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08
508회. 새 하늘과 새 땅
천자마의 말은 사실상 협박에 가까웠다.
현세에서의 소멸을 각오하고 팔황신모를 죽여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팔황신모는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 신격과의 관계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마치 수렁에 발을 디딘 기분이다.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라니?
그렇다고 그 문제를 두고 이제 와서 논쟁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청류신의 수작일까?’
정작 불로불사의 길은 요원한데 신들이 앞다퉈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타려 한다.
팔황신모는 방울에 갇힌 청류신이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자신이 그녀를 염매로 만든 것에 대한 복수인지도 모른다.
‘아니야. 한낱 염매에게 감정이 있을 리가 없지.’
그랬다면 염매를 이용한 술법은 세상에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게다.
술사는 염매의 원수니까.
팔황신모는 머리를 흔들어 청류신에 대한 의심을 떨쳐 버렸다.
신들에게 염매는 먼지만도 못한 잡귀다.
저 고고한 금사와 천마자가 염매와 얽힐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저의 소원은 ‘왕들의 하늘’에 가는 것입니다. 천자마님과 금사님을 주인으로 섬기면 갈 수 있게 해 주실 건가요?”
팔황신모의 말에 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은 이미 알려 주지 않았더냐? 십만을 참수하여 업의 무게를 늘리라고.”
“그랬지요. 정말 그리하면 되겠습니까?”
팔황신모가 천자마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과거 천자마가 자신의 제사를 받아 주지 않은 게 떠올라서다.
천자마는 동문서답을 했다.
“신은 인간과 흥정하지 않는다. 금사는 아직 격이 부족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만. 종의 본분은 묵묵히 주인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 충성의 보답은 전적으로 신의 몫. 그 역시 종의 바람과는 무관하다.”
“…….”
팔황신모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왕인 천자마는 확실히 군주인 금사와 달랐다.
금사가 자신을 위하는 척이라도 했다면, 천자마는 아예 눈도 주지 않았다.
천자마는 정말로 유명교주인 자신을 미천한 ‘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격의 일부가 온 현세에서도 저럴진대 ‘왕들의 하늘’에서는 어떨지 눈에 훤했다.
“금사님이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셨으니, 금사님의 보증을 믿어야겠지요.”
팔황신모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금사를 보았다.
‘왕들의 하늘’로 가는 길이 막히면 신살자(神殺者)가 될 것이다.
***
이월.
남직례성 합비.
여강현 석경장.
날이 밝기 전 새벽 미명.
사십여 명의 무인들이 석경장의 대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당가 가주 암영무흔 당세호와 당가의 고수들이다.
당세호가 당가 고수들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남천과 십전무후는 절세의 고수라 싸움이 길어져서는 안 된다. 석경장 전체에 독을 풀고, 빠르게 진입하여 속전속결로 끝낸다. 저들의 뒤에 녹림과 남궁세가가 있으니 가급적 살수는 자제해라.”
당가의 고수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세호가 손을 흔들었다.
빠르게 흩어진 당가 고수들이 석경장 주변을 에워쌌다.
이윽고 그들은 준비한 독을 석경장에 살포했다.
그리고 일각(15분)쯤 지났을까?
당세호가 석경장의 대문을 발로 힘차게 내지르며 소리쳤다.
“당세호가 빚을 받으러 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박살 났지만 안채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당세호는 당가 고수들을 이끌고 빠르게 안으로 진입했다.
대문 부서지는 소란에 일꾼들이 고개를 내밀었다가 황급히 방문을 닫아 걸었다.
당세호와 당가 고수들은 그대로 안채까지 밀고 들어갔다.
안채 앞마당에 우뚝 선 당세호는 범 같은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유명교 팔황을 물리쳤다기에 바짝 긴장했는데 안채까지 아무런 제지가 없다?
‘함정인가?’
당세호가 긴장한 눈으로 안채를 쏘아볼 때다.
