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13
513회. 돼지는 욕 좀 먹어도 돼
‘연단’이라는 장천세의 위치가 종문에서 가장 밑바닥이라 낭인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조금은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죽이겠다고 덤벼든 사람을 그냥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
연적하는 짐짓 냉랭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줄 게 하나도 없다고? 종문 제자라면서? 잘 생각해 봐. 아무리 가난해도 도둑이 훔쳐 갈 건 있다고 했어.”
녹림 출신인 연적하는 과거 산행(山行)에서 하듯 상대를 어르고 달랬다.
장천세는 맨입으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살려면 뭐라도 줘야 하는 분위기였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 왜 이렇게 변질됐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나쁜 일은 아니었다.
“금자 삼십 냥이 있소.”
그는 일단 아무 말이나 던져 보았다.
금자 삼십 냥은 수중에 있는 전 재산이었다.
종문 제자들은 돈보다 영지 선초를 더 귀히 여기지만 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니 어쩌랴.
그는 상대가 화내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좋아. 그 정도면 뭐 훌륭하네.”
심지어 훌륭하단다. 장천세는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저, 정말 그것으로 되겠소?”
“봐주는 건 이번 한 번만이야. 다음에도 또 같잖은 이유로 칼을 디밀면, 알지?”
연적하가 협박하듯 눈을 부라렸다.
밀려오는 모멸감에 장천세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종문의 제자들에게도 받아 본 적이 없는 협박을 이런 곳에서 받다니.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 못해 불쌍할 정도다.
“대답이 없네?”
청년의 태도가 다시 삐딱해지자 장천세는 급히 약속했다.
“절대 그러지 않겠소.”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데 벌써 ‘연허’의 경지에 든 천재다.
복수니 뭐니 하는 감정은 들지도 않았다.
천태종에서 나름 주목받는 자신도 ‘연단 구 성’인데, 상대는 벌써 ‘연허’.
애초에 비교할 수도 없는 천재인 거다.
‘종문의 제자가 분명해.’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의 심성이 잔혹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문의 제자들은 평생을 경쟁한다.
일반인들이 출세와 성공을 두고 다툰다면, 종문의 제자들은 종사가 되기 위해 싸운다.
종사가 된다고 끝은 아니다.
종사가 되어 ‘하늘의 문’을 열면 ‘입신(入神)’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더 무서운 경쟁이 시작된다.
‘입신’이야 신들의 세계니 차치하고, 종문의 제자들에게는 동문까지도 경쟁의 대상이었다.
동문도 싸우다 죽이는 마당에 다른 종문의 제자에게 관대할 리가 있나.
다른 종문을 죽여 ‘영지 선초’나 ‘법기’ 등을 털어 가는 건 일상다반사였다.
물론 그러니 복수를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면서 하는 거다.
어린 나이에 ‘연허’를 이룬 다른 종문 제자에게 칼을 들이댄다?
가급적 그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장수의 지름길인데 그럴 리가 있나!
장천세는 뜨거운 눈으로 청년을 보았다.
상대의 눈에서 진심이 느껴지자 연적하는 손가락을 튕겼다.
퍼, 퍼, 퍽-.
거친 해혈에 장천세가 움찔거렸다.
그를 향해 연적하가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청년의 손을 내려다 보던 장천세는 ‘아!’ 하는 탄성과 함께 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는 아쉬운 눈으로 주머니를 보다가 청년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종문의 제자가 금 서른 냥을 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가 봐도 되겠소?”
장천세는 청년의 눈치를 슬슬 살폈다.
돈만 받아먹고 살수를 쓸 수도 있어서다.
실제로 살려 줄 듯 속여 탈탈 털은 뒤에 죽이는 종문 제자들도 많았다.
“가, 다시 만나지 말자고.”
“그러리다.”
말을 마친 장천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 바람처럼 숲속으로 사라졌다.
연적하가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겁 많고 소심한 모습이 영락없는 강호 낭인이었다.
그와 달리 공지섭과 조원들은 처음 보는 종문 제자의 인간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조장인 공지섭이 중얼거렸다.
