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60
460회.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세요
연적하가 놀란 눈으로 검왕 남궁벽을 보았다.
아버지는 어린 자신에게 단 한 번도 어머니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제 어머니를 아세요?”
“네 부친이 후처로 맞이하기 전에 함께 자리한 적이 있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아, 네…….”
실망한 연적하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렇다면 여섯 살 무렵 부친과 만났을 때 들은 게 전부일 터였다.
“사람의 운명은 이처럼 기이하게 얽혀 있느니라. 작고한 네 아버지가 네 친모를 위해 세운 와룡장을, 백미주가 그토록 일으켜 세우려 했으니.”
“그러네요.”
연적하는 남궁벽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작 자식인 자신은 어머니의 꿈을 꽉꽉 밟아 기어코 없애 버렸으니 이런 불효도 없다.
“혼인을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하겠지. 도적 소리는 듣기 싫고, 객점에 연이를 들어앉히자니 그건 꺼려지고, 도사는 더더욱 아니고.”
“예, 제가 딱 그렇네요. 헤헤.”
“네 얼굴은 네 모친을 쏙 빼닮았다.”
남궁벽은 문득 ‘그래서 백미주가 더 그를 괴롭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위무욕(無爲無欲)한 걸 보면 얼굴뿐 아니라 속도 그런 것 같구나. 그래서 말인데…….”
남궁벽이 말을 끊고 연적하를 물끄러미 보았다.
“예?”
“네 모친의 소원인 와룡장을 다시 만들어 보는 건 어떠하냐?”
“에? 와룡장요? 제가요?”
“너도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느냐? 와룡(臥龍)처럼 세상에서 비껴 나 지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네 모친이 바라던 대로 말이다.”
노련한 남궁벽은 그의 친모인 이부용을 끌어들였다.
연적하가 얼굴도 본 적 없지만 그래서 더 애틋할 것 같아서다.
그렇지 않아도 귀가 얇은 연적하는 솔깃했다.
만약 부친 연무룡의 소원이라고 했으면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르다.
아니 오히려 어머니에 대해서는 미약하나마 부채 의식마저 있었다.
자신을 낳다 죽은 까닭이다.
그렇다 해도 연적하는 즉답을 피했다.
“생각해 볼게요.”
“그래. 급하게 서두를 건 없다.”
남궁벽은 슬쩍 운만 띄울 뿐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삶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니 심사숙고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대화가 소소한 일상으로 흘러가자 남궁벽이 남궁연과 연적하에게 말했다.
“천이만 남고 두 사람은 이만 나가 봐라. 그동안 밀린 이야기가 많을 게 아니냐.”
“아버지 저는 왜?”
“괜히 적하를 잡고 늘어질까 봐 그런다. 왜, 아비와 함께 있는 게 싫으냐?”
“아, 아니요. 저도 그렇게 눈치 없는 놈 아닙니다.”
“아니라는 놈이 왜 아까부터 엉덩이를 들썩거려? 진득하니 앉아 있어.”
“예…….”
단호한 부친의 말에 남궁천은 결국 묻어 나갈 생각을 접어야 했다.
남궁연과 연적하가 계면쩍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여는 연적하에게 남궁천이 한마디 던졌다.
“적하야 멀리 가지는 말고.”
“아, 예.”
남궁벽은 두 사람을 먼저 내보낸 뒤에 남궁천에게 슬쩍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적하에게 와룡장이 어울리는 것 같으냐?”
“솔직히 아버지가 처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깜짝 놀랐습니다. 적하가 와룡장에서 당한 일이 있어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나도 그게 마음에 걸리기는 한다.”
“그런데 숙모가 바라던 거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적하가 숙모를 닮았다면 잘 맞을 것도 같고요. 놀고먹으려고 객점을 샀다지 않습니까. 모아 놓은 재물만 있다면 장원 생활이 나을 겁니다.”
