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24
524회. 나 쉬운 여자 아니에요
조양성.
산음현.
현천문.
소요종 고수 원상한과 비무를 한 날 밤.
침상에서 뒤척이던 연적하는 부스스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세 개의 달이 환하게 사위를 비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낯설더니 이젠 세 개의 달도 눈에 익숙하다.
‘천신님들, 우리 연 누님 잘 좀 돌 봐주십쇼.’
천신에게 소원을 빈 그는 천천히 객사 주위를 산책했다.
걸음걸이에는 사람의 심리가 드러난다.
지금 연적하의 발걸음은 차분했다.
‘연허’의 고수 원상한을 이기고, 그의 스승에게 인정받아서가 아니다.
그는 구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조급함을 버렸다.
십전무후 남궁연을 찾는다는 것은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수약주에만 십삼 개 성이 있다.
당장 수약주만 해도 자신이 살던 강호보다 더 크다.
그런 주가 무려 아홉 개나 된다.
구주만 해도 자신이 살던 강호보다 최소한 아홉 배 크다는 소리다.
게다가 남궁연이 한산주로 갔을 거라는 것은 팔황신모의 추측에 불과하다.
설상가상으로 팔황신모는 구주의 실체를 모른다.
그녀의 말에 의지해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래서는 안 된다.
“천천히, 서두르지 말자.”
일단은 수약주부터 조사를 해 나가는 거다.
한산주는 그다음이다.
한산주에만 집중하다가 자칫 남궁연을 영영 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남궁연은 무사할 게다.
구주는 인간의 생존에 위험한 땅이지만, 동시에 살 만한 곳이기도 했다.
자신도 현천문에서 귀빈 대우를 받고 있지 않던가.
남궁연의 능력이라면 자신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고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안정되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일단 돈을 벌어야겠지?”
홍익방에 금자 칠십 냥을 더 주고, 한산주로 갈 경비를 마련하려면 거금이 필요했다.
문득 정우생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정 형, 짧은 시간에 돈을 벌려면 뭐가 좋을까요?
-짧은 시간이라면 ‘영지 선초’죠.
-‘영지 선초’요?
-구주에서 거래가 가장 활발한 게 ‘영지 선초’니까요. 상단에 들고 가면 무조건 고가로 매입해 줍니다. 상단에서는 그걸 종문에 넘기지요. 그 차액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개인에게 구매해서 종문에 되판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개인에게 금 열 냥에 샀다면, 종문에 스무 냥을 받고 넘기는 식입니다.
-두 배나요?
-세 배를 받는 것도 있습니다. ‘영지 선초’는 구한다고 구해지는 게 아니니까요.
“‘영지 선초’라…….”
하기야 천태종 제자 장천세와 소요종의 천승학만 봐도 ‘영지 선초’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 만하다.
“이왕이면 종문에 직접 넘기는 게 좋겠지? 아닌가?”
연적하는 ‘영지 선초’도 없으면서 벌써부터 ‘상단이냐?’ ‘종문과의 직거래냐?’를 두고 고민했다.
***
다음 날.
연적하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공지섭을 찾아갔다.
“공 조장님, 잠깐 얘기 좀 하죠.”
“예, 말씀하십시오.”
“제가 돈이 좀 필요해서 ‘영지 선초’라는 걸 구해 볼까 하는데요.”
연적하는 말하다 말고 공지섭의 눈치를 살폈다.
“예.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영지 선초’가 뭔지, 또 그건 어디서 그걸 채취해야 하는지 몰라서요.”
“아…….”
공지섭이 난감한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영지 선초’를 채취하는 장소야 어디라고 가르쳐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영지 선초’의 종류를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연 대협, 위치를 가르쳐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지 선초’를 모르신다는 것은 좀…….”
“종류가 많은가요?”
“종류도 종류지만 생김새를 모르고서는 채취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연적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 방법을 알려 달라고 찾아온 것이었다.
“저만 해도 약초학을 공부하는 데 삼 년이 걸렸습니다.”
“헉! 삼 년요?”
연적하가 놀라자 공지섭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삼 년도 빠른 편입니다. 제 동생은 사 년 차지만 아직 다 외우지 못했으니까요.”
“사 년…….”
연적하는 공지유를 떠올렸다. 제법 총명해 보이는 그녀가 그렇다면 자신은 더할 게 분명했다.
“너무 놀라실 건 없습니다. 연 대협의 경우 비싼 ‘영지 선초’를 구하는 게 목적이시겠지요?”
“예.”
“종문에서 사들이는 ‘영지 선초’라면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렇다 해도 그것만 외우는 데 몇 달은 걸릴 겁니다.”
“그렇게나요?”
“삼백여 종에 달하는 ‘영지 선초’니까요. 물론 대협의 암기력이 출중하시다면 날짜는 앞당겨질 겁니다.”
“제 암기력은 보통에 조금 못 미친다고 보시면 돼요. 아주 미세하게요. 눈곱만큼?”
연적하의 구차한 설명을 듣고 있던 공지섭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급하지 않다면 먼저 외우시고, 그럴 시간이 없다면 문주님께 말씀드려 연 대협에게 사람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약초를 잘 아는 사람을 붙여 주세요.”
“예, 그럼 문주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공지섭은 부랴부랴 순우각(문주의 집무실)으로 가서 연적하의 바람을 전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소천우는 고민할 것도 없이 흔쾌히 승낙했다.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거라.”
소요종의 고수가 침을 발라 둔 사람이니 십중팔구 소요종에 들어갈 것이다.
그에게 베풀수록 현천문의 지위가 올라갈 터이니 사양해도 떠안겨야 마땅했다.
“누구를 붙여 드려야 할지…….”
