도를 높이 쳐들고 막 내리찍으려던 백수범의 눈이 부릅떠졌다.
소년이 신경질적으로 박도를 긁는 순간, 사당 바닥에 깔려 있던 석판이 요란하게 터져 나갔다. 곧이어 벼락처럼 도기가 날아들었다.
“으헉!”
백수범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며 유엽도로 도기를 막았다.
쩡.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백수범의 몸이 뒤로 튕겼다.
한편 다른 세 명의 불청객들 형편도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다.
지금 그들과 칼을 맞대고 있는 사람은 심양각과 풍연초, 그리고 탁고명이다.
열 명 모두가 싸우기에는 사당이 비좁아 셋만 먼저 나선 것이다.
심양각이야 워낙 유명한 마두였으니 그렇다 쳐도, 풍연초나 탁고명도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다.
풍연초와 탁고명이 버티는 동안 심양각은 오 초 만에 상대를 베어 버렸다.
“크윽!”
사내가 가슴을 움켜쥐고 뒤로 널브러졌다.
그때부터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심양각이 풍연초와 탁고명을 지원하자 두 남자는 연신 뒷걸음질 쳤다.
백수범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수세에 몰린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서 십두마병인 자신이 이렇게 몰릴 줄은 몰랐다.
이제는 살인멸구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살길을 찾아야 할 상황.
‘이런 제길! 폭우만 쏟아지지 않았어도 여기 올 일은 없었는데.’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딱 그 짝이다. 오래 전 버려진 포씨 사당에 왜 무림인들이 바글거린단 말인가!
‘교당에 바칠 제물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솔직히 저 무시무시한 괴물의 손에서 제물까지 들고 튈 자신은 없었다.
백수범은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그러다가 한순간 소년에게 애용하던 단검을 날리고 문밖으로 튀어나갔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백수범의 귓가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백수범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수하들과 제물이야 다시 구하면 그만이지만 자신의 목숨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연적하는 상대가 던진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굳이 상대를 쫓아갈 마음도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데 왜 그런 수고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비가 오는 밤에!
연적하의 관심은 온통 단검에 쏠려 있었다.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기에는 보석까지 박힌 단검이 너무 아까웠다. 이런 귀한 물건까지 던지고 달아난 상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풍연초와 심양각이 시체의 품을 뒤졌지만 특별한 건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다른 오봉십걸들이 포대 자루를 풀었다.
놀랍게도 포대에서 도사와 중이 나왔다.
당연히 예쁜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오봉십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왜 쓸모도 없는 도사와 중을 잡아가려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