“처음 알았네. 종문 제자도 달아날 때는 보통 사람과 같구나…….”
그러자 공지유가 말을 받았다.
“저는 종문 제자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도 처음이에요. 돌아가서 말하면 아무도 안 믿겠죠?”
조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허’에 오른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 ‘연단’의 종문 제자를 제압하고 돈을 받아냈다?
문주에게 말해도 헛소리로 치부할 것이다.
그렇다고 감히 연적하에게 검공을 보여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는 노릇.
문득 공지섭이 조원들에게 말했다.
“오늘의 일은 우리만 아는 것으로 해야 한다. 문주님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마라. 왜 그런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공지섭의 손가락이 정우생을 가리켰다.
‘장생불사 곰’을 떠올린 조원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후 공지섭 일행은 폭포를 벗어나 빠르게 이동했다.
사람들은 또 종문 제자와 얽힐까 봐 힘들어도 꾹 참고 부지런히 달렸다.
해거름 무렵.
공지섭 일행은 숲속에서 야영 준비를 했다.
중심부에서 멀어진 만큼 야수의 위험도 덜한지라 다들 편안한 얼굴이다.
숲속 한가운데의 널찍한 공터는 곳곳에 야영지로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연적하는 그중 가장 바닥이 평평하고 아늑한 자리를 배정받았다.
녹림의 태상호법인 연적하는 대접받는 것에 익숙한지라 사양하지 않았다.
정우생이 사냥한 멧돼지를 모닥불에 구웠다.
고소한 냄새가 퍼져 나가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닥불로 모여들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바라보던 공지유가 주위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냄새를 피워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야수는 어차피 ‘초목급’일 테니 상관없는데, 또 종문 제자가 나타나면 어쩌죠?”
“연 소협이 있는데 뭐가 문제냐?”
공지섭의 태평스러운 대답에 공지유가 눈을 찡그렸다.
장천세 덕분에 알게 된 연적하의 경지는 ‘연허’다.
일반인인 자신들의 눈에는 그것만으로도 천상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종문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종문에서 ‘연허’는 아래에서 두 번째 단계에 불과하다.
그 말은 연적하보다 강한 종문 고수들이 위로 수두룩하다는 소리다.
공지유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감히 연적하의 앞에서 ‘괜찮네, 안 괜찮네’ 다투고 싶지 않아서다.
잠시 후 그녀는 잘 익은 부위의 살점을 잘라 연적하에게 내밀었다.
“연 소협, 드셔 보세요.”
“감사합니다.”
고기를 받고 연적하가 인사하자 정우생이 웃으며 한마디 했다.
“아니, 멧돼지를 잡고 구운 건 난데, 왜 공 사매가 나서서 인사를 받아?”
“뭘 그런 걸 따지고 그래요? 어차피 연 소협도 정 사형이 잡은 걸 봤는데.”
“…….”
정우생이 뻘쭘한 얼굴로 모닥불을 헤집었다.
그때 공지섭이 품 안에서 소금을 꺼내 연적하에게 내밀며 한소리 했다.
“이 사람들아, 소금을 드렸어야지. 심심해서 그냥 어떻게 먹으라고. 쯧쯧!”
연적하가 소금을 받으며 감사 인사를 하자 공지섭이 히죽 웃었다.
누군가는 물을, 또 다른 이는 숨겨 온 술을 슬그머니 가져왔다.
연적하는 사람들이 주는 대로 받아 먹었다.
잠시 후 피곤이 밀려오자 연적하는 일찌감치 잠자리로 돌아갔다.
바닥에 눕자 세 개의 달이 들어왔다.
둘도 아니고 무려 세 개다.
밤하늘의 달을 볼 때마다 여기가 ‘왕들의 하늘’이라는 자각이 생긴다.
‘누님은 어디에 있는 거지?’
일단 ‘왕들의 하늘’에서 인간이 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안심은 된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왕들의 하늘’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이런 곳에서 십전무후 남궁연을 찾기란 바닷가에서 바늘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팔황신모가 고마웠다.