“재물이야 연이에게 넘치도록 있지 않으냐. 남연객점에서도 조금이나마 수입이 있을 테고.”
“그런데 데릴사위는 아예 꺼내지도 않으시네요?”
“내 집안에서 뒹굴거리는 놈은 너 하나로 족하다. 사위가 집 안에서 빈둥빈둥 노는 꼴은 내가 못 본다. 저희들끼리 알아서 잘 살라고 해야지.”
“제가 언제 뒹굴거렸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열심히 몸을 쓰는데.”
“뒹굴거리는 거 맞다. 세가를 이끌어 가려면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힘을 써야지.”
남궁벽의 타박에 남궁천은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부친이 새벽에 검술을 연마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밀린 일을 한다는 걸 알아서다.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쌀쌀한 날씨.
남궁연과 연적하는 남궁세가의 가산을 한 바퀴 돌고 남궁연의 방에서 차를 마셨다.
연적하는 찻잔을 감싸 쥐고 히죽히죽 웃었다.
이제는 전과 달리 별 대화가 없어도 어색하거나 무안하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알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남궁연에게 적응이 돼서다.
조용히 차향을 음미하던 남궁연이 불쑥 말했다.
“백화상방의 이야기를 더 해 줘.”
“쫓겨난 거요?”
“아니 그 이후. 그들과 함께 온 걸 보면 다시 합류하게 된 것 같은데, 상방은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들이 아니거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 한 번은 졸졸 따라다니는 내가 눈에 거슬린다고 호위들이 찾아와 시비를 걸더라고요. 그래서 분근착골로 혼쭐을 내 줬지요.”
“그리고?”
“수현에서 노숙을 할 때 한밤중에 중양대주와 호위 다섯이 찾아왔어요.”
한밤중이라는 말에 남궁연의 눈이 번득였다.
상단의 호위가 밤중에 움직였다는 것은 즉, 살인멸구를 위해서가 분명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 머리카락을 홀랑 태워 줬죠. 그리고 합의금으로 이천 냥을 받아서 마부 아저씨와 나눴어요.”
“그랬구나.”
남궁연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자 연적하는 급히 보충 설명을 했다.
“합의금뿐 아니라 서기에게도 사과를 받아 냈어요.”
“백선화?”
“어? 누님이 어떻게 그 사람 이름을 알아요? 유명한 사람이에요?”
“남궁세가와 거래하는 상방 중에 하나니까. 백한생의 장녀로 사리 분별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너에게 한 짓을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구나.”
“원래 있는 집 자식들은 자기가 받은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잖아요.”
사실 연적하는 버려진 자식이라 그 부분에 민감했다.
어쩌면 백화상방에서 승승장구하던 백선화와의 갈등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그래, 인생은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걸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몰랐구나.”
모르는 건 큰 죄다.
남궁연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백화상방의 상단에서 연적하에게 한 짓을 생각하니 피가 끓는 느낌이다.
그건 고작 이천 냥과 사죄 따위로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
다음 날.
백화상방의 상단은 여전히 비가산 아래의 공터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오 무렵, 곱게 단장한 백선화는 짐꾼 하나를 데리고 남궁세가로 향했다.
때마침 정문 앞에 어제 대화를 나누었던 무사가 보였다.
그녀는 반색을 하고 다가갔다.
순간 무사가 무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의 누구시오?”
당황한 백선화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또 다른 사람이 있나 싶어서다.
그러나 정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자신과 책 상자를 든 짐꾼뿐이었다.
“저요?”
“그럼 누가 또 있소? 어디의 누구시오?”
백선화는 황당했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어제 방문했던 백화상방의 서기 백선화예요. 총관님이 오늘 다시 오라고 해서 왔어요.”
“총관님을 만나러 왔소?”
“그게, 저어, 그러니까 어제 십전무후께 선물을 드리려고 했는데요. 어제는 십전무후께서 바쁘시니 내일 와서 말해 보라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총관님이오? 아니면 십전무후님이오?”
