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1
51회. 나를 탓하면 안 돼요
구밀복검 심양각은 심장이 철렁한 느낌에 돌아서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없습니다.”
사파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지라 조상님을 대하듯 존대가 나왔다. 자신도 어려서부터 노인들에게 반말을 했기에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여긴 왜 왔는데?”
“그냥…….”
심양각은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이상하게 요즘 연적하를 보고 있노라면 과거의 자신이 떠오른다. 자신도 저 나이 때 세상의 주인인 듯 안하무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연적하의 미래는 지금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를 것이다. 잔뜩 목에 힘주며 살아온 삶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노인장은 왜 살아?”
갑작스러운 연적하의 물음에 심양각은 심술궂게 답했다.
“흐흐, 빼앗고, 때리고, 죽이는 재미로 삽니다. 녹림은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마두 소리를 듣는 거야.”
“녹림도를 호걸이라고 하는 놈들은 다 위선자입니다.”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왠지 심양각은 ‘사람들이 앞에서 욕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그쪽도 내 앞에서 나를 욕하지 않잖아.”
“그건…….”
심양각은 아니라고 반박하려다가 구차한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딱히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문득 연적하는 심양각이 왜 산채에 남았는지 궁금해졌다.
함께 어울리던 사람들이 적풍채로 간 뒤 그는 항상 혼자 다녔다. 그렇다고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것 같지도 않다. 그랬다면 그의 주위에 사람이 들끓었을 것이다.
“당신은 왜 적풍채로 가지 않았지?”
“가 봤자 찬밥이니까요. 지금쯤 옮겨 간 놈들은 땅을 칠 겁니다. 여기서 한 달에 은자 세 냥씩 주고 있다는 걸 안다면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치고는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데?”
“불만은 없습니다. 단지…….”
“단지?”
연적하가 심양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심양각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시답지 않은 이유인데 알고 싶으십니까?”
“말하기 싫으면 관둬. 억지로 들을 생각은 없으니까. 우리가 그럴 사이도 아니잖아?”
연적하가 선을 긋자 심양각이 급히 말했다.
“아, 아닙니다.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는 걸 알고 난 뒤로 뭘 해도 시들해져서 말입니다.”
“뺏고, 때리고, 죽이는 재미가 시들해졌다고?”
“조금 그렇게 됐습니다.”
“이거야 원. 잘됐다고 해야 할지, 안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연적하의 놀림에 심양각은 딴청을 부렸다.
평소와 다른 심양각의 모습에 연적하는 저도 모르게 경어를 섞어 썼다.
“이봐요, 개구리 영감님. 당신 같은 노인에게도 꿈이 있나요?”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은 아직 청춘이다?”
“예, 연 형님과 같은 시절이 바로 어제 같습니다. 비록 몸은 이렇게 늙었지만 말입니다.”
“풋! 그래서 꿈이 뭔데요?”
“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겁니다.”
“뛰어넘는 방법은 아시고?”
“예.”
예상 밖의 답에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방법을 알지 못해서 고민인데.
“알면서 왜 뛰어넘지 않는 거죠?”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 도와줘야 한다?”
“예.”
심양각이 연적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설마 그게 나?”
“안 됩니까?”
심양각이 입술을 깨물었다.
연적하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았다. 오봉십걸의 빠른 성장을 보면서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오봉십걸이 현급 고수가 되는 데 일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초짜인 그들과 달리 자신에게는 무학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경험이 있다. 설사 산공(散功)을 경험한다 해도 금방 성급 무위를 회복할 것이다.
그 고비를 넘기면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
물론 연적하가 허락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흐음!”
연적하가 애매한 표정으로 심양각의 아래위를 훑었다.
상대가 유명한 마두라서 싫은 건 아니다. 어차피 오봉십걸들도 오십보백보였으니까. 한 명만 죽였으니 열 명 죽인 놈보다 착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 늙은 나이에 진지하게 청춘이 어쩌고 하니 살짝 돕고 싶기는 하다.
‘심양각이 백자구결을 연성할 수 있을까?’
오봉십걸은 내공술이 처음이라 백자구결을 잘 받아들였다. 그러나 심양각은 그들과 달리 오랜 세월 사파의 내공술을 익힌 마두다.
정공과 사공은 물과 기름 같아서 서로 섞이려 하지 않는다. 아니, 어울리는 건 고사하고 심지어 싸워서 서로를 박살 내기도 한다.
“당신이 익힌 내공과 내가 익힌 내공은 서로 섞이지 않을 텐데요?”
“산공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배우게 되면 틀림없이 저의 내공이 흩어질 겁니다.”
“본인이 원한다면 가르쳐 주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나중에 결과가 나쁘게 나와도 나를 탓하면 안 돼요. 내가 익히라고 강요한 게 아니니까.”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가르쳐 주신다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난 도둑놈들이 하는 말은 믿지 않아요. 더구나 평생이라고 해 봤자 그쪽은 이미 살 만큼 산 것 같은데 뭘.”
“그, 그래도…….”
“됐고, 조건이 있어요. 당신이 동의하면 지금이라도 가르쳐 줄게요.”
“말씀해 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지금 죽으라는 것만 아니면 됩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에요. 내 뒤통수를 치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돼요.”
“절대 연 형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제가 그런 개보다 못한 짓을 한다면 죽여도 좋습니다. 꼭 죽여 주십시오.”
“이런, 뭔가 오해를 하시는 모양인데. 배신이야 당연히 죽고도 남을 짓이죠. 그런 걸 누가 조건으로 거나요?”
