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93
493회. 기꺼운 마음으로 맞이하라
서풍객점.
연적하 일행은 아직 석양이 지기도 전에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붉게 물드는 노을을 멍하니 보던 청운검 남궁천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좋은 사람이 생각나는 풍광이로구나.”
연적하가 그 말을 받았다.
“진 소저요?”
“험, 좋은 사람이 어디 진 소저 하나뿐이겠느냐.”
“다른 사람이 또 있어요? 형님?”
“설 소협도 있고, 유 소협도 있지.”
“아하.”
연적하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설차수, 유근식.
모두가 십두마병을 잡으러 다닐 때 함께했던 구정의맹 정주 지부 사람들이다. 부끄러워서 대충 둘러대는 모양인데 속이 뻔히 보였다.
월아와 금아는 남궁연의 좌우에 앉아 재잘재잘 떠들어 댔고, 구천노도 심통과 삼보절명 당운망은 묵묵히 창밖을 응시하며 차를 마셨다.
돌연 심통이 남궁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가모님. 남직례성에서 산서성까지 오는 동안 말입니다. 정사파를 막론하고 무림인들을 별로 못 본 것 같은데, 저의 착각일까요?”
곰곰 생각하던 남궁연이 답했다.
“착각은 아니에요. 확실히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림인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네요. 나도 심 노인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거예요.”
“흐흐, 한편으로 조용해서 좋기는 한데. 좀 느낌이 싸해서 말입니다.”
“아마도 세력의 균형이 어느 정도 맞아서 그런 걸 거예요.”
뜻밖의 말에 심통은 물론 연적하와 남궁천, 당운망까지도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유명교 천하로 알려져 있는데 세력의 균형이 맞다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당운망이 물었다.
“가모님,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천하가 유명교 손에 떨어졌는데, 균형이 맞다니요? 송구한데 어떻게 그런 해석이 가능한 겁니까?”
모두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당운망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던 심통까지도 이 순간만큼은 그의 편이었다.
“유명교가 천하를 제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명왕교와 분열되면서 위축됐어요. 교주가 세를 키우지 않아 지금의 유명교는 천지맹 시절의 절반에 불과하지요. 갈라져 나간 명왕교는 존립 자체가 불투명할 정도고, 호천맹 역시 유명무실한 상황이죠. 지금의 강호 정세는 모두가 약세로 균형이 잡혀 있다고 봐야 해요. 유명교는 세를 확장할 의지가 없고, 명왕교와 호천맹은 그럴 형편이 못 되죠. 거기다 상방 간의 다툼도 조정 국면에 들어섰으니, 천하가 잠잠할 수밖에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당운망이 심통에게 한마디 했다.
“그래서 잠잠하다는데 뭐가 싸하다는 게냐? 그런 새가슴으로 용케 살아남았구나.”
하지만 이어지는 남궁연의 말에 당운망은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그런 걸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조용한 건 사실이에요. 어쩌면 태풍 전의 고요 같은 것일지도…….”
그러자 심통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당운망에게 콧방귀를 뀌었다.
“흥! 이제 알겠느냐? 입을 처닫고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하지 않았더냐. 쥐뿔도 모르는 늙은이가 왜 그렇게 나대, 나대길.”
당운망은 반박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기만 했다.
“왜? 뭐?”
심통이 턱을 치켜세우며 계속 몰아세우자 남궁천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하하! 강호가 잠잠하면 잠잠한 대로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 아닙니까? 덕분에 아무런 시비도 없이 산서성까지 왔으니까요. 그나저나 내일이면 교구현인데 계획을 좀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명교에서 ‘단체로 잘 왔다’고 환영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러게요. 다 같이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내 말이. 유명교에서 너만 풍지산으로 올라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 말에 연적하는 남궁연을 보았다.
유명교주가 원하는 사람은 자신인지라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늘에 맡겨야죠. 풍지산에서 유명교주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으니까요.”
남궁연은 자신의 바람과 어긋난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유명교주 이야기가 나오자 심통과 당운망도 신경전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창문 밖으로 어둠이 내려 앉았다.
점소이가 손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벽에 걸린 유등의 불을 밝혔다.
문득 남궁연은 생각했다.
짙은 어둠을 밀어내기에 유등의 빛이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고.
***
교구현.
풍지산 선녀암.
신당(神堂).
술시 정(오후 8시) 무렵.
마음이 심란해지자 팔황신모는 ‘태상정일강림신주(太上正一降臨神呪)’를 암송했다.
한 식경(30분)쯤 주문을 외웠을까?
전신에 진기와 다른 미지의 힘이 차오르며 상체가 끄덕끄덕 흔들렸다.
신들이 육체에 강림하는 현상이었다.
평소와 다른 강렬함을 보니 기다리던 신이 찾아오려는 모양이다.
팔황신모는 전심전력으로 주문을 외웠다.
한순간 뜨거운 쇳물을 백회혈에 쏟아붓는 것 같은 느낌이 찾아왔다.
곧이어 그녀는 그토록 앙망하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신’과의 소통에 성공할 수 있었다.
“네 바람이 천계 삼십육천을 넘어 마침내 나에게 닿았다. 너를 위한 제물이 준비되었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맞이하도록 해라.”
‘너를 위한 제물이 준비됐다’는 소리에 팔황신모의 안색이 밝아졌다.
‘아아!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의 강림에 필요한 제물이 따로 있었구나.’
하지만 그 제물을 자신이 알아볼 수 있을까?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실패를 거듭했는데?
