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83
483회. 깜찍과 끔찍 사이
산서성.
교구현.
풍지산 선녀암.
인생은 신비하다.
내 편 임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인데 밉지 않은 사람이 있다.
지금 유명교 교주인 팔황신모가 그랬다.
태백선인의 보고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그녀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그가 운기조식 중이던 ‘화조선인’, ‘음양천선’, ‘금강보살’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고서는 줄 수 있지만 석경장을 건드리면, 필사를 해서 천하의 모든 책방에 뿌리겠다’고…….”
태백선인은 슬며시 교주의 안색을 살폈다.
팔황 중에 셋이나 중상을 입었다는데 평상시와 다름없는 표정이다.
그는 교주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화조선인, 음양천선, 금강보살은 그의 ‘내가중수법’에 내력을 잃었습니다.”
그제야 교주는 감정을 내보였다.
“쯧쯧! 어리석은 것들. 연적하와 십전무후는 정사파 최고의 기인들이다. 모두 죽지 않고 돌아온 것만도 천운(天運)으로 알아야 할 것이야.”
“다시 기회를 주신다면 석경장을 피로 씻겠습니다.”
“분노로 이성을 잃었구나. 내가 바라는 것은 석경장을 피로 씻는 것이 아니라 고서다. 석경장이 고서만큼의 가치가 있는 줄 아느냐.”
교주의 힐난에 태백선인은 고개를 숙였다.
강호에 팔황의 일이 널리 알려졌는데, 설마 이대로 덮으려는 것일까?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지은 죄가 있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오면 석경장은 어찌할까요?”
“너, 연적하가 그 셋을 왜 폐인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느냐?”
태백선인은 즉답을 피했다.
교주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전해야 하는 까닭이다.
“본교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일벌백계로 다스리심이…….”
태백선인이 일벌백계를 입에 올린 이유가 있다.
교주인 팔황신모가 전면에 나선 이후로 유명교는 특정 방파를 손본 적이 없었다.
그 이전의 혈사들은 죄다 백두마왕들이 저지른 일이다.
공교롭게도 교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유명교는 잠잠했다.
군림천하에 뜻을 둔 백두마왕들이 명왕교로 떨어져 나가 그렇게 됐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유명교는 호천맹 저리 가라고 할 만큼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태백선인은 이번 기회에 유명교의 위엄을 보여 줬으면 했다.
그렇게 함으로 땅에 떨어진 팔황의 권위를 되찾고 싶었다.
팔황신모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아무래도 태백선인은 연적하에 대한 분노로 판단력을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그는 본교와 싸우기를 원치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너희는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
태백선인은 고개를 더 깊게 숙임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었다.
“석경장을 건드리면 유명교도 그만한 피해를 입게 될 거라는 걸 보여 준 거라고나 할까.”
태백선인이 힐끔 교주의 눈치를 살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펄펄 뛰었을 텐데 교주는 시종일관 무덤덤했다.
“깜찍한 녀석이지. 하지만 그럴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끔찍하기도 하고.”
태백선인은 교주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교주가 그를 쳐 죽일 생각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연적하나 석경장이 아니라 고서다. 분노의 감정으로 본말(本末)이 전도되어서는 안 될 일이야. 십두마병을 보내라.”
태백선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놀랍게도 교주는 유명교의 권위에 도전한 석경장을 그냥 내버려 둘 모양이다.
“연적하에게 직접 고서를 가지고 풍지산으로 오라 해라. 만약 거절하면 ‘석경장’은 물론 ‘남궁세가’까지 말살해 버릴 것이다.”
“예.”
태백선인은 이마가 ‘쿵!’ 하고 바닥에 닿을 때까지 머리를 조아렸다.
처음으로 고서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유명교의 권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걸까?
***
하남성.
정주.
칠리하촌.
‘삼년지약’ 이후 천지맹에서 사파가 떨어져 나가고 만들어진 게 호천맹이다.
구성원이 같다 보니 그들은 정의맹의 시설을 물려받듯 사용했다.
