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89
489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연적하는 십두마병을 돌려보내고 안채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간 그는 독서 중인 십전무후 남궁연 앞에 슬며시 앉았다.
그의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순간, 남궁연이 책을 덮으며 말했다.
“나도 갈 거야.”
“이번에는 느낌이 좀 안 좋아서 그러는데 그냥 남아 있으면 안 돼요?”
“그럴수록 함께 가야지. 팔문팔상진에 걸려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혼자서는 빠져나오기 어려울 거야.”
“…….”
연적하는 반박하지 못했다.
솔직히 진법에 문외한인 자신에게 팔문팔상진은 개미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흐음! 그렇기는 한데…….”
“뭐가 걱정돼서 그래? 설마 내가 짐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남궁연이 짐짓 인상을 쓰자 연적하는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설사 천하십대고수라 해도 십전무후를 짐이라고 하지는 못할 거예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그녀가 짐일 리가 있나.
“표정은 영 아닌데?”
“그냥 찜찜해서 그래요.”
“뭐가?”
“며칠 전에 귀신 들린 애 있었잖아요.”
“유교원?”
“네. 그놈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고요.”
“무슨?”
“내가 피눈물 흘리는 걸 보았다나, 뭐라나. 확 귓방망이를 날리려다가, 몸뚱어리 주인에게 무슨 죄가 있나 싶어서 참았어요.”
“잘했어. 부모 앞에서 자식을 건드리면 좋은 일 하고도 욕먹어.”
연적하는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참았다.
그녀를 잃어버리고 펑펑 울던, 그 불길한 꿈은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연적하가 머뭇거리자 남궁연이 말했다.
“내가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사람이 살고 죽는 건 하늘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만약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닐 거야.”
“…….”
연적하는 잠잠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자신이 피눈물을 흘렸다’는 불길한 소리에 대한 설명처럼 들렸다.
“운명이라는 걸 만나게 된다면 인간이 할 일은 두 개야. 순응하거나, 혹은 극복하거나. 언젠가 가혹한 운명을 맞닥뜨려도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때는 하늘이 또다시 너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해. 순응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그러니까 나와 풍지산에 함께 가겠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죠?”
“훗! 맞아. 위험한 곳일수록 너를 혼자 보내지 않을 거야. 난 ‘십전무후’니까.”
“쳇! 내가 뭐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요?”
“그럴 리가. 네가 어린애가 아니라는 건 내가 더 잘 알아. 와룡장의 그 어린애였다면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을 테니까.”
“내가 언제 누님을 괴롭혔다고 그래요?”
“몰라서 물어?”
남궁연이 수줍은 듯 샐쭉한 표정으로 연적하를 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렇지 않아도 뜨거운 연적하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누님…….”
연적하가 은근한 어조로 부르자 남궁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저녁도 먹기 전인데.”
“발등에 떨어진 불은 꺼야죠.”
“피이! 하루 종일 밖으로 나돌아다니더니 언제 불이 떨어졌다고.”
“지금요. 나한테는 누님이 불이라고요.”
구천노도 심통에게 ‘인생이 심심하다’고 투정 부리던 연적하의 몸에 불이 붙었다.
***
만리각(萬里閣).
석경장은 여러 곳에서 남궁세가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것도 그랬다.
남궁세가의 직계들이 ‘구주각(九州閣)’을 이용했다면, 석경장은 ‘만리각’에서 모였다.
‘쩝쩝’거리며 저녁을 먹던 심통이 불쑥 말했다.
“이번에는 저도 가겠습니다. 공자님 내외가 가시는데 제가 빠질 수는 없지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월아와 금아도 끼어들었다.
“저희도 가게 해 주세요.”
“네, 가모님의 시중을 들게 해 주세요.”
심통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자신도 허락받지 못한 상황에서 제자들까지 챙길 여력이 없어서다.
연적하가 애매한 얼굴로 심통과 그의 제자들을 보았다.
남궁연과 오붓하게 다녀오려고 했는데 ‘가모님 시중을 들겠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자신이야 한평생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게 살았으니 상관없지만 남궁연은 다르다.
과거 녹림의 일로 천하를 주유할 때 남궁연은 여러모로 불편해했다.
