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9
49회. 사람 사는 느낌
늦은 밤 술자리가 끝나자 도둑들은 숙소로 흩어졌다.
구밀복검 심양각과 독심낭인 황요명, 천기덕도 방으로 돌아가 잠잘 준비를 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아 속이 뒤틀린 것일까?
술자리 끝 무렵부터 구시렁거리던 황요명이 심양각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어르신, 풍 채주가 한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
“박리다매 어쩌고 한 말요. 상인들이 속여도 그대로 두라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심양각이 삐뚜름한 눈으로 황요명을 바라보았다.
‘헐! 이 멍청한 놈이 넉 달 동안 채주 노릇을 하더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놈은 아직도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봉십걸의 무위가 언제 그를 추월할지 모르는 판국에 말이다.
“상인 나부랭이가 녹림을 속이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두라니요? 정말 문제 아닙니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예?”
황요명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언제나 뒤에서 함께 풍 채주를 씹어 대던 심양각이 갑자기 왜?
“귓구멍이 막혔느냐? 풍 채주가 마음에 안 들면 산채를 나가라고, 새끼야.”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어르신께서 주인이 되면 좋겠다는 충심에…….”
“이런 미친놈!”
심양각이 앉은 자세에서 발을 내질렀다.
쿠당탕.
뒤로 두어 바퀴를 구른 황요명이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쇼!”
“죽고 싶으면 혼자 조용히 죽지, 왜 나까지 끌어들이고 지랄이야? 다시 한 번 주둥이를 함부로 놀렸다가는 내 손으로 네놈의 멱을 따 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라.”
“예, 예.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황요명은 머리를 방바닥에 처박고 눈을 끔뻑였다.
심양각이 한 말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어서다. 몇 달 전까지 호시탐탐 채주 자리를 노리던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도 있단 말인가?
***
다음 날.
천기덕은 점심 무렵에야 겨우 눈을 떴다.
방 안이 조용해서 슬쩍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평소 황요명은 자기보다 늦게 일어나면 발로 차서 깨우곤 했다. 그런 그가 조용히 나간 걸 보면 어제 일로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평소 황요명에게 시달리던 천기덕은 속이 다 시원했다.
꼬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허기가 느껴진다.
천기덕은 식당으로 가서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먹은 뒤 마당으로 나왔다.
배를 채우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다.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는 우연히 뒷마당에서 친구 이철산을 발견했다.
“철산아.”
“어. 기덕이. 여기까지는 웬일이냐?”
이철산이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숙소가 바뀐 뒤로 이전처럼 자주 어울리지 못한 까닭이다.
“그냥 돌아다니다가 와 본 거야. 뭘 했기에 그렇게 땀을 흘리냐?”
천기덕은 뻔히 알면서도 돌려 물었다.
“어제 채주님이 무공 수련을 하라고 했잖아. 시키는 대로 해야지. 너는 좀 진전이 있냐?”
이철산은 무심코 ‘진전’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진전은 뭔가 주력으로 익히는 무공이 있을 때나 쓸 법한 말이다.
무관을 전전하며 기본기만 익힌 천기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뭐 일단 삼재도법이나 육합도법 같은 건 다 익혔다. 너도 알지?”
이철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재도법, 육합도법, 팔상도법, 용호도법 따위는 군소 무관에서 필수적으로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러는 너는 어때? 연 형님에게 무술을 배웠다더니 실력이 좀 늘었냐?”
천기덕이 묘한 눈으로 이철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한동네에서 자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거의 없었다. 십 년 이상 서로 치고받으며 지낸 터라 약점과 장점도 빠삭하다.
이철산이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조금 늘기는 했지만……. 아직 멀었어. 연 형님이 앞으로 이삼 년은 더 수련해야 한대.”
“그래? 오랜만에 한번 겨뤄 볼까?”
천기덕이 호승심에 불타는 눈으로 이철산을 바라보았다.
연적하에게 배워서 얼마나 늘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럴까?”
자신의 실력이 궁금하기는 이철산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알아보기에 천기덕만 한 상대도 없다. 두 사람은 몇 달 전까지 호적수였으니까.
두 사람은 목검을 들고 마주 섰다.
“차핫!”
기합과 함께 천기덕이 먼저 선공을 시작했다.
따다다닥. 딱.
천기덕은 육합도법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목검을 움직였다.
한참 목검을 휘두르던 천기덕은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마치 짜고 움직이는 것처럼 두 사람의 목검이 중간에서 ‘딱딱’ 부딪쳤다.
우연이라도 빗나가는 법이 없다.
본래 목검으로 치고받고 하다 보면 다섯에 한두 번은 헛손질이 나왔다. 그런데 둘의 목검은 소름 끼치도록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다.
따다다다닥.
폭풍처럼 상대를 몰아친 뒤에 천기덕은 숨을 헐떡였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타악.
천기덕은 신경질적으로 이철산의 목검을 후려친 뒤 거리를 벌렸다.
“하아! 하악! 그만하자. 힘들어서 못 하겠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숨 쉬는 천기덕을 보며 이철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했다.”
“…….”
천기덕은 차마 이철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막상막하였는데 이철산은 진짜 무림인이 된 것 같았다.
고작 반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이구, 나도 술 끊고 수련 좀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숨이 차서야.”
천기덕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뒷마당을 떠나갔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이철산은 다시 박도로 바꿔 들었다.
그리고 일 식인 비룡승천을 펼쳤다.
하단세에서 시작된 도는 갈지자 형태로 올라가다가 머리 위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 상태에서 도는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다가 지면으로 떨어졌다.
한순간 도신에 새파란 기운이 맺혔다.
츠츠츠-.
이철산은 도를 세우고 살짝 가빠오는 숨을 가라앉혔다.
