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73
473회. 방패와 칼
오월 초하루.
산서성 교구현.
풍지산 초입의 염왕각.
정오 무렵.
각종 병장기를 휴대한 중년의 남녀가 염왕각으로 하나둘씩 모여 들었다.
대안탑의 고서를 회수하기 위해서 안에서 남직례성까지 흩어졌던 팔황들이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태백선인(太白仙人)이 말했다.
“수고들 했소. 이렇게 단시일 내에 고서를 회수하다니 실로 대단하오. 교주님께 가기 전에 간단히나마 처리 과정과 결과를 들었으면 하오.”
태백선인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으로 갔던 화조선인(花鳥仙人)을 보았다.
화조선인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 후 말했다.
“저는 서안 등전로에 숨어 있던 불목하니를 찾아내, 그에게 남은 고서가 없음을 확인하고, 가족들까지 싹 다 정리했습니다. 뿌리까지 뽑았으니 불목하니와 관계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옆자리의 육통존자(六通尊者)와 음양천선(陰陽天仙)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맡은 금일상방이 서안에 있으니 그다음 순서라 생각한 것이다.
육통존자는 무심코 ‘직일신장과 구궁천녀’를 힐끔 돌아보았다.
불목하니 다음은 왕부(王府)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처리한 순서’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기야 연계된 일이 아니라면 순서가 무슨 상관일까.
“저와 음양천선은 금일상방에 남아 있던 고서를 회수하여 풍지산으로 보내고, 말씀하신 대로 ‘백화상방’과 ‘왕부’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모두 척살했습니다. 목격자는 물론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래도 그는 원칙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백화상방과 왕부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라고 사족을 달았다.
하지만 다른 팔황들은 그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눈치였다.
드디어 사람들의 시선이 백화상방을 담당한 ‘비파선자와 금강보살’에게 향했다.
비파선자가 막 입을 떼려는 순간, 왕부로 갔던 직일신장이 끼어들었다.
“험, 백화상방에 문제가 좀 생겼다고 들었소. 그 전에 우리 왕부의 결과를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떻소?”
직일신장의 말에 비파선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백화상방에 얽힌 이야기는 간단히 정리될 사안이 아니어서다.
“고맙소. 나와 구궁천녀는 대학사에게서 고서를 회수한 뒤, 환관과 대학사를 처리했소. 그들이 고서를 빼돌리지 않았음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그의 말이 끝나자 팔황들은 일제히 비파선자를 주목했다.
한 다리 건너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꽤나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어떤지 모르겠다.
비파선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직일신장과 구궁천녀로부터 왕부에서 회수한 고서에 대한 어떤 말도 듣지 못했어요. 사실 우리 모두 마음만 앞섰지 고서를 판별할 정도의 식견은 없잖아요.”
일곱 명의 남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필경사(筆耕士)나 대학자가 아닌 이상, 고서를 판별한다는 것은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순간 금강보살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서 내가 좀 세게 넘겨짚었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까. 다짜고짜 ‘고서를 빼돌린 자가 누구냐!’고 엄포를 놓았더니 알아서 술술 불더이다. 합비를 지날 때 십전무후에게 세 권을 바쳤다고.”
“…….”
십전무후의 이름이 나오자 전각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비파선자가 말을 이어 갔다.
“그 전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해요. 남직례성으로 가던 백화상상단과 연적하 사이에 시비가 일어났어요. 끝내 대행수가 연적하를 죽이려고까지 했다더군요. 나중에 그 일을 전해 들은 십전무후가 백화상방의 합비 출입을 금하자, 대행수가 사죄의 뜻으로 고서를 바친 거죠. 비는 세 권은 응천부에서 고서를 구입해 채워 넣었다고 하더군요.”
“허어!”
“아니, 왜 연적하를 건드려?”
“상인이라는 놈들이 남의 물건이나 빼돌리고 쯧쯧!”
“그러니 장사꾼 믿지 말라는 소리가 있지.”
