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61
461회. 누님은 무슨 일이 하고 싶은데요?
백선화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십전무후 남궁연이 사라진 뒤였다.
그녀는 ‘월락정’에 덩그러니 놓인 상자를 보다가 맥없이 일어섰다.
혼이 나간 얼굴로 남궁세가를 나온 백선화는 상단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그녀를 발견한 대행수 백일웅과 중양대주 상월검 백산우가 허겁지겁 마중을 나왔다.
“어떻게 됐느냐?”
기대에 찬 백일웅의 얼굴을 본 백선화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송해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왜? 십전무후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더냐?”
한참 머뭇거리던 백선화가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답했다.
“오늘 중으로 합비에서 나가래요.”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오늘 중으로 나가라니?”
“백화상방의 합비 출입을 금한다고 했어요.”
“…….”
백일웅과 백산우는 실감이 나지 않는지 눈만 끔뻑거렸다.
백선화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설명을 이었다.
“연 공자가 십전무후의 정혼자래요. 가족을 죽이려 했으니……. 용서하지 않겠다고. 더 기막힌 건 연 공자가 녹림의 태상호법 연적하였어요.”
백산우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연 공자가 녹림의 연적하라고? 정말 천외천의 고수를 건드렸구나.”
“모두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를 쫓아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그러자 백산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어디 너만의 잘못이겠느냐? 대행수님과 나도 반대하지 않았다. 네가 운이 없었던 것이지 크게 잘못한 것은 아니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너를 깎아내린 사람을 쫓아낸 게 무슨 잘못이라고.”
“그래도…….”
“괜찮다. 남직례성에 합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대행수님, 이왕 이렇게 됐으니 합비를 버리고 응천부(應天府, 남경)에 집중하시지요?”
“하아! 모르는 소리 하지 말게.”
백일웅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합비를 버리고 응천부에 집중하자고?
역시 무인들의 생각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왜요? 합비만 피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남직례성을 포기하시게요?”
“자네는 무림 세가가 어떤 곳인지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가. 남궁세가에 찍힌 우리가 남직례성에서 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하지만 합비의 출입만 금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궁세가는 합비뿐 아니라 남직례성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네. 거기에 사위가 연적하야. 정사파 모두 남궁세가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말일세. 그런 남궁세가에서 우리에게 극도의 적대감을 드러냈네. 합비의 상인들만 우리를 피할 것 같은가? 모르긴 몰라도 이번 상행이 끝일 걸세. 소문이 퍼지기 전에 서둘러 가세나.”
백산우는 반박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대행수의 말이 맞다.
저 극악무도하다는 연적하가 사위라면 어떤 암거래도 불가능할 것이다.
‘허어! 정말 끝이군. 그런 악마가 왜 조카의 갑질을 다 받아 주었지?’
심지어 죽이려고 찾아간 자신과 호위들까지 살려 보냈다.
강호에 파다한 그의 악명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이었다.
***
남궁세가.
술시 초(오후 7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궁연과 산책을 하던 연적하가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요즘 너무 잘 먹는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남궁세가에서는 예비 사위가 왔다고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차렸다.
제대로 된 가정식을 먹어 본 적이 없던 연적하는 식사 때마다 과식을 했다.
“그게 왜 고민이야?”
“객점 요리가 입맛에 안 맞을 것 같아서요. 객점이나 반점은 맛이 항상 비슷해서 좀 별로예요.”
“아버지에게 졸라 봐. 날짜를 빨리 잡아 달라고.”
“헤헤.”
연적하는 웃기만 했다. 그녀와의 혼인을 생각하면 그냥 좋 아서 다른 건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타박타박 걷는 두 사람 앞에 정자가 나타났다.
‘월락정’이다.
정자에 붙은 현판을 보던 연적하가 무심코 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왜 ‘월락정’이에요?”
남궁연은 대답 대신 가만히 정자 옆에 있는 연못을 가리켰다.