도신에 맺혀 있던 묵직한 기운이 연기처럼 스르륵 흩어졌다.
연이어 최근에 배운 용무천상.
이철산은 상단세에서 좌우를 몰아친 후 마지막으로 정면을 깊숙이 찔렀다.
뒤꿈치를 살짝 드는 순간 도 끝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적하가 그랬던 것처럼 도풍이 몰아치지는 않았다.
“아!”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도 끝으로 기운이 쏟아져 나갈 것도 같은데.
‘아쉽다. 아쉬워!’
이삼 년쯤 지나면 간질간질한 이 기운을 밖으로 뽑아낼 수 있으리라.
그다음에는?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소백의 꿈이 찻집이라면, 한채연은 대도시에서 작은 객점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먼저 오봉산에서 내려가야 한다.
오봉십걸은 언제까지 그 이름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고수가 된다는 건 기쁜 일이지만 이별을 생각하면 조금 울적해진다.
***
해거름 무렵.
오봉산 제일봉에서 구천세법을 수련하던 연적하는 도를 갈무리했다. 붉게 타들어 가는 노을을 보고 있으려니 오늘따라 마음이 허전하다.
이런 날은 구천기를 연성하는 게 좋은데 사람 마음이 또 그렇지 못하다.
연적하는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뒷마당으로 향했다.
무공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던 오봉십걸들이 연적하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가장 연장자이자 대형인 풍연초가 먼저 말했다.
“연 아우, 우리가 조금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말이야. 그것에 대한 연 아우의 의견을 들어 보고 싶어서.”
“뭔데요?”
“연 아우가 우리에게 구천세법의 일 식과 이 식을 가르쳐 주었잖아.”
“그랬죠.”
“그런데 일 식인 비룡승천을 펼치면 말이야. 박도에 파르스름한 도기가 맺히거든? 그 고수들이나 가능하다는 도기 말이야. 우리 수준에 이게 말도 안 되는 일이기는 한데. 어쨌든 진짜 도기가 맺혀.”
“그래서요?”
“우리는 고작 반년밖에 익히지 않았는데, 이게 가능한 거야?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다들 ‘우리가 고수가 된 거다’, ‘아니다’ 말들이 많아.”
한채연이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요. 우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오라버니가 정확히 가르쳐 주세요. 괜히 고수인 줄 알고 나대다가 칼 맞아 죽고 싶지 않거든요.”
연적하는 오봉십걸들이 느끼는 혼란을 이해했다.
그건 백자구결과 구천세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었다.
“백자구결의 축기 속도가 빠른 건 사실이지만 여러분은 아직 도기발출(刀氣拔出)에 이르지 못했어요. 지난번에 포씨 사당에서 말했잖아요. 구천세법의 바른 자세가 힘을 온전히 끌어내 준다고. 항마도법이나 천지도법, 육합도법 등으로 해 보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풍연초가 알 듯 말 듯 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구천세법을 펼칠 때만 도기가 나온다는 거네?”
“네, 정확히는 백자구결의 공력으로 구천세법을 펼칠 때죠.”
“아! 결국 반쪽짜리 고수라는 거구나.”
“상심하지 마세요. 정진하다 보면 언젠가는 형님의 천지도법으로도 도기를 일으킬 수 있을 겁니다.”
여덟째인 이철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아까 천기덕과 비무를 했었는데 그의 움직임이 눈에 훤히 들어오더군요. 구천세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쉽게 상대할 수 있었습니다. 구천세법과 백자구결이 깊어질수록 무위도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오봉십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구천세법에 상승의 무리(武理)가 담겨 있어 연마할수록 실력이 느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문득 셋째인 마형도가 풍연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큰형님, 형님께서 산채에서 손을 뗐다는 말이 나돌던데 알고 계십니까?”
“응? 손을 뗀다고 말한 적 없는데?”
넷째인 허임달이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어젯밤에 들었습니다. 큰형님이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셨다고 수군대더라고요.”
“내가 산행을 나가지 않아서 그러나?”
둘째인 탁고명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계속 황요명에게 맡겨 두고 있으니 그런 말이 돌 만도 합니다.”
“그랬군. 너희는 다시 산행을 나가고 싶으냐?”
풍연초가 오봉십걸들을 휘둘러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오봉십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저었다. 평생 산채에서 살 게 아니라면 도적으로 얼굴을 팔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딱히 다른 목표가 없는 마형도와 허임달도 반대했다. 물론 그들의 경우 한겨울 추운 날씨에 산속을 뛰어다니고 싶지 않아서다.
“셋째와 넷째는 날이 풀리면 산행을 나갈 거지?”
“예.”
“그러려고요.”
도둑과 강도 출신인 두 사람은 녹림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풍연초가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 아우는?”
“잘 모르겠어요.”
연적하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특별한 인생의 계획이 없는지라 산행을 두고 고민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오봉십걸들이 가자면 가고 쉬자면 쉬었을 뿐이다.
탁고명이 끼어들었다.
“그럼 연 아우도 이참에 산행은 접어. 그런 무위로 고작 도적질이라니.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야. 그냥 여기서 우리나 슬슬 가르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때?”
“그래요.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에게 좀 더 배우고 싶어요. 강호에서 오래오래 살려면 함께 있을 때 많이 배워 둬야 한다고요.”
하소백의 애원에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도둑질보다 의형제들의 무공을 봐주는 게 더 좋았다.
“그렇게 할게요.”
연적하가 승낙하자 오봉십걸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운 의형제들 속에서 연적하는 피식피식 웃었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느낌이다.
구천여일진경에서 ‘구천기는 허무한 가운데 오는 것이니 허심(虛心)으로 기다리라’고 했지만, 아직은 시끌벅적한 게 더 좋다.
꼭 대붕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