구주와 완산주라도 알게 된 것이 어딘가.
‘그 마녀가 누님이 갈 만한 곳을 가르쳐 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왕들의 하늘’에 왔다면 실로 끔찍했을 것이다.
한편 조원들은 피곤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모닥불 주변을 떠나
지 않았다. ‘천년화령적지’와 ‘장생불사 곰’의 쓸개까지 얻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낮에 죽을 위기를 겪었지만 이미 그건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
그들은 돈이 생기면 무엇을 할지를 두고 떠들어 댔다.
한바탕 희망 사항을 쏟아 낸 뒤에 대화가 뜸해질 즈음, 누군가 나직이 말했다.
“그런데 연 소협은 누굴까요? 종문의 제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게. 검공을 보면 종문의 제자인데…….”
“본인이 아니라잖아.”
“당연히 아니지! 종문에 대해서 우리만큼도 모르잖아. 종문 사람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목소리가 조금 커지자 묵묵히 듣고 있던 조장 공지섭이 나섰다.
“조용. 밤에 왜들 큰 소리를 내느냐? 여기가 어딘지 잊었나 본데, 우리가 있는 곳은 천관산맥이다. 야수는 물론 종문 제자들까지 드나드는 곳이란 말이다. 연 소협이 누구인지 알아서 뭐하게? 너희가 종문 사람이냐? 다들 그만 떠들고 자라. 연 소협 쉬는데 방해하지 말고.”
조장의 날카로운 지적에 사람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공지섭의 말대로다.
사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천관산맥에서 그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동행하고 있다.
그 이상은 모르는 게 오히려 약인지도 모른다.
공지섭의 잔소리에 이성을 되찾은 사람들은 하나 둘 잠자리로 떠나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공지유가 오라비에게 한 소리 했다.
“오라버니, 맞는 말이지만, 너무 야단치듯 하지는 마. 나중에 뒤에서 욕해.”
“지유야.”
“왜?”
공지유는 평소와 다른 오라비의 묵직한 음성에 살짝 긴장했다.
“내 나이가 몇인지 아느냐?”
“스물여덟. 아무렴 동생인 내가 그것도 모를까 봐?”
“소요종에서 제자를 뽑는 ‘비승과해(飛昇過海, 재능과 깨달음을 보는 시험)’의 연령 제한이 스물다섯이다. 난 벌써 세 해나 지났다.”
“…….”
공지유는 오라비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스무 살부터 ‘비승과해’에 도전했지만 선발되지 못하고 나이를 넘겼다.
“욕 좀 먹어도 돼. 우리 같은 돼지는.”
공지섭의 자학에 공지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장천세와 어린 연적하를 보고 상처가 도진 모양이다.
‘돼지’는 일반 무인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하해서 하는 소리였다.
종문에 들어가면 상위의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연적하야 ‘원영’과 ‘독요’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렸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원영’은 삼백 년을 더 살고, ‘독요’,는 구백 년을 더 산다.
‘현인’이 되면 천 년을 더 살게 되니 가히 인간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뿐이랴.
‘종사’가 되면 수명이 삼천 년 늘어나 반선(半仙)이나 다름없다.
그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초라했다.
평범한 사람들이야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살지만 무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종문의 제자가 되기를 소원했다.
하지만 종문의 문은 좁다.
그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한 무인들은 스스로를 ‘돼지’라 불렀다.
머리를 설레설레 젓던 공지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라비 입에서 ‘돼지’ 소리가 나왔으니 그의 옆에서 잠자기는 틀린 까닭이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던 공지유의 눈에 연적하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연허’의 경지인 그가 오라비처럼 우울한 얼굴로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이 안돼 보여 공지유는 슬쩍 곁으로 다가갔다.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달요.”
“달이 어때서요?”
“너무 많잖아요.”
“풋!”
뜻밖의 대답에 공지유는 실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달이 너무 많다니?
살다 살다 이런 황당한 소리는 처 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