별채에서 당가의 무인들이 두 소녀를 끌고 나왔다.
중독되어 변변한 저항도 못 하고 잡혀 온 소녀들은 월아와 금아였다.
월아가 당세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봐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러는 거예요? 여긴 석경장이라고요. 석경장. 우리 스승님이 오시면 당신들은 경을 칠 거예요.”
“여기가 석경장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석경장이라서 왔으니까. 계집애야, 너의 스승은 남천이냐? 아니면 십전무후냐?”
“스승님은 구천노도예요! 우리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가는 온전하지 못할 거예요!”
“흥! 구천노도? 도법의 달인이라지?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당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후후! 나는 당가의 가주인 암영무은 당세호다. 너희가 석경장의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이미 한 줌 핏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별채 뒤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삼보절명 당운망이었다.
“당 가주! 당신이 노리는 건 내가 아니오? 죄 없는 아이들은 그만 풀어 주고 나와 이야기합시다.”
그러자 당세호가 냉소를 날렸다.
“흥! 시건방진 놈.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한다. 석경장이 당가를 능멸했으니 석경장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이다.”
“석경장이 당가에 무슨 죄를 지었소? 괜히 죄 없는 석경장을 끌어들이지 마시오.”
당운망은 월아와 금아만이라도 풀어 주고 싶었다.
두 아이가 자신과 당세호의 묵은 원한에 휘말린다면 연적하를 볼 낯이 없어서다.
당세호는 대꾸하지 않고 안채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소란에도 안채에서 사람이 나오지 않다니? 남천과 십전무후는 어디에 있느냐!”
당운망이 인상을 찡그렸다.
안채에 연적하와 남궁연이 없음을 알고 더 큰소리를 치는 것 같아서다.
뜸을 들이던 당세호가 내각 장로 당기로에게 눈짓했다.
당기로가 당가 무인들을 이끌고 안채의 마루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 모습에 놀란 당운망이 버럭 소리쳤다.
“당세호! 여기는 남천 대협과 십전무후 여협의 자택이다! 예를 지켜라!”
그러자 당세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예의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먼저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건 그들이다. 왜 당가가 후안무치한 자들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냐?”
당운망은 당세호가 작정을 하고 왔다는 걸 알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연적하와 십전무후가 있다면 모를까?
자신이 홀로 당가의 손에서 월아와 금아를 지킬 수는 없었다.
당기로와 당가의 무인들이 안채의 문을 열어젖혔다.
주인 없는 방이 속을 드러냈다.
당운망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세호. 당신은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게요.”
“후회? 내 걱정보다 당장 네놈 목숨 걱정이나 해라. 당가의 가법(家法)이 엄함을 잊었느냐?”
“하아! 나는 마음대로 해도 좋소. 허나 저 아이들은 그만 풀어 주시오.”
“벌서 노망이 들었느냐? 석경장이 죄를 지었으니 죗값을 받아야 한다니까. 강호에서 당가를 건드린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너도 알지 않느냐?”
“당신이야말로 잊은 모양이구려. 연 가주와 남궁 가모가 누군지를. 이 자리에 두 분이 안 계시다고 당신 마음대로 했다가 뒷감당할 자신은 있소?”
당세호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연적하는 녹림의 태상호법이고, 남궁연은 검왕 남궁벽의 딸이다.
만약 녹림과 남궁세가가 이 일을 물고 늘어지면, 당가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당세호는 소녀들을 놓아주지 못했다.
가주인 자신에게 열등감을 안겨 주는 당운망의 말에 따르고 싶지 않아서다.
그의 시선이 호법당 당주 장로 귀혼산수 당자안에게로 향했다.
“당자안.”
“저 아이들은 호법당에 구금(均禁)할 것이다. 당주인 네가 책임지고 호송해라.”
“……예.”
당자안은 잠깐 망설였지만 결국 지시에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반도의 앞에서 가주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당가의 보물을 훔쳐 달아난 당운망은…….”
