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499
499회. 운명과 욕망
산서성.
교구현.
임정객점(林亭客店).
임정객점은 ‘숲속 정자’라는 이름과 달리 번화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다.
늦은 밤, 임정 객점에 여섯 명의 무림인이 찾아왔다.
막 잠들었다가 튀어나온 주인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손님들을 힐끔거렸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피로 물든 옷.
방금 혈전을 치르고 온 살벌한 모습에 주인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꿀꺽, 소, 손님들, 소인이 방을 준비할 동안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구천노도 심통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은 부리나케 이 층으로 내달렸다.
주인이 사라지자 여섯 명은 불 꺼진 식당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답답한 적막을 깬 사람은 연적하였다.
“모두 내일 새벽에 떠나도록 하세요.”
떠나라는 말에 심통이 물었다.
“공자님은요?”
“그야 당연히 누님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봐야지. 그냥 갈 수는 없잖아.”
“어떻게 알아본다는 거냐?”
청운검 남궁천의 물음에 연적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유명교주에게 물어보려고요.”
“그 마녀가 가르쳐 줄까? 아까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가르쳐 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든요.”
단호한 연적하의 말에 남궁천은 할 말을 잃었다.
하나 마나 한 짓 같았지만 다른 수가 없으니 반대하기도 뭐했다.
“그렇다면 나도 남아서 도우마.”
“아니요. 저만 남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야 해요.”
“연이와 너를 남겨 두고 가라고?”
“예, 형님. 솔직히 유명교주와 금사에게서 지켜 줄 자신이 없어요. 상대가 누구든 저는 살아남을 자신이 있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할 거예요. 누님이 평생 자책하며 살게 만들 수는 없어요.”
연적하는 당연히 남궁연을 구해 낼 것처럼 말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지만 남궁천은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그의 바람도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연적하를 응시하던 남궁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알겠다. 이런 상황에서 너의 짐이 될 수는 없지.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께 고하고 방법을 찾아보마. 너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예, 형님.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적하는 힘든 결정을 내린 남궁천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안일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남궁천의 결단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절세 고수이자 혈육인 남궁천마저 포기한 일에 고집을 부릴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 새벽.
남궁천과 석경장 사람들은 동이 트기도 전에 조용히 객점을 떠났다.
연적하는 남궁천과 석경장 사람들을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와 한숨 더 잤다.
앞으로 긴 싸움이 될 터이니 체력이라도 보충할 생각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자 다시 일어난 그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텅 비어 있어야 할 식당에 한 사람이 퍼질러 앉아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쩝쩝, 이제 일어나셨습니까?”
거대한 뼈다귀를 손에 들고 물어뜯던 심통이 실실 웃으며 알은체를 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연적하가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왜 안 갔어?”
“흐흐, 잔심부름할 사람은 있어야지요.”
“딱 잔심부름만 해. 욕심부리지 말고.”
연적하는 심통의 잔류를 허락했다.
가란다고 갈 사람이 아닌지라 그냥 곁에 남겨 두기로 한 것이다.
“제 무위를 인정하시는 겁니까?”
“아니.”
“아니라고요?”
“심 노인은 살 만큼 살았잖아. 언제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라서 쫓지 않은 거야.”
“공자님, 목숨에 대한 애착은 늙을수록 더하다는 거 모르십니까?”
“구천기를 대성하고 싶으면 내려놔. 그런 걸 ‘일석이조’라고 하는 거야. 죽어도 아쉽지 않고, 구천기의 연성에도 도움이 되고.”
“‘일석이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죽어도 아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제가 얻는 건 없지 않습니까. 뭔가 저에게 이익이 돼야 ‘일석이조’지요.”
“그럼 ‘금상첨화’인가?”
평소처럼 농담을 했지만 연적하의 눈빛은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왠지 시들해진 심통은 물어뜯던 뼈다귀를 내려놓고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그러다 불현듯 뭔가 생각난 얼굴로 말했다.
“참, 유명교주 말입니다.”
“어, 왜?”
“어제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제가 볼 때 유명교주는 말을 해 주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금사라는 사람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더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그렇게 보였어?”
“예, 유명교주는 공자님에게 그다지 적대적인 것 같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가 몸 성히 하산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십두마병들을 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사람이 왜 누님을 납치해?”
“그걸 알아보셔야지요. 유명교주와 같은 노괴는 살살 어르고 달래야 합니다. 유명교주를 잡아서 고문을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 마녀를 달래라고?”
“때려죽이고 싶어도 일단 비위를 맞춰 주면서 원하는 걸 얻어 내십시오. 유명교주의 입에 가모님의 안위가 달려 있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그렇네. 젠장.”
연적하가 기막힌 얼굴로 투덜거렸다.
십두마병들을 죽여 팔황신모를 괴롭혀 볼까 했는데 그건 보류해야 할 것 같다.
***
교구현.
풍지산.
선녀암.
정오 무렵.
마음이 심란해진 팔황신모는 금사를 신당에 남겨 두고 밖으로 나갔다.
금사는 팔황신모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팔황신모가 원치 않은 것도 있지만, 금사에게도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산책하듯 산길을 한참 걸어 내려가던 팔황신모가 나직이 말했다.
“태백 선인 있느냐?”
“예, 교주님.”
대답과 함께 태백 선인이 길 앞쪽에 모습을 드러냈다.