“예? 그럼?”
“뒤통수라는 건 좀 다른 뜻이에요. 예컨대 노인장이 어떤 짓을 했는데, 그 일의 결과로 사람들이 나를 욕하는 거. 다시 말해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노인장이 저지른 일로 내가 욕을 먹으면, 그런 게 뒤통수가 되는 거죠.”
“아!”
그제야 심양각은 연적하가 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에게 폐가 될 짓을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사소한 것 같지만 심양각에게는 세상 어느 것보다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세상 천지에 욕먹지 않는 녹림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연적하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건 제자가 한 일로 스승이 욕을 먹는 것과 같았다.
만약 연적하가 같은 마두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스승은 자신이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칭찬했으니까.
문제는 연적하의 정체성이다.
그는 제멋대로이지만 그렇다고 극악한 마두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다. 극히 패도적인 건 사실이지만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온순했다.
연적하가 고민하고 있는 심양각을 빤히 보며 물었다.
“인생의 삼락을 못 하게 될까 봐 걱정이 돼요?”
여기서 말하는 삼락이란 빼앗고, 때리고, 죽이는 일을 의미한다.
심양각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아닙니다. 연 형님께 폐를 끼치지 않는 행동이 뭔지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이젠 연적하가 말하는 삼락도 시들하다. 늙어서 그런지, 연적하와 함께 생활한 뒤로 무력감에 빠진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대답은?”
“하겠습니다.”
“내 뒤통수를 치면 백자구결로 얻은 모든 걸 걷어 갈 겁니다.”
내공을 폐쇄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소리다.
팔다리 하나를 가져간다면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다. 그러나 내공을 잃으면 끝이다. 그건 심양각처럼 원
수가 많은 마두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예! 가르쳐 주십시오!”
‘이러다 오봉십걸들에게 뒤를 잡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심양각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결코 황요명과 같은 멍청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럽시다. 앉아 봐요.”
연적하의 말에 심양각은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 심법의 이름은 ‘구천여일진경’이라고 해요. 구천현녀가 말하기를, ‘마음을 한곳에 놓아두고, 무엇이든 일삼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해 보려고 하지 말라[九天玄女 曰 置心一庫, 無事不翔]’…….”
연적하는 우선 백자의 구결을 암송했다.
놀랍게도 심양각은 세 번 듣고 백자구결을 외워 버렸다.
반나절 내내 끙끙거리던 오봉십걸에 비하면 늙은 기재라고나 할까?
호기심이 일어난 연적하는 백자를 더 읊조렸다.
눈을 감고 반 시진(1시간) 정도 되뇌던 심양각은 그것마저도 외웠다.
그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해진 연적하는 계속해서 ‘구천여일진경’의 구결을 가르쳤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까지 심양각은 무려 삼백 자의 구결을 외웠다. 그러나 그 이상은 단 한 글자도 외우지 못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막고 있는 것 같았다.
거침없이 삼백 자까지 외운 심양각은 답답한지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삼백 자를 외우고 나면 머릿속이 백지처럼 비워졌던 것이다.
“노인장, 아무래도 거기까지인 것 같으니 이제 그만 연공이나 해 봐요.”
“아, 예.”
심양각은 더 해 보자고 조르지 않았다.
점심때 산에 올라 반나절 내내 외우기만 했다. 이제는 몸으로 체득해야 할 때였다.
그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혔다.
드디어 상승의 심법을 익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렜다.
심양각은 삼백 자 구결을 암송하며 천천히 운기토납(運氣調息)에 들어갔다.
연적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심양각을 바라보았다.
무공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그에게는 모든 게 새로웠다. 오봉십걸은 운기토납법을 몰라서 자신이 세세히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심양각은 첫 번째 연공에서 벌써 선정에 든 것 같았다.
천지상인은 ‘운기조식에는 풍(風), 천(天), 기(氣), 식(息)의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했다.
숨이 코끝에서 놀면 풍, 숨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들숨과 날숨이 끊기면 천, 끊어짐은 없지만 호흡이 가늘지 않으면 기, 숨을 쉬는지 아닌지 알 수 없으면 식이다.
오봉십걸들은 녹림대회의 긴 여행이 끝나서야 식의 단계에 들었다.
그런데 심양각은 구천여일진경을 배운 첫날 그걸 해내고 있다. 본래 내공술을 익힌 사람이라 그런가? 오봉십걸과는 많이 달랐다.
이런 사람이 사파의 마두라니 인생 참 모를 일이다.
연적하는 갑자기 선정에 든 심양각의 곁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달이 일어났다.
심양각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상체가 부들부들 떨렸다.
‘쯧! 공력이 흩어지고 있나 보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고통이 심한가 보다.
연적하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무공에 해박한 심양각이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니 잘못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심양각의 눈과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연공 중에 피를 쏟다니?
산공의 부작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치다.
연적하는 당황스러웠지만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커헉! 쿨럭! 쿨럭!”
끝내 심양각은 피를 토해 내다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운기조식 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경우는 딱 하나뿐이다.
‘설마, 주화입마?’
연적하는 급히 심양각을 안아 들고 산 아래로 뛰어갔다.
***
하가촌
하가의방.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심양각 주위에 세 남자가 굳은 얼굴로 앉아 있다. 하가의방의 의원 하선우와 채주 풍연초, 그리고 연적하다.
일각(약 15분) 정도 심양각을 진맥하던 하선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기경팔맥이 모두 손상됐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운신도 하지 못할 중상입니다. 나이가 있으셔서 회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