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0
50회. 약육강식(弱肉强食)
한참 이철산과 속닥거리던 한채연이 갑자기 첫째인 풍연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다 치고, 큰 오라버니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오봉산에 계속 남을 건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채주라는 책임감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풍연초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쩝, 나도 내 한 몸 건사할 수준이 되면 개봉에 한번 가 볼까 한다.”
그는 십 년 전에 두고 온 가족들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둘째도 나를 따라가겠다니 나중에 산채는 셋째와 넷째가 맡아야 할 게다.”
셋째 마형도와 넷째 허임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채연이 둘째인 탁고명에게 물었다.
“큰 오라버니와 함께 간다고요?”
“어. 큰형님하고 오래 지낸 정이 있어서. 사실 난 고아 출신이라 달리 가 볼 곳도 없고.”
“그러시구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오봉십걸들은 먹먹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함께 있지만 언젠가 뿔뿔이 흩어질 걸 생각하니 착잡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 사람 일이 계획대로 되던가.
오봉십걸들의 미래가 그들의 바람대로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
하남성 여주.
여하 강변에 있는 은하장의 지하.
오십 대 남자가 한 손에는 팔주령, 다른 손에는 잘 벼른 장도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앞에 오십 대 승려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빳빳한 상체와 달리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면 혈도를 제압당한 모양이다.
“……초도삼계난 지옥오고해 두은병영마군 옴옴급급여율령 사바하(超度三界難 地獄五苦解 頭隱屏營魔君 唵唵隱隱如律令 娑婆訶).”
길고 긴 주문을 다 외운 남자가 장도를 휘둘렀다.
순간 승려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됐다.
잘린 목에서 피가 꿀렁꿀렁 솟아나 자지하는 혈향으로 가득 찼다.
목의 단면에서 흘러나온 붉은 안개가 팔주령을 거쳐 남자의 백회로 흘러 들어갔다.
남자는 눈을 감고 황홀한 얼굴로 상체를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붉은 안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가 눈을 떴다.
시퍼런 안광이 번갯불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어둠 속에 조아리고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백두마군이 되심을 경하드립니다.”
***
하남성 숭산 소림사.
소림사의 장문인 현백 대사가 곤혹스러운 눈으로 집법 장로 공백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사제지만 단 한 번도 개인적은 일을 입에 올린 적이 없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방장실로 직접 찾아와 부탁을 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그러니까 공백 사제의 형님에게 변고가 생긴 것 같은데, 조사를 했으면 한다고?”
“예.”
“대체 무슨 일이기에 사제가 그렇게까지 말하는지 궁금하구먼.”
“이십여 년 전의 사건과 유사한 것 같아서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순간 현백 대사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다.
“설마 유명교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흐음! 사제의 판단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워낙 중요한 문제라 그러니 자세히 말해 보시게.”
“제게는 위로 한 분의 형님이 계신데 저보다 먼저 출가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여주의 보광사에 계셨는데 얼마 전 실종됐습니다.”
“단순히 형님이 사라진 것만으로 그러는 것은 아닐 테지?”
“며칠 전 제게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다’고, ‘느낌이 좋지 않으니 한 번 만나자’는 서찰을 보내셨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방문하기 전에 그만…….”
“원한을 살 만한 일은?”
“출가한 지 삼십 년이 넘은 분이십니다. 그전에도 원한과는 거리가 멀었고요.”
“왜 유명교를 의심하는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현백 대사가 공백 대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평범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걸 유명교와 연관 짓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남성에서 실종된 도사와 승려의 숫자가 벌써 삼백이 넘어갑니다. 최근에는 그런 일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고요. 이십오 년 전에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습니까? 유명교도들은 은밀하게 일을 벌이다가, 어느 순간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사람을 납치해 갔습니다. 마성에 물들어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런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숨어 있던 유명교도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말인가?”
“아니면 목표를 눈앞에 두고 조바심을 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목표라. 그들의 목표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아내기도 전에 어둠 속으로 숨어 버렸으니까요.”
“그렇다면 차라리 정의맹에 조사를 의뢰하는 게 낫지 않겠나?”
“아직은 저의 생각뿐이라서요.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온다면 그때 정의맹에 연락을 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렇게 하도록 하시게. 누굴 데리고 움직일 생각인가?”
“집법당의 제자가 편하지만 집법당의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장문인께 온 것입니다. 나한들 중에서 몇을 데리고 갔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마침 새로 선발된 나한들이 있으니 그들을 쓰도록 하게. 그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걸세.”
“아, 다섯 명의 나한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그들은 강호의 경험이 없으니 무리는 하지 말게. 형님의 일이 정말 유명교와 관계되었다면 그들만으로는 중과부적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형님에 대해서는 너무 속단하지 말게. 형님께서 다른 일로 출타 중이실 수도 있으니 말일세. 아무쪼록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네.”
“예.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세상과는 무관하신 분이시라…….”
공백은 진심으로 형님이 다른 일로 보광사에서 떠난 것이기를 바랐다.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
하남성 개봉.
백세상방.
방주 이세창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오랜만에 찾아온 백미주를 맞이했다.
“백 부인,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날도 추운데 이곳까지는 어인 행차이십니까? 저야 백 부인을 만나서 좋지만요.”
이세창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지만 그녀가 왜 상방을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청룡대와 백룡대 무사들의 월봉은 석 냥으로 업계 최고 대우에 가까웠다. 게다가 한겨울이라 상단을 더 꾸릴 상황도 아니다.
쪼들리던 전과 달리 살림이 핀 백미주가 여유 있게 인사를 받았다.
