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79
479회.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동방사자의 모습이 사라질 즈음, 텁석부리의 위사 월용대가 말했다.
“와아! 동방순찰사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살아 있었네.”
“그러게 말이오. 새로 뽑느니 마느니 하는 말까지 나왔었구먼. 그나저나 또 무슨 바람이 불려나.”
“바람은 무슨, 교주님이 천산에 콕 박혀 있다고 해서 ‘천산 지박령’으로 불리고 있구만.”
누군가의 말에 월용대가 주변을 살피며 한마디 했다.
“거 입조심하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불경스러운 소리를.”
그제야 두런두런 떠들던 위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잊혀졌던 동방사자의 출현으로 일어났던 소란은 그렇게 마무리가 됐다.
노도경은 만인당과 수라전, 천붕각을 지나 마침내 멸진각에 이르렀다.
정문에서 멀수록 사용자의 서열도 높아진다.
내성에 있는 만인당은 객당, 수라전은 행사장, 천붕각은 칠대 대주들의 거처, 멸진각은 원로와 순찰사자들의 거처로 사용된다.
외성에서 지내는 일반 교도들의 꿈은 내성에서 사는 것이고, 내성에 거주하는 교도들의 꿈은 안쪽으로 더 진입하는 것이다.
멸진각을 보는 노도경의 어깨에 힘이 가득 실렸다.
육문 출신이 아닌 그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멸진각이니 그럴 만도 하다.
천천히 멸진각의 계단을 오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더 안쪽, 오직 육문(六門)의 천인(天人, 마교 최고 지위)에게만 허락된 이궁(용화궁과 법륜궁)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흑포를 걸친 무광곡성문(無光哭聲門)의 문주 초혼귀마 요진갈과 금포를 걸친 마도단천문(魔刀斷天門)의 문주 수라혈제 금언무였다.
한순간 눈이 마주친 세 사람은 멈칫했다.
무려 십 년 만의 재회인지라 서로가 놀란 것이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 두 사람 앞에 선 노도경이 머리를 조아렸다.
노도경은 ‘상생(上生)’이지만, 육문의 문주는 무려 ‘천인’인 까닭이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요진갈과 금언무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케도 살아 있었구먼. 정의맹의 협공을 받아 사천성에서 죽었다고 하더니만.”
요진갈의 말에 금언무가 한마디 보탰다.
“나는 강남에서 돌림병에 걸려 죽었다고 들었소. 그래, 그동안 어디서서 무얼 하고 있었기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가?”
“고향에서 폐관 수련을 좀 했습니다. 이렇게 길어질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푸헐! 조금이 십 년인가. 제대로 했으면 다시 못 볼 뻔했구먼. 잘 돌아왔네. 그래도 교에 믿음직한 수하가 있었나 보군. 교주님께서 출관하자마자 돌아온 걸 보면.”
금언무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노도경을 보았다.
깜짝 놀란 노도경이 급히 물었다.
“교주님께서 출관하셨습니까?”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온 게 아니란 말인가? 운도 좋아. 서둘러 교주님부터 알현하고 오게. 그렇지 않아도 사방사자들을 찾으셨네.”
“예.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노도경은 요진갈과 금언무에게 읍을 해 보인 후 급히 안쪽으로 걸어갔다.
멀어져 가는 노도경의 뒷모습을 보던 금언무가 중얼거렸다.
“사실이라면 운이 좋은 놈이지만 거짓이라면…….”
“아마도 사실일 게요. 미생(未生) 출신으로 하생을 거쳐 상생에 올랐으니, 변변한 뒷배가 있겠소? 동방 사자가 죽었으니 다시 뽑자는 말까지 나돌았을 정도인데.”
마교에서는 입교 대기자를 ‘미생’, 일반 교도를 ‘하생’이라 칭했다.
“그래도 마음 놓지 마시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하지 않소. 운 좋은 놈이 가장 무서운 법이오.”
“흐흣! 그래 봐야 상생이 끝인 놈이오. 다시 육문(六門)의 일원으로 태어난다면 모를까.”