“아!”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연못 한가운데 하얀 달덩이가 다소곳이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월락정’으로 올라갔다.
‘월락정’에서 내려다보는 연못에 비친 달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곳이야. 이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밤늦도록 차를 마시곤 하셨어.”
“그럴 만도 하네요. 우리도 마실까요?”
“훗! 차가 들어갈 자리는 있고?”
“당연하죠. 밥배와 술배와 차배가 다른 거 몰라요?”
“그래? 그렇다면 마셔 볼까?”
남궁연이 월락정 처마 밑에 달려 있는 풍경(風磬)을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짤랑-.
맑은 쇳소리가 나자 시비 둘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연 공자와 오룡화차(烏龍花茶)를 마실 테니 준비해 주렴.”
“예.”
시비들은 허리를 조아려 보인 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시비들이 작은 화로와 다기(茶器)를 가지고 돌아왔다.
찻주전자를 화로에 올리자 물이 금방 끓었다.
남궁연은 찻잎이 든 잔에 적당히 물을 따른 뒤 연적하에게 건넸다.
“와아. 냄새가 좋네요?”
연적하가 호들갑을 떨었다. 차가운 날씨라 그런지 다향(茶香)이 더 진한 느낌이다.
그런 그를 보며 남궁연은 배시시 웃기만 했다.
어머니가 이곳에서 어떤 기분으로 차를 마셨는지 알 것도 같았다.
차를 마시지 않아도 가슴이 따듯해지며 충만해졌다.
그러다 문득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남궁연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자 연적하가 물었다.
“왜요?”
“어머니 생각이 나서.”
연적하는 들고 있던 찻잔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월락정에 있으니 유명교 백두마군들에게 죽임당한 모친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가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전에 남궁연은 피식 웃었다.
“나 혼자만 가족을 잃은 것도 아닌데 너무 그랬지?”
“아니에요.”
연적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병으로 죽은 것과 원수에게 죽임당한 것이 같을 리가 있나. 더구나 자신은 어릴 때의 일이라 기억조차 흐릿하다. 장성한 그녀가 받았을 상처와는 결이 다른 것이다.
“무림 세가의 뒤에는 무수히 많은 은원이 숨겨져 있어. 그만큼의 죽음도. 무림 세가의 일원은 그 모든 걸 감수해야만 해. 때로는 과거의 은원을 떠안고, 때로는 새로운 은원을 만들어 나가지. 아버지가 ‘와룡장’ 이야기를 꺼낸 건 너와 내가 강호의 은원에서 비껴 나길 바라서야.”
“음…….”
연적하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녹림의 태상호법으로 있는 한 언제라도 칼춤을 추어야 한다.
지난번 십두마병을 척살하러 다닐 때처럼.
‘와룡장에서 천하를 관조(觀照)하라’는 건 결국 ‘녹림에 휘둘리지 말라’는 소리였다.
십두마병이야 무림의 공적이었지만 나중에는 무슨 일을 시킬지 모른다.
“누님도 내가 ‘와룡장’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했잖아. 나는 네가 뭘 하든 너를 도울 거라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누님은요? 누님은 무슨 일이 하고 싶은데요?”
“쉬고 싶어.”
남궁연은 연못에 비친 달을 물끄러미 보았다.
정의맹과 천지맹을 거쳐 남궁세가의 부흥을 위해 쉼 없이 일했다. 그래서 십전무후라는 별호까지 얻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다.
어머니를 잃은 자리는 무엇으로도 메워지지 않았다.
이제 남은 낙이라고는 오직 하나, 연적하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풋! 와룡장에서요?”
연적하는 남궁연의 말 속에 숨은 바람을 깨닫고 실소를 흘렸다.
“와룡장도 좋고. 객점도 나쁘지 않아.”
“에이, 그냥 와룡장이 좋다고 해요.”
“내가 좋다면 와룡장을 만들 거야?”