“개봉에 나왔다가 방주님 생각이 나서 차나 한잔 얻어 마시려고 들렀어요. 괜히 바쁘신데 방해가 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허허, 방해라니요. 백 부인은 우리 백세상방의 든든한 동업자 아니십니까?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차나 한잔 먹으러 왔다’던 말과 달리 백미주는 자리에 앉자마자 무거운 이야기를 꺼냈다.
“방주님께서 동업자라고 하시니 말씀드리기가 쉽네요. 우리 와룡장을 좀 더 동업자로 대우해 주셨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 슬슬 백세상방에서 운영하고 계시는 삼화객점과 사해주루, 백양루 등의 관리를 와룡장에서 맡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요.”
“그건 창해무관에서…….”
“어머, 상방에 손해를 끼쳤는데 왜 아직도 그들과 거래를 하시는 거예요?”
“그야 그렇지만 창해무관에서 전부터 해 오던 일이라. 게다가 우리가 거래를 끊으면 당장 창해무관은 경영에 어려움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우리 와룡장의 형편도 그다지 좋은 건 아니에요. 저는 와룡장을 무림 세가로 키우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방주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조금 더 확실하게 밀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흠! 무림 세가라…….”
이세창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와룡장이 자꾸 제자를 받아들이는 걸 보면서 짐작은 했지만 막상 들으니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무관도 아닌 상방에서 딴지를 걸 생각은 없다. 와룡장의 힘이 커지는 건 백세상방에도 좋은 일이니까.
‘쩝, 창해무관의 마지막 돈줄을 끊는다는 게 조금 미안한데…….’
하지만 앞으로 와룡장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고민할 일도 아니다.
“알겠소이다. 힘닿는 데까지 도와 드리리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이세창은 와룡장에 잡다한 사업체의 관리를 맡기고 다른 걸 얻어낼 생각이었다.
“대신이라고 하면 뭐하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뭔가요?”
“나와 대행수의 호위를 와룡장에서 책임져 주셨으면 하오. 이번 일로 창해무관이 불만을 품고 해코지를 하려 할 수도 있으니.”
물론 창해무관은 핑계일 뿐이다. 그는 와룡장의 힘을 등에 업고 조금 강하게 사업체를 확장할 생각이었다. 그 일을 진행하는 데 와룡장의 호위는 필수였다. 다른 상방들의 뒤에도 무관이 있을 테니까.
“알겠어요.”
백미주는 흔쾌히 승낙했다.
어차피 무림 세가로 발돋움하려면 무관들과 경쟁해야 한다. 이 기회에 와룡장의 무력을 개봉의 무가들에게 확실히 인식시켜 줄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무림 세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리라.
그렇게 백미주의 야망과 이세창의 욕심이 손을 잡았다. 와룡장이 약하거나 백세상방에 돈이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조합이다.
이 두 사람이 촉발한 약육강식의 패권 다툼은 훗날 십대상방이라는 거대한 집단을 탄생시킨다.
***
오봉산.
오봉산채.
봄이 되자 연적하는 오봉십걸들에게 삼 식을 전수했다.
일 식과 이 식만으로도 고수에 근접했던 오봉십걸들은 삼 식까지 배우자 날개를 단 호랑이처럼 변해 갔다.
이제는 이 식을 펼칠 때도 제법 강맹한 검풍이 쏟아져 나왔다.
연적하에 비하면 산들바람 수준이지만, 그래도 검풍의 경지는 오봉십걸들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검풍이란 결국 기의 발현으로 그 끝에는 검강이 있다. 즉 상승의 무도로 가는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요즘 오봉산채 도적들은 채주인 풍연초에게 한 초식 얻어 배우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다. 그들은 대놓고 가르쳐 달라지는 못했지만 틈만 나면 풍연초에게 조언을 구했다.
풍연초는 그럴 때마다 거절하지 않고 자신의 심득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풍연초가 산행을 가지 않아도 도적들은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풍연초의 눈에 들기 위해 전전긍긍할 정도였다.
잠깐 바람을 쐬러 나왔던 심양각이 멈춰 섰다.
오늘도 앞마당에서 도적들과 풍연초가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쯧!’
배가 아픈 건지, 질투인지 자신도 잘 모를 감정이 솟구쳤다.
무학에 있어서는 빠른 속도보다 바른길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공으로 빠르게 고수가 된다 해도 결국 정공에 무릎을 꿇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오봉십걸은 바른길로 가면서도 그 속도가 마공 못지않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 비결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지만 애써 외면했다. 성급 고수인 자신이 현급 고수인 풍연초에게 가르침을 청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심양각이 볼 때 오봉십걸의 무위는 이미 독심낭인 황요명에 근접해 있었다. 벌써 현급 고수라는 소리다. 본격적으로 내외공을 익힌 지 일 년 만에 현급 고수의 경지라니? 곁에서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황요명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지 더 이상 오봉십걸을 비하하지 않았다. 사실 황요명의 말을 받아 줄 사람도 없었다.
‘쳇! 얄팍한 새끼들…….’
심양각은 풍연초에게 꼬리를 흔들어 대는 도적들이 보기 싫어 산을 올라갔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오봉산 제일봉 꼭대기다.
멀리 연적하의 뒷모습이 보이자 심양각은 ‘아차’ 싶었다.
오봉산 제일봉이 금지 아닌 금지가 된 지 오래인데 깜빡했던 것이다.
황급히 돌아서는 심양각의 귓가로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인장, 나한테 볼일이라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