그 말에 금언무가 껄껄 웃었다.
마교는 육문의 것이라 ‘미생’ 출신은 영원히 ‘천인’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화궁.
노도경이 교주의 거처인 용화궁으로 다가가자 흑룡단이 나타났다.
뒤이어 흑룡단주 쾌주패도 단여락이 정중하게 물었다.
“동방사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주님과 약속이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네만 교주님께서 사방사자들을 찾으셨다고 해서 왔네.”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조금 전 멸진각 앞에서 요 문주님과 금 문주님을 뵈었네. 그분들께서 알려 주었네만. 아닌가?”
노도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마교 육문은 마교 내에서도 복마전(伏魔殿)으로 알려진 곳이라 일순 ‘당했나?’ 싶었다.
“교주님께서 사방사자를 찾으신 것은 보름 전입니다.”
“허면 보름 전에 출관하셨다는 말인가?”
“출관일은 그보다 삼 일 빨랐습니다.”
“그랬군. 그럼 다른 순찰사자들은 교주님을 뵈었는가?”
“열흘 전 북방사자님을 끝으로 삼방사자께서 다녀가셨습니다. 동방사자께서는 조금 늦으신 감이 있습니다만, 이제라도 오셨다고 아뢰어 볼까요?”
노도경을 보는 단여락의 시선이 묘하다.
흑룡단이 교주의 친위대이긴 하지만 그들은 하생.
상생인 노도경이 하늘 같은 어른이지만 눈빛은 결코 아랫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단여락은 교주의 혈족으로 상생은 물론 천인까지 넘볼 수 있는 까닭이다.
노도경도 그걸 알기에 탓하지 않았다.
“그래 주면 고맙겠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단여락이 정중하게 말한 뒤 몸을 돌려 용화궁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단여락이 흑룡단에 손을 흔들었다.
흡사 벽처럼 노도경의 앞을 막아섰던 흑룡단이 좌우로 갈라졌다.
노도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용화궁의 계단을 올랐다.
그는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두 손을 맞잡고 허리 숙여 공수(拱手)의 예를 올렸다.
“동방사자 노도경이 교주님의 출관을 경하드립니다! 영세 무궁토록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교주님, 만세! 만세! 만만세!”
보좌에 앉아 있던 칠대 천자마 단제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 하면 되었다.”
그제야 노도경은 허리를 세웠지만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고개를 들어라.”
단제산의 명이 있은 뒤에야 노도경은 얼굴을 들어 교주를 보았다.
무려 삼십 년 만에 다시 보는 교주다.
출관한 교주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그윽하게 빛나고 있었다.
교주가 도달한 경지는 어디쯤일까?
저도 모르게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노도경의 귓가로 단제산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난 십 년간 천산을 비웠다고 들었다.”
“예, 고향으로 돌아가 폐관 수련을 했습니다. 교주님께서 출관하셨다는 걸 알았다면 바로 달려왔을 것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폐관 수련한 사람이 그걸 어찌 안다고. 그래, 진전은 있었더냐?”
“교주님의 은덕에 힘입어 탈혼십삼절을 대성하였습니다.”
“탈혼십삼절을 대성했다니 대견하구나. 육문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일이다.”
“과찬이십니다. 속하의 재주가 어찌 육문에 비하겠습니까.”
“후후. 겸손 떨 것 없다. 내가 육문을 모르고, 너를 모르더냐.”
“…….”
노도경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교주도 육문 출신이라 어디까지가 칭찬인지 알 수 없어서다.
“동방의 사정은 어떠하냐. 들으니 유명교라는 사교가 득세를 하였다고 하던데.”
노도경은 동방사자의 지위에 걸맞게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소상히 전했다.
“……그렇게 유명교에서 명왕교가 갈라져 나왔습니다. 속하가 명왕교의 사대신장을 만나 보니 저들은 스스로를 ‘염마왕’의 권속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단제산이 물었다.
“염마왕의 권속이 확실하더냐?”
“권속들이 죽으면 ‘지옥의 마신’으로 변합니다. 그것으로 볼 때 허튼 소리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지옥의 마신?”