“당연하죠. 누님을 위해서라면 하늘 끝이건 지옥이건 다 갈 수 있는데, 고작 와룡장이 문제겠어요?”
“나는 네가 나를 위해서 네 인생을 결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누님은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할 거잖아요.”
남궁연은 말없이 웃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을 위해 살 모양이다. 자신이 그를 위해 살려는 것처럼.
“안아 줘.”
“넵!”
지체 없이 남궁연의 옆으로 건너간 연적하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하나가 된 두 사람 위로 달빛이 곱게 내려앉았다.
***
같은 시간.
산서성.
교구현.
풍지산 선녀암.
신당에 앉아 있던 유명교 교주 팔황신모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환한 달빛 아래 마당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커먼 흑마 위에 앉아 있던 갑옷을 입은 존재가 고개를 돌렸다.
검은 투구 사이로 시뻘건 불이 뿜어져 나왔다.
소름 끼치는 상황이건만 팔황신모의 입에서는 오히려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저걸 어디다 쓸꼬.”
처음 세상에 현신한 날 이후로 저 흑기사(黑騎士)는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녔다.
시험 삼아 십두마병으로 하여금 떼어 내도록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흑기사가 손에 든 창을 한차례 휘두르자 십두마병들은 그냥 나가떨어졌다.
백두마병들이 덤볐어도 결과는 같았다.
팔황들의 술법도 흑기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흑기사는 누구의 손길도 용납지 않고 고고하게 자신을 따라다녔다.
욕심 많은 명왕교 멍청이들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겠지만 자신에게는 혹덩어리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왕들의 하늘’로 가는 방법을 가르쳐 줄 신인(神人)이었다.
하지만 흑기사는 눈으로 화염만 쏟아 낼 뿐 인간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거라.”
“후욱! 후욱!”
흑기사의 입에서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
내공술로 숨소리를 잊은 지 오래된 팔황신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백두마군들을 쓸어버린 무력을 가진 자의 숨소리가 저리 거칠다니.
흑기사는 여러 면에서 그녀의 상식과 동떨어진 존재였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팔황신모가 말했다.
“팔황 있느냐.”
“예.”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태백 선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월과 비슷한 경지의 제물이 필요하다. 산서성에 그와 같은 자가 있느냐?”
“서안 벽공문의 전대 문주인 추풍검 송안군이 산서성에서 손꼽히는 고수였습니다. 헌데…….”
“헌데?”
“칩거한 지 꽤 되는 자라 지금의 무위가 어떨지…….”
“지금의 무위는 상관없다. 그릇의 크기만 맞으면 되니까.”
“그릇이라 하오시면?”
“잊었느냐? 적월도 단전을 폐한 상태에서 제물로 쓰였다. 그럼에도 훌륭한 결과를 가져왔지. 깨달음의 깊이나 영혼의 크기를 그릇이라 한 것이다.”
“예. 허면 송안군을 데려올까요?”
“필히 살려서 데리고 와야 한다. 그를 써 보면 확실히 알겠지. 제물에 적합한 자가 누군지를.”
“존명.”
태백 선인이 나타날 때처럼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순간 흑기사의 불꽃 같은 눈이 태백 선인을 좇았다.
마치 태백 선인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흑기사는 오래도록 허공을 응시했다.
이윽고 팔황신모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열려 있던 방문이 스르륵 닫혔다.
그녀는 서탁 위에 놓인 고서(古書)를 펼쳤다.
얼마 전 서안의 상인들에게 받은 ‘환년익명(還年益命, 수명을 늘려 주는 도술)’이라는 술법서다.
불로불사를 추구한다고 소문이 나니 이런 것까지 선물로 들어온다.
“쯧쯧! 고작 몇 백 년 더 살아 무엇 하겠다고.”
혀를 차던 팔황신모가 책을 덮었다.
문득 연적하처럼 명왕교에 있는 배교자들을 잡아다 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