화가 난 팔황들은 한마디씩 툭툭 던졌다.
그들은 한풀 꺾인 남궁세가보다 종잡을 수 없는 고수인 연적하를 더 꺼려 했다.
남궁세가는 호천맹의 일원이라 만만하게 여겼다.
백두마군인 무산낭랑 이매화와 월하선자에 짓밟힌 뒤로 더 그랬다.
하지만 연적하는 다르다.
그는 풍지산의 팔문팔상진을 깨트린 사람이며, 녹림의 이인자다.
그와의 싸움은 자칫 사파와의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남궁세가를 위해 호천맹이 움직일 일은 없지만, 녹림은 다르다. 본래 신의와 담쌓고 사는 자들이니 ‘삼년지약’이고 뭐고 간에 연적하가 부르면 달려갈 터였다.
부담스러운 것은 녹림이라는 세력만이 아니다.
연적하 개인의 무위도 절대의 지경에 이르러 있다.
팔황의 수좌인 태백선인도 당했다고 하니 선뜻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팔황들은 자기들이 쳐 죽인 백화상방을 원망하고 비난했다.
소란이 가라앉자 비파선자가 팔황들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해서 세 권의 고서가 십전무후 손에 들어갔음을 확인했어요. 고서를 받은 직후 십전무후는 연적하와 혼인을 했죠. 그리고 대담하게도 무산소축이 있는 소호 인근에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책만 열 수레를 가지고 갔지요. 분명히 그중에 고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침묵이 좌중을 감돌았다.
팔황들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고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서도 누구 하나 찾으러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팔황들에게는 무척이나 수치스러운 상황이었다.
왕부에 들어가 고서를 들고 나온 팔황들이 고작 석경장을 두려워하다니?
그야말로 개가 웃을 일이었다.
이를 빠드득 갈던 태백선인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비파선자의 말이 맞소. 대안탑의 고서는 석경장으로 흘러 들어갔을 거요. 십전무후는 천하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고서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때에 열 수레의 책을 석경장으로 가져갔다는 게 무슨 뜻이겠소? 그건 즉 ‘내가 고서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소.”
“하아!”
“허!”
팔황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말 대범한 여자가 아닌가 말이다.
그녀라면 분명 백화상방에서 비밀이 흘러나갈 수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보란 듯 석경장으로 열 수레의 책을 가지고 갔다.
천하가 유명교라면 덜덜 떠는데 그 자신감과 담력은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겠다.
“대안탑에서 나온 고서가 석경장에 있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니 대책을 의논해 보십시다. 어쩌면 좋겠소?”
그러자 화조선인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쩌다니요? 당연히 회수에 들어가야지요. 그걸 주제로 논의를 한다는 자체가 창피한 일입니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타부타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태백선인이 화조선인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선인의 말씀은 석경장을 우리 팔황이 치자는 겁니까?”
“말로 달라고 하면 주겠습니까? 설령 돌려준다 해도 그것으로 끝내시게요? 십전무후가 남모르게 필사라도 해 두었다면 어쩌려고요? 지금까지 고서를 소지한 적이 있는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니 십전무후를 죽여야 한다?”
“당연하지요. 교주님이라면 그걸 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연적하를 상대할 방법은 있소?”
“큰물이 범람하면 아무리 연적하라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큰물?”
“우리 팔황이 한마음 한뜻으로 달려가면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연적하가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녹림의 이인자에 불과합니다. 속전속결로 끝을 낸다면 녹림도 모른 척할 겁니다. 호천맹이 지금 소경과 벙어리 행세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몇몇 팔황들이 화조선인의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지금이야 그의 말에 따르는 자들이 많지만, 그가 죽으면 녹림은 도리어 우리 팔황의 눈치를 볼 겁니다. 이전부터 본교와 연적하는 죽고 죽이는 관계였습니다.”
“그에게 참살당한 십두마병들의 복수를 해 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연적하를 치자는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자 반대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사실 모두가 연적하를 죽이고 싶어 했다.