“십전무후님요.”
“십전무후께 여쭤 보고 올 테니 기다리시오.”
“예.”
무사가 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백선화는 한쪽 옆으로 물러섰다.
잠시 후 무사가 홀로 나왔다.
“십전무후께서 백 소저를 모셔 오라 했소. 나를 따라오시오.”
가슴을 쓸어내리던 백선화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무사는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더니 커다란 연못 옆의 ‘월락정’ 앞에서 멈춰 섰다.
“십전무후께서 나오실 테니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그리고 당신은 짐을 백 소저에게 주고 나를 따라오시오.”
무사의 말에 짐꾼은 들고 있던 상자를 백선화에게 건넸다.
그렇게 정리가 끝나자 무사는 짐꾼을 데리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홀로 남겨진 백선화는 십전무후를 기다렸다.
그러나 십전무후는 일각(15분)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지루해진 백선화는 천천히 연못 주위를 걸어 다녔다.
연못을 열 바퀴쯤 돌았을까?
방금까지 아무도 없던 ‘월락정’에서 ‘딸깍’하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돌아보니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녀가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 놓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미녀를 보던 백선화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달려갔
‘월락정’ 아래 도착한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 조심스레 물었다.
“저는 백화상방의 서기 백선화예요. 소저께서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십전무후님이신가요?”
남궁연은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보통은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기 마련인데 그녀는 빈말이라도 권하지 않았다.
어딘지 싸늘한 그녀의 태도에 백선화는 주눅이 들었다.
그래도 운 좋게 만날 기회를 얻었으니 인맥을 만들 생각으로 다시 말했다.
“아시겠지만, 비적들이 마차에 불을 질러서 ‘옥주’와 ‘당삼채’가 모두 탔어요. 송구한 마음에 자그마한 선물을 마련해 보았답니다. 서안에서 들어온 희귀한 고서(古書)인데, 십전무후님의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말과 함께 백선화는 고서가 든 상자를 받쳐 들고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그녀가 막 상자를 월락정에 내려놓았을 때다.
굳게 닫혀 있던 남궁연의 입술이 열렸다.
“이후로 백화상방의 합비 출입을 금하겠어요. 오늘 내로 합비에서 나가세요.”
날벼락 같은 남궁연의 선언에 백선화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연 공자와 남궁세가는 한 가족과도 같아요. 연 공자를 죽이려고 한 백화상방을 남궁세가가 용서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요?”
여기서 왜 연 공자가 튀어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백선화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용서해 주세요. 연 공자님과 남궁 세가의 관계를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연 공자님도 저희가 모르고 저지른 죄를 용서해 주셨어요.”
“그나마 연 공자가 용서해 주었기에 당신들을 살려 보내는 거예요.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합비에서 백화상방과 거래하는 상인은 없을 거예요.”
사색이 된 백선화가 섬돌 아래 무릎을 꿇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합비에 출입조차 하지 못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모두 제 잘못이에요! 백화상방은 잘못이 없어요. 제가 연 공자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앙심을 품었었어요. 벌을 주시려면 저에게 주세요.”
남궁연이 차가운 눈으로 백선화를 보았다.
“지금은 연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요?”
“그, 그건…… 남궁세가와 한 가족이시라고…….”
“쯧쯧! 어리석은 사람.”
남궁연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하자 백선화가 급히 물었다.
“연 공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부디 부족한 저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세요.”
“연 공자는 나와 혼인을 약속한 사람이에요.”
“…….”
뜻밖의 말에 백선화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남궁세가가 정문을 활짝 열고 호들갑스럽게 그를 맞이하더라니!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 놀라운 말이 이어졌다.
“그의 이름은 연적하. 녹림의 태상호법으로 천하십대고수들조차 어려워하는 사람이지요.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고요?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남궁연이 넋을 잃고 있는 백선화를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