월아와 금아가 시중을 든다면 좀 다르지 않을까?
연적하가 고민하는 듯하자 심통이 선언하듯 말했다.
“공자님. 저는 무조건 갈 겁니다.”
“심 노인은 말년에 왜 고생을 자처해? 그냥 편하게 쉬고 있지. 주루 공사도 아직 안 끝났잖아?”
“믿고 맡겨야지요. 그게 아니라도 구천노도의 공사에 장난질을 칠 놈은 없습니다.”
“공사 대금은 지불해야 할 거 아냐?”
“다녀와서 주면 됩니다.”
“언제 올 줄 알고? 그때까지 목수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으라고?”
“늦어져도 되니까 천천히 하라고 하지요. 돌아와서 준다고 하면 알아서 공사 속도를 조절할 겁니다.”
“하여간 이기적이야. 세상이 심 노인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이기적이라니요? 늦어도 된다고 하면 목수 놈들도 따로 자기 밥벌이를 하면서 일할 겁니다. 그 정도 생각은 있는 놈들입니다.”
심통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연적하도 더는 막지 않았다.
월아와 금아를 데리고 가면서 그녀들의 스승인 심통만 남겨 두기도 뭐해서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마차를 얻어 탈 생각은 하지 마.”
“마부 옆에 앉으면 됩니다.”
“그건 알아서 해.”
마침내 허락이 떨어지자 심통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때 묵묵히 젓가락을 놀리던 삼보절명 당운망이 말했다.
“나도 갔으면 하는데.”
목적어가 생략되어 혼잣말처럼 보이지만, 소리가 워낙 커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대번에 심통이 받아쳤다.
“약제당이나 지키고 있지 가긴 어딜 간다는 게야? 풍지산이 애들 놀이터인 줄 아느냐?”
“흥! 네놈과 어린아이들도 가는 곳이니 안 봐도 훤하다.”
“클클, 미친놈.”
당운망의 말에 심통은 기가 막히는지 실소를 터트렸다.
저 끔찍한 ‘팔문팔상진’이 설치된 풍지산을 안 봐도 훤하다고 하다니?
이번에는 연적하가 물었다.
“당 노인은 또 왜 가겠다는 거야?”
“당가에서 그 수모를 당했는데 가만히 있겠나? 분명히 가주인 당세호가 정예를 이끌고 올 걸세. 나만 남아 있다가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당운망은 남궁연에겐 극존칭을 썼지만 연적하에게는 은근슬쩍 말을 내렸다. 습관이 돼서 그렇다는데, 심통이 지랄을 해도 바뀌지 않았다.
연적하는 슬쩍 남궁연을 보았다.
당운망의 예측이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당 노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당 가주의 성정(性情)에 참고 넘어가지는 않을 거야.”
남궁연의 말에 당운망이 보란 듯 턱을 치켜올렸다.
연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석경장이 비게 되는데. 그래도 괜찮으려나.”
“당가 사람들도 일반인은 해치지 않을 거야. 그들이 괴팍하다고 해도 호천맹에 속해 있으니까.”
“그렇겠죠?”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당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당운망만 남겨 두고 가기도 마음에 걸렸다.
마음을 정한 연적하가 당운망에게 말했다.
“당 노인도 준비해. 심 노인처럼 마차에 얻어 탈 생각은 하지 마. 마차에는 누님과 나, 그리고 월아와 금아만 태울 거니까.”
심통이 재빨리 한마디 보탰다.
“마부석 옆자리는 내 차지니 눈독 들이지 마라.”
“흥! 그런 자리는 앉으라고 해도 사양이다. 네놈은 거기서 말똥이나 실컷 봐라.”
사실 당운망이 노리는 것은 마차 지붕이었다.
네 사람을 태울 정도의 마차라면 마부석보다 지붕이 더 나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
호광성.
무한.
양자강(揚子江) 나루터.
정오 무렵.
오십여 기의 인마(人馬)가 불쑥 나타났다.
여산의 명왕교를 목표로 대륙을 종단(縱斷)하다시피 하고 있는 마교 고수들이다.
나루터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흩어졌다.