다만 녹림이라는 울타리가 너무 크고 강해서 관망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막상 화조선인의 말처럼 일단 쓸어버리면?
그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나 단체는 없을 게 분명했다.
오히려 유명교의 힘에 놀라 눈치를 살필 것이다.
팔황들은 연적하가 쉬운 상대가 아님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까다롭지만 난공불락(難攻不落)은 아닌 정도라고나 할까?
그와 직접 싸워 본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더 그랬다.
결국 화조선인이 일으킨 ‘타도 연적하’의 바람에 태백선인도 말려들었다.
“여러분이 원하니 석경장을 치는 것으로 합시다. 그러나 많은 인원을 동원하면 분명히 녹림도 움직일 것이오. 눈에 띄지 않는 적절한 숫자로 가야 할 텐데, 석경장에 대해 잘 아는 분이 계시오?”
그러자 구궁천녀가 말했다.
“제가 무산소축에서 석경장에 대해 좀 들었어요. 식객으로 구천노도 심통과 그의 어린 여제자 둘, 그리고 약제당 약사 하나가 전부예요. 그들 외에 나머지는 모두 남궁세가에서 데리고 온 일꾼이라 하더군요.”
“일꾼이라면 일반인을 말하는 게요?”
“맞아요. 숙수와 잡부, 시녀를 합해서 다섯 명 정도로 알고 있어요.”
“연적하와 십전무후의 장원답지 않게 사람들 숫자가 적구려.”
“아무 생각이 없든지, 시국을 보는 눈이 안이하든지, 둘 중 하나겠지요.”
구궁천녀는 후자(後者)라 여겼다.
유명교가 최소 삼 년간 대외 활동을 하지 않겠거니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삼년지약’ 때문에 지금의 호천맹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호천맹은 힘이 없어 약속에 얽매이겠지만, 유명교는 그럴 이유가 없다.
고서를 두고 그랬던 것처럼, 아무 때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화조선인이 호기롭게 말했다.
“연적하와 십전무후, 구천노도뿐이라면 우리 팔황만으로도 차고 넘치지 않겠습니까?”
태백선인은 잠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황은 교주 직속으로 지금까지 거의 모든 일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상대에게 세력이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화조선인의 말대로 팔황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음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태백선인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언젠가 풍지산에서 보았던 연적하의 검공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그가 호랑이라면 팔황은 늑대다.
팔황의 힘이면 그를 당해 낼 수 있겠지만 큰 희생이 따를 터.
솔직히 개를 풀어서라도 늑대의 희생을 줄이고 싶었다.
물론 개는 십두마병을 의미한다.
교주님이 키워 낸 팔황과 달리 십두마병은 언제라도 충원할 수 있으니까.
장고 끝에 태백선인은 십두마병을 동원하기로 했다.
적당히 팔황의 체면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풍지산에 있는 십두마병 중에 다섯을 뽑아 데리고 가는 것으로 합시다. 그들이 따로 움직인다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게요.”
강경파인 육통존자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팔황의 행사에 굳이 십두마병들까지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팔황들은 십두마병들을 경원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삼류 인생을 살다가 제물로 절정고수가 된 탓이다.
더구나 십두마병 다섯이면 전력이라 부르기도 부끄러웠다.
육통존자는 고작 그런 숫자를 왜 데리고 가겠다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자 태백선인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연적하는 정면으로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요. 그의 주의를 흐트러트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게요. 그렇다고 그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팔황이 뛰어다닐 수는 없지 않소.”
“미끼라는 말씀이십니까?”
“미끼라 해도 무방하지만, 악에 받치면 개도 호랑이를 물지 않겠소?”
태백선인은 다섯 명의 십두마병을 ‘지옥의 마신’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다섯 마신이 날뛴다면 제아무리 연적하라도 상처를 입지 않고는 못 배기겠지.’
그들은 살아서는 팔황의 ‘방패’로, 죽어서는 ‘칼’로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