내심 걱정이 된 팔황신모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족한 제가 당신께서 예비하신 제물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침묵이 신당을 휘감았다.
그러나 팔황신모는 알 수 있었다.
아직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은 자신의 몸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자신의 입을 통해 신이 답했다.
“보는 순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전신에 충만하던 기운이 아침 안개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이 떠나간 것이다.
뒤늦게 밀려오는 기이한 상실감에 팔황신모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한 팔황신모가 말했다.
“누가 있느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신당 앞에 팔황의 수좌인 태백 선인이 나타났다.
“예.”
“아직도 풍지산에 오르려는 자가 있느냐?”
“아닙니다. 팔문팔상진을 두려워해 감히 입산하는 자가 없습니다.”
“연적하는 어디에 있고?”
“지금은 인근 습현의 서풍객점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풍지산을 오르겠구나.”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새지만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일행이 모두 몇이라고?”
“모두 석경장의 사람들로 일곱입니다.”
“적지 않은 숫자로구나.”
“풍지산 초입의 ‘염왕각(閻王閣)’에서 일차로 거를 수 있습니다. 연적하의 입산만 허락하도록 할까요?”
“굳이 그럴 것 없다. 찾아온 손님을 내치는 법도도 있더냐.”
뜻밖의 말에 태백 선인이 팔황신모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걸 보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하오시면 모두 올려보내란 말씀이신지요?”
“그래, 그가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대비하는 것도 좋겠지. 내일은 풍지산의 백두마군과 십두마병을 모두 신당 주변에 배치하도록 해라.”
“모두를요?”
태백 선인은 계속된 교주의 지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고작 연적하 하나가 방문하는데 유명교 전력을 모두 동원하라니?
‘연적하가 그렇게 대단한 상대는 아닐진대…….’
미심쩍은 얼굴로 되묻는 태백 선인에게 팔황신모가 말했다.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는구나. 내가 그 이유를 너에게 설명해야 하느냐?”
차갑다 못해 살기마저 느껴지는 말에 태백 선인은 흠칫 놀랐다.
신당 옆에 석상처럼 서 있던 흑기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 삼두견의 입에서도 침 대신 불꽃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살기가 착각이 아니라는 소리다.
“아, 아닙니다. 교주님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태백 선인은 허리를 조아려 복종을 표시한 후에 조용히 사라졌다.
***
다음 날.
연적하 일행의 마차는 마침내 교구현에 접어들었다.
유명교 성지가 있어서 그런지 교구현은 다른 곳과 달리 무림인들로 바글거렸다.
유명교에 적을 둔 사파 무림인이거나, 유명교와 거래하는 상방의 호위무사들이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던 월아가 금아에게 속삭였다.
“사매, 교구현에는 무림인들이 많은 것 같아.”
“죄다 유명교도들일 거예요.”
겁을 먹었는지 월아와 금아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고작 일곱 명으로 유명교의 성지에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녀들을 향해 연적하가 말했다.
“막상 오니까 괜히 따라왔다 싶지?”
“아,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월아와 금아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위험한 곳일수록 모두가 함께 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반점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연적하 일행은 풍지산으로 출발했다.
연적하 일행의 마차가 풍지산에 도착한 것은 유시 초(오후 5시)였다.
어디선가 유명교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마차를 한쪽으로 유도했다.
세 기의 인마와 마차가 멈춰 선 곳은 ‘염왕각’ 앞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연적하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심 노인, 이 전각이 전에도 있었나?”
“아닙니다. 단청 색깔이 진하고 깨끗한 걸 보니 새로 지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풍지산이 성지라고 신경을 좀 썼나 본데? 우리 석경장도 단청을 좀 신경 써야겠어.”
마치 나들이라도 나온 듯한 연적하의 모습에 당운망은 내심 감탄했다.
유명교 성지인 풍지산에서 저런 여유를 보일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연적하와 심통이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 염왕각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침부터 연적하가 오기를 기다리던 육통존자와 십두마병들이었다.
육통존자는 인사를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 장주, 교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따라오시오.”
제 할 말만 하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육통존자를 향해 연적하가 소리 쳤다.
“어이, 아저씨! 우리 일행은? 함께 가도 되는 거야?”
서너 걸음 앞서가던 육통존자가 멈칫하더니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호천맹의 사람들은 ‘죽음의 산’이라며 성지를 피하는데, 그 의리가 참으로 가상하구려. 교주님의 허락이 있었으니 그렇게 하시오.”
순간 연적하는 눈을 찡그렸다.
교주의 허락이 있었다고?
그가 아는 한 팔황신모는 결코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자신은 교주의 제자인 팔황들을 상하게 한 사람이었다.
‘호의’가 아니라 ‘적의’를 품어야 마땅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남궁연을 보았다.
그녀라면 이 돌발적인 상황에 맞는 답을 내려 줄 수 있으리라.
“누님, 좀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 쪽 편의를 봐줄 이유가 없는데 왜 허락했을까요? 내가 팔황 중에 셋이나 폐인으로 만들었는데.”
“걱정하지 마. 나도 준비해 둔 수가 있으니까.”
남궁연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만일을 대비해 고서를 필사(筆寫)해서 다른 이름으로 상방에 위탁해 놨다. 따로 취소하지 않는다면, 고서는 천하에 뿌려질 터였다.
물론 연적하가 모르게 진행한 일이다.
교주의 언령에 그가 말려들어 또다시 피해 보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유명교주의 독점욕을 이용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연적하 일행은 육통존자의 뒤를 따라갔다.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형국이지만, 애석하게도 그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