당세호가 눈엣가시인 당운망을 죽이라고 명하려는 순간, 월아가 소리쳤다.
“이봐요! 당가의 가주라고 했죠! 당 할아버지는 석경장의 식솔이에요! 가모님과 가주님께서 당 할아버지를 식솔로 받아들였거든요! 당 할아버지를 벌줄 수 있는 사람은 가모님과 가주님뿐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
월아의 기세에 당세호는 뜨끔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남천과 십전무후의 사람을 죽였다가는 원수가 될 수도 있었다.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지만 막상 녹림과 남궁세가를 적으로 돌릴 걸 생각하니 마음이 찜찜했다.
정말 당가에 큰 죄를 지었다면 모를까?
개인적인 감정만 앞세우기에 녹림과 남궁세가가 너무 컸다.
‘십전무후라면 당운망이 백팔독정과 무관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밝혀내겠지?’
죽인 뒤에 죄를 뒤집어씌울 수도 있지만, 그런 잔꾀가 통할 사람이 아니다.
고민하던 당세호는 당운망에 대처분의 수준을 한 단계 낮추기로 했다.
“그 역시 죄가 명백하게 밝혀질 때까지 호법당에 가두고 조사하도록 해라.”
고문하라는 소리다.
“예!”
소녀들의 때와 달리 이번에는 당자안의 음성에 힘이 실렸다.
나중의 협상을 위해서라도 죽이지 않고 살리는 편이 나은 까닭이다.
동이 터 올 무렵, 석경장의 일은 일단락됐다.
당세호와 당가 고수들은 당운망과 월아, 금아를 끌고 석경장을 떠났다.
당가가 석경장에 난입해 사람들을 잡아간 일로 남직례성이 발칵 뒤집혔다.
사람들은 곧 남천과 십전무후가 당가에 쳐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석경장의 주인인 연적하와 남궁연은 땅으로 꺼진 것처럼 종적이 묘연했다.
***
왕들의 하늘.
구주(九州) 외곽 천관산맥(天關山脈).
숲속 한가운데의 자그마한 공터에 일진광풍이 몰아쳤다.
휘이이잉-.
주변의 나무가 휘청거리고 돌풍에 휘말린 풀잎이 공터 주위를 세차게 맴돌았다.
휘리리링-.
바람이 잦아들 즈음, 허공에서 사람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허공을 주유하던 풀잎과 나뭇가지들도 덩달아 지면에 내려앉았다.
그는 죽은 것처럼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람의 냄새를 맡았는지 주변에 있던 야생동물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기이했다.
체구가 비정상적으로 큰 것은 물론, 생김새도 예사롭지 않았다.
나무 위에서 금빛 털을 가진 거대한 성성이 하나가 훌쩍 뛰어내렸다.
성성이는 위협적으로 주변의 야수들에게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캬학! 칵!”
야수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성성이와 남자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오만한 표정으로 야수들을 둘러보던 성성이가 손가락으로 엎드려 있는 남자의 어깨를 쿡 찔렀다.
“끄응!”
신음 소리와 함께 남자가 몸을 뒤집었다.
밝은 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풍지산의 역오망성에서 사라진 연적하였다.
사람이 움직이자 성성이가 웃듯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죽은 것보다는 산 것이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뒤틀린 입술 끝으로 한 뼘이 넘는 송곳니가 섬뜩한 모습을 드러냈다.
한 아름은 되어 보이는 성성이의 손이 연적하의 상체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상체에 압박이 전해지자 연적하는 눈을 번쩍 떴다.
시커먼 이무기 입속에 들어가면서 잠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살짝 떨구니 팔뚝만 한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헉! 이게 뭐지?’
무두질한 가죽처럼 번들거리는 시커먼 그것은 아무래도 손가락처럼 보였다.
연적하는 급히 손가락 하나를 움켜잡고 힘을 썼다.
몸에서 떼어 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나 상대의 힘이 센지 손가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