“연적하와 그의 일행은 어떻게 되었느냐?”
“연적하와 심통은 교구현에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교구현을 떠났습니다.”
“연적하가 교구현에 남았다고?”
“그렇습니다. 보란 듯이 임정객점의 별채를 전세 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목에 가시 같은 놈이로군.”
“교구현에서 떠나라고 할까요?”
“연적하가 떠나란다고 순순히 떠날 놈이냐? 괜히 일을 키울 것 없다.”
태백 선인은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지만 현재 유명교에는 연적하를 제압할 만한 고수가 없다.
그렇다고 교주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
설사 교주가 친히 쫓아낸다 해도 다시 돌아오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간다.
‘허! 미꾸라지 한 마리가 교구현에 돌아다니는 걸 막을 방법이 없으니…….’
탄식하고 있는 태백 선인의 귓가로 팔황신모의 음성이 들려왔다.
“별채에서 그를 만날 터이니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막아라.”
“예!”
태백 선인은 슬쩍 팔황신모의 안색을 살폈다.
대답은 했지만 연적하를 만나겠다는 교주의 말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의 처를 제물로 바치고 무슨 나눌 말이 있다고?
교주와 연적하 사이에 정상적인 대화가 가당키나 한 것일까?
***
교구현.
임정객점.
미시 초(오후 1시) 무렵, 갑자기 팔황들이 들이닥쳤다.
뒤이어 본에 숙박하던 사람들은 물론, 식당에 있던 일반 손님들까지 모두 쫓겨났다.
심지어 팔황들은 임정객점의 일꾼들까지 밖으로 내보냈다.
인기척이 끊긴 객점 마당 위로 한 중년 여자가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팔황신모였다.
그녀는 주변을 쓱 둘러본 후에 별채를 향해 사뿐사뿐 걸어갔다.
별채.
마루에서 심통과 함께 ‘팔황신모를 상대할 비책’을 논의하던 연적하가 고개를 돌렸다.
신당에 있어야 할 팔황신모가 월동문을 지나 별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연적하는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싶어 멍하니 보기만 했다.
팔황신모를 만날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데, 직접 찾아오다니?
화들짝 놀란 심통이 마당으로 뛰어 내려갔다.
“교주님이 왜? 아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연적하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 주었으면 한다.”
“예? 예, 예.”
심통은 과장된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연적하가 그토록 바라던 팔황신모와의 독대인지라 군말은 필요 없었다.
심통이 안채 방향으로 사라지자 팔황신모가 연적하를 향해 말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너와 싸우러 온 게 아니다.”
“내 처를 납치해 간 사람의 말을 믿으라고……요?”
뒤늦게 심통의 당부를 떠올린 연적하가 말을 높였다.
어쨌든 아직은 남궁연의 생사가 팔황신모의 입에 달린 까닭이다.
느긋하게 마루로 올라선 팔황신모가 연적하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다. 적월에게 어디까지 들었느냐?”
갑자기 적월의 이름이 나오자 연적하는 머뭇거렸다.
팔황신모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워서다.
“듣다뇨? 뭘요?”
연적하가 발뺌하려 했지만 팔황신모는 틈을 주지 않았다.
“적월이 어떤 사람인지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는 너에게 분명히 말했을 게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했다는 거예요?”
“그와 나의 과거.”
“과거요? 둘이 사귀기라도 했어요?”
연적하의 허튼소리에 팔황신모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십전무후에게 일어난 일은 적월과 나의 과거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네가 모른다고 하니 나도 더는 해 줄 말이 없구나.”
“헛소리하지 마요! 당신들의 과거사에 왜 연 누님을 끌어들이는 건데!”
“네가 모르는 이야기라면 굳이 내 입으로 거론하고 싶지 않다. 그럴 내용도 아니고.”
“…….”
연적하는 이를 악물고 팔황신모를 노려보았다.
만약 남궁연이었다면 팔황신모의 저의를 꿰뚫어 보고 적절하게 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은 그럴 수가 없다.
“적월이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요?”
팔황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하던 연적하는 둑이 터진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당신이 태일관의 동문이라고 했어요. 당신과 함께 사문을 몰살시켰다고 하더군요. 그는 당신에게 이용당해 벌인 짓들을 후회했어요. 그게 다예요.”
묵묵히 듣고 있던 팔황신모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반만 맞다. 그를 이용한 것은 내가 아니다. 그와 내가 한 일은 모두 신의 뜻이었다.”
“무슨 그런 개 같은 신이 다 있대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서 신을 핑계 대는 건 아니고요?”
“후후, 차라리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그런 욕을 먹었으면 좋겠다.”
“그래서요. 그것과 당신이 연 누님을 납치한 게 무슨 상관인데요?”
“태일관의 몰살은 내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언(神言)에 따른 것이었다.”
“사설이 기네요.”
연적하의 비난에 팔황신모는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
자신도 왜 이렇게까지 변명을 늘어 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운명의 끌림일까?
아니 어쩌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너희가 입산하기 전날 밤, 그 신언이 남궁연을 원했다. 따르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신언을 거부할 수 없었다. 신언이야말로 나의 운명이었으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예요? 여기서 당신의 그 미친 신이 왜 나오는데?”
‘울컥’한 연적하가 탁자를 후려쳤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육중한 탁자가 맥없이 풀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