정의맹과 구별하기 위해 총단을 정주로 옮긴 것만 빼면, 사실상 ‘도로 정의맹’이었다.
통천각.
빈자리가 많아 휑해 보이는 회의실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칠파일문의 대표들이다.
‘삼년지약’에 묶여서 그런지 칠파일문의 대표는 거의 장로들이었다.
맹주인 화산파 장문인 무극상인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각파의 장로들이 무기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럴 때는 천지맹 시절의 떠들썩함이 그립다.
비록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싸움이 일어나 골치가 아팠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죽은 생선 눈빛을 한 사람은 없었다.
만약 맹주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결코 이 자리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씁쓰름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볼 때, 총사 공손일랑 공손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안건은 ‘석경장’에 관한 것입니다.”
‘석경장’이라는 말에 무당파 장로 천성 도사가 움찔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차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석경장’의 일은, 단지 그들의 문제였다.
“석경장에 대한 이야기는 한두 개 정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남천과 십전무후가 세운 장원으로 ‘팔황의 혈사’를 밝혀낸 곳이지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진파 장로 일월검 무무 진인이 딴지를 걸었다.
“‘팔황의 혈사’는 소문일 뿐입니다. 석경장에서 그걸 인정한 적도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부인한 적도 없지요.”
그러자 이번에는 점창파 장로 도천 진인이 넌지시 한마디 했다.
“부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렴요.”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공동파 장로 월명상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에는 무당파 장로 천성 도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말씀 중에 송구합니다만 본파에서 석경장을 방문해 남천 연적하를 만났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자면 ‘팔황의 혈사’는 사실입니다.”
“…….”
소문에 불과하다고 했던 무무 진인과 도천 도사, 월명상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공손기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팔황의 혈사’는 곧 ‘유명교와 석경장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비록 석경장이 호천맹에 속한 방파는 아니지만, 남천과 십전무후의 사문을 생각하면 마냥 모른 척하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게 옳은지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을 찍어 눌렀다.
석경장의 문제는 ‘삼년지약’과 얽혀 있어 누구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건 연적하의 사문인 무당파 천성 도사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눈치만 보자 전진파의 무무 진인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호천맹이 석경장의 일에 관여하면 ‘삼년지약’을 어기게 되는데……. 장문인들께서 문파 이름으로 한 약속을 우리가 깰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삼년지약’이라는 말에 장로들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유명교가 석경장을 치는 것은 ‘삼년지약’과 무관했다.
석경장이 호천맹에 속하지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호천맹이 석경장을 도우면, 유명교를 적대시하는 것이니 ‘삼년지약’에 어긋난다.
이래저래 호천맹은 그냥 구경만 해야 하는 처지였다.
공손기는 암암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삼년지약’에 묶여 있는 한 호천맹은 유명교와 관계된 어떤 일에도 나설 수 없다.
그렇다고 ‘삼년지약’을 깰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명교를 상대로 싸우려면 먼저 사파와 연합해야 하는데, 그 일을 추진하는 데만도 최소한 반년은 걸릴 게다.
반년 후에 연합한다는 보장도 없다.
녹림 총채주 파천마군 석무해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지난번에야 유명교가 녹림을 건드려서 그랬다지만, 지금은 또 사정이 다르다.
지금의 유명교는 더 이상 파천마군의 적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사파의 연합은 호천맹의 바람에 불과할 뿐이다.
공손기는 슬쩍 맹주를 바라보았다.
무극상인은 총사와 눈이 마주치자 지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삼년지약’은 맹주라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으니 더 이상의 논의는 시간낭비에 불과했다.
공손기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이러니 사람들이 호천맹을 비웃지.’
‘천하에 석경장만 보인다’는 말이 괜히 나돌아다니는 게 아니다.
그때 공동파 장로 월명상인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석경장의 일은 ‘삼년지약’이 있는 한 어쩔 수 없습니다. 빈도는 석경장보다 ‘남맹’이 더 문제라고 보는 데,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그가 ‘남맹’으로 화제를 돌리자 다 죽어 가던 사람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확실히 정파 연합체인 ‘남맹’은 호천맹에 큰 고민거리였다.