“예, 권속의 몸에서 마물이 튀어나왔습니다. 저들은 그것이 인신공양의 업(業)이라고 하였습니다.”
“흠! 그러니까 유명교 공법이 인신공양인데, 죽으면 마물로 되살아난다는 말이냐?”
“예.”
“마물이 어때서?”
단제산은 마교 교주답게 마물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어 보였다.
노도경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마물은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살육을 일삼아 저들도 기피하고 있습니다.”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살육을 일삼는다? 딱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냐. 어차피 부숴 버릴 세상에 피아가 어디 있다고?”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들의 공법을 따르면 ‘염마왕’의 권속이 되고 맙니다. 교도들에게 ‘염마왕’을 섬기라고 권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쩝! 아쉽군, 아쉬워.”
단제산이 입맛을 다셨다.
‘천자마’의 화신(化身)인 자신이 ‘염마왕’을 위해 일할 수는 없다. 그러니 유명교 공법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림 속의 떡에 불과했다.
뭔가를 곰곰 생각하던 단제산이 문득 노도경을 보았다.
“유명교와 명왕교 중에 어느 쪽이 본좌의 말을 따를 거라 보느냐?”
“명왕교입니다. 저들은 세가 약하니 교주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명왕교를 키워 도구로 사용해야겠다.”
“…….”
‘도구’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는 노도경에게 단제산이 설명하듯 말했다.
“그들을 마물로 만들겠다는 소리다.”
노도경은 슬쩍 교주의 안색을 살폈다.
단호한 표정을 보니 그저 해 본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교주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희는 아직 마물의 특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옵니다. 조금 더 알아보신 후에 결정하는 것이…….”
“몰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라 하심은?”
“무광곡성문(無光哭聲門)이라면 명왕교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이다.”
순간 노도경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칠대’가 아니라 마교 ‘육문(六門)’ 중에 ‘일문(一門)’을 보내겠다니 그럴 만도 하다.
“교주님, 혹 천하를 얻으려 하십니까?”
“흥! 천하를 얻어 무엇에 쓰게? 본좌가 원하는 것은 죽음뿐이다. 너는 무광곡성문과 명왕교의 만남을 성사시켜라. 뒷일은 요 문주가 알아서 할 것이다.”
“존명!”
노도경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무광곡성문은 ‘사령술’과 ‘언령’으로 악명이 높다.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쓰시려는 모양이군.’
명왕교를 키운 뒤에, 그들 스스로 명왕교도를 죽여 마물로 만들려는 모양이다.
무광곡성문의 문주 초혼귀마 요진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요 문주의 ‘언령’은 이미 신화지경에 이르렀으니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자신의 살아생전에 강호를 종횡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이야!
정파의 호천맹은 유명무실한 상태고, 유명교는 무림 경영에 뜻이 없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그때 문득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녹림의 태상호법이자 무당파 제자 연적하다.
-아무리 눈에 거슬려도 무당파와 남궁세가는 건드리지 마요. 거길 건드리면 나를 만나게 될 거예요.
그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 울리는 듯했다.
마교 일문과 함께 강호에 나가려는 순간 왜 그놈 얼굴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무당파와 남궁세가만 건드리지 말라고 했겠다?’
무광곡성문의 요 문주에게는 적당한 때에 넌지시 말해 주면 될 것이다.
가급적 연적하라는 놈과의 마찰을 피하라고.
‘설마 명왕교가 강서성 여산에 있는데 만날 일이 있으려고.’
여산에서 합비는 빨리 가도 칠 일 거리다.
어느 한쪽이 작정하고 찾아 나선 게 아니라면 다시 얼굴 볼 일은 없다.
분명히 그런데 왠지 개운치가 않다.
‘왜 이렇게 찜찜하지?’
나가지 않고 뭉그적거리는 노도경을 단제산이 지그시 응시했다.
“할 말이 남았느냐?”
“아닙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황망히 말을 내뱉고 돌아섰다.
교주에게 ‘이십 대 초반의 애송이가 신경 쓰인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