마교 고수들이 내뿜는 죽음의 기운에 기가 질려 자리를 피한 것이다.
알아서 사람들이 달아나자 무광곡 성문 문주 초혼귀마 요진갈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눈에 띄게 큰 배를 발견한 혈룡대 대주 생기사귀 우불도가 말을 몰아 달려갔다.
그는 무식하게 말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
‘따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에 놀란 선주가 선실에서 갑판으로 튀어 나왔다.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러 나왔던 선주, 성수척은 마상의 남자를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붉은 장포와 등 뒤의 대도를 보니 무림인이다.
그것도 그저 그런 무림인이 아니라 눈빛만 봐도 오금이 저리는 그런 무림인 말이다.
자연히 태도가 공손히 바뀌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네가 이 배의 주인이냐?”
“예.”
“여산까지 갈 것이다. 나의 일행이 승선을 마치면 바로 출발해라.”
“예, 예.”
비록 다른 상방과 계약이 된 상태지만 그는 무조건 ‘예’라고 했다.
중년인의 시뻘건 눈동자를 보면서 차마 다른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오십여 기의 인마가 배에 올랐다.
성수척은 그들의 승선을 확인하자마자 사공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직 빈자리가 많이 남았지만 배는 강의 중심부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선수(船首)에 서서 물끄러미 강물을 보던 요진갈이 슬쩍 물었다.
“동방사자. 네게는 이 뱃길이 두 번째겠구나?”
“그렇습니다.”
“지난번에는 누구와 함께였더냐? 설마하니 여자는 아니었을 테고.”
동방사자 탈혼마검 노도경은 괜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즉시 답했다.
“녹림의 연적하라는 도적과 동행했었습니다.”
“연적하?”
육문(六門)의 사람들은 천산을 벗어나지 않아 세상일에 어두웠다.
당연히 ‘무광곡성문’의 문주인 요진갈도 연적하를 알지 못했다.
“예, 근자에 들어 제법 무명(武名)을 날리고 있는 신진고수입니다.”
요진갈이 노도경을 힐끔 보았다.
수십 년 만의 강호출도다 보니 ‘신진고수’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던 것이다.
“네가 데리고 다녔다니 쓸 만한 놈이었나 보구나?”
“문주님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할 겁니다.”
노도경은 연적하를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다.
요진갈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면 여러모로 피곤해지는 까닭이다.
“푸흣! 벌써부터 네 사람이라고 챙기는 것이냐?”
요진갈은 연적하를 노도경의 인맥 중에 하나로 받아들였다.
노도경이 죽이지 않고 며칠씩이나 데리고 다녔으면 ‘사실상 그의 사람’이라 보는 게 맞았다.
“…….”
노도경은 슬그머니 요진갈의 시선을 회피했다.
‘네 사람’이라니?
연적하가 곁에 없으니 망정이지, 들었으면 배를 움켜잡고 웃을 일이었다.
그는 요진갈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서둘러 주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문주님. 말씀드렸다시피 명왕교에는 십두마병과 백두마군이 있습니다. 어느 쪽을 키워 주실 생각이신지요?”
“빠르게 키워 죽음을 널리 퍼트리려면 십두마병이 낫지 않겠느냐?”
백두마군 하나를 만들 노력이면 십두마병 열이 만들어진다.
그의 입장에서는 공들여 백두마군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살육이 목적인데 백두마군이면 어떻고 십두마병이면 어떻단 말인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노도경도 요진갈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어쩌다 일이 틀어질 경우, 백두마군으로 만들어진 마물을 처리할 자신이 없어서다.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혈룡대 대주 우불도가 끼어들었다.
“문주님, 나중에라도 유명교가 명왕교를 노리지는 않겠습니까?”
“그럴 테지.”
요진갈은 피식 웃었다.
아무리 유명교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올랐다 해도 마교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무 때라도 명왕교 뒤에 마교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조용히 물러갈 터였다.
“그런 ‘귀찮은 일’을 처리하라고 너희 혈룡대를 끌고 나온 것이 아니냐.”
유명교를 ‘귀찮다’고 할 만큼 ‘마교육문’에 대한 요진갈의 자부심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