호천맹이 자기 할 일을 잘하고 있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유명무실한 상태에서 남맹의 존재는 호천맹의 무능만 더욱 드러낼 뿐이었다.
점창파의 도천 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남맹’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봐도 이건 정파의 분열입니다. 칠파일문을 중심으로 뭉쳐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군소 방파들이 따로 모이다니요? 지금이야 남직례성에 국한되어 있지만, 세력이 커지면 인근 성으로 진출할 수도 있습니다.”
‘인근 성으로 진출할 수도 있다’는 말에 장로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호천맹의 유명무실한 상황이 지속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전진파 무무 진인이 한 걸음 더 나갔다.
“‘삼년지약’이 아직 일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천하에 석경장만 보인다’는 말이 나돌아다닙니다. 만약 석경장이 ‘남맹’에 가입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자 무당파 천성 도사가 바로 반박했다.
“석경장이 ‘남맹’에 가입한다고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왜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남맹’은 남직례성에 있는 군소 방파의 친목 모임입니다. 석경장이 ‘남맹’에 가입하고 싶어 해도, ‘남맹’에서 받아 주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유명교와 전쟁을 하려 하겠습니까?”
“…….”
무무 진인은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당분간 석경장이 ‘남맹’에 가입할 일은 없었다.
그때 공동파 장로 월명상인이 화제를 돌렸다.
“물론 ‘남맹’에서 석경장을 받아 주지는 않겠지요. 그렇다 해도 현재 호천맹에 가장 큰 피해를 주는 곳은 ‘남맹’입니다. 물론 ‘남맹’이 고의로 그러는 건 아니겠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걸 그들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 천성 도사가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래서요? ‘남맹’에 해산하라고 할까요? 우리가 여기서 ‘남맹’을 물고 늘어져 봐야 인심만 잃게 될 뿐 입니다. 오히려 호천맹이 일을 제대로 하면 ‘남맹’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도 시들해질 겁니다.”
하지만 월명상인은 수긍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 호천맹이 일할 수 없는 상황이니 하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이 년간 호천맹은 유명무실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겁니다. 그동안 ‘남맹’이 남직례성에만 머물러 있을 것 같습니까?”
그의 억지에 천성 도사의 말이 조금 거칠어졌다.
“‘남맹’은 남직례성의 친목 모임입니다. 다른 성으로 진출하는 순간 호천맹과 마찰을 일으키게 될 텐데, ‘남맹’에서 그걸 바랄 것 같습니까? 그건 석경장이 ‘남맹’에 가입할 거라는 것과 비슷한 망상입니다.”
“천성 도사!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지금 망상이라고 했습니까!”
“망상은 아니지요. 심했습니다.”
“그러게요. 조금 전 빈도에게는 허무맹랑이라고 하더니만, 오늘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점창파 도천 진인과 전진파 무무 진인도 한마디씩 점창파 도천진인과 전진파 무무진인도 한마디씩 쏘아붙였다.
천성 도사가 몰리자 화산파 장로 불수산인이 그를 거들기 위해 나섰다.
“그러시는 세 분도 무리한 주장을 했습니다.”
“뭐가 무리한 주장이라는 겁니까?”
월명상인이 따지듯 물었다.
“석경장이 ‘남맹’에 가입한다느니, ‘남맹’이 다른 지역으로 세를 넓힐 거라느니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무리를 넘어서 유언비어에 가깝습니다.”
“어허! 유언비어라니요! 안 그럴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불수산인께서 책임지실 거냐고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할 줄도 아세요! 여기 화산파보다 못한 문파가 있는 줄 아십니까!”
“뭐라고요? 지금 공동파가 우리 화산파보다 뛰어나다고 한 겁니까! 사과하세요!”
장로들 사이에 갑자기 고성이 난무했다.
그런 장로들의 모습에 공손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망해 가는 집구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아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