“삼대제자 중에 약초학을 오래 공부한 사람이 누구지?”
삼대제자라면 나이도 어리니 연적하의 길잡이로 안성맞춤이었다.
“제 동생과 유익현이 사 년 정도 됐습니다.”
“유익현? 현령의 서자가 약초학을?”
“언젠가 약초상이 되겠다고 하더군요.”
“서출이니 장사를 하겠다는 건가? 하기야 부친이 현령이니 자리 잡는 건 일도 아니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소천우가 공지섭을 힐끔보았다.
“둘 다 보내.”
“예? 지유와 유익현을요?”
“지유는 연 대협에게 붙이고, 유익현에게는 ‘영지 선초’를 캐 오라고 해라.”
“…….”
공지섭이 황당한 눈으로 문주를 보았다.
이 기회를 이용해 한몫 잡을 생각까지 하다니? 그 욕심의 끝을 모르겠다.
“왜? 연 대협과 같은 고수가 지켜 주겠다는데, 천금 같은 기회를 그냥 날려 보낼 셈이냐?”
“아, 아닙니다.”
공지섭은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문주의 말대로 생각을 달리하면 현천문에 좋은 기회였다.
“연 대협이 기분 나쁘지 않게 중간에서 잘 전해라. 유익현이 채취한 것은 본문의 것이라고.”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 대협도 그 정도는 이해해 줄 겁니다.”
공지섭이 받아들이자 소천우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이번 기회에 네 동생과 연 대협이 이어지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연 대협은 이미 성혼(成婚)을 한 사람이 아닙니까?”
“쯧쯧! 순진하기는. 자고로 영웅호색이라 했다. 그 정도 재주가 있는 사람이면 칠처팔첩(七妻八)도 괜찮아. 연 대협이 ‘원영’에만 이르러도 삼백 년의 수(壽)를 누린다. 한 여자에 안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제 동생이 연 대협의 눈에 찰지…….”
공지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적하와 혈연지간이 된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글쎄다.
그의 눈에 지유가 여자로 보일지 의문이다.
“연 대협도 남자니라. 한창 왕성할 때이니 눈치껏 들이대라고 해라. 지유가 천방지축이지만 그래도 산음현에서 소문난 미녀이니 못 이기는 적 받아 줄 게다. 유익현에게는 요령 있게 행동하라 이르고.”
“정말 그렇게 될까요?”
소 문주의 호언장담에 공지섭은 귀가 솔깃했다.
연적하 같은 사람이 매제(妹弟)라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지금까지 내 말대로 해서 손해 본 적이 있었더냐?”
“없었습니다.”
“그런데 뭘 물어?”
“아, 예.”
공지섭은 소천우에게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그는 연적하에게 ‘문주가 허락했다’고 알린 후에 냅다 집으로 달려갔다.
공지섭의 집.
공지섭은 공지유에게 문주가 한 말을 가감 없이 전했다.
“……문주님은 네가 들이대면 연 대협도 못 이기는 척 받아 줄 거라고 했다만, 네 생각은 어떠냐?”
그는 그래도 가족이라고 마지막에 동생의 의견을 물었다.
공지유가 기막힌 눈으로 공지섭을 보았다.
“내 생각이 어떠냐니?”
“연 대협이 남자로서 마음에 드냐고.”
“미쳤구나? 나 공지유야. 아무리 연 대협이 고수라 해도 그렇지, 내가 왜 그래야 돼?”
“싫으면 됐어. 네가 싫어하는 일을 강요하고 싶지 않으니까. 강요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나는 그냥 너도 연 대협이 마음에 든다면 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공지섭은 동생이 정색을 하고 항의하자 밀어붙이지 않았다.
연적하와 동생이 잘됐으면 하는 바람이야 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공지유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툴툴거렸다.
“하여튼 우리 문주님은 자기 가족도 팔아먹을 사람이야. 딸이 있었으면 볼 만했겠다.”
“쩝, 문주님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라. 그게 어디 문주님 혼자 잘되자고 한 소리냐? 연 대협 같은 사람과 맺어지는 것도 다 자기 복이다.”
“복은 하늘이 내려 주는 거야. 사람이 억지로 손에 넣으려고 하면 그건 욕심이지.”
“그래, 그래. 나도 욕심 좀 부려 봤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소리 하지 않으마. 됐냐?”
“흥! 하여간 남자들은 쓸데없이 욕심만 많아 가지고.”
“아이고, 예, 예. 욕심 많은 오라비는 이만 물러갑니다. 여하튼 조만간 연 대협과 함께 ‘영지 선초’를 채취하러 갈 거니까 그런 줄이나 알고 있어라.”
자리에서 일어난 공지섭은 도망치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겨진 공지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 한창 왕성할 때이니 눈치껏 들이대라고? 그게 아가씨에게 할 소리야?”
그래도 ‘산음현에서 소문난 미녀’라는 말은 마음에 들었다.
“쳇! 보는 눈들은 있어 가지고.”
중얼거리던 그녀는 서랍에서 거울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자신이 봐도 썩 예뻤다.
그녀가 거울을 보며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 대협, 나 쉬운 여자 아니에요.”
***
공지섭은 부지런히 현천문으로 돌아갔다.
그가 이대제자들의 거처인 호원각으로 가기 위해 정원을 가로지를 때다.
뒤쪽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공 조장님!”
익숙한 음성에 공지섭이 급히 돌아섰다.
아니나 다를까!
연적하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예?”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요? 한참을 찾았네.”
“아, 지유에게 가서 연 대협을 도울 준비를 하라 이르고 왔습니다.”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자문을 좀 구할까 해서요. 근처에 갈 만한 곳이 있을까요?”
“월악산이 있습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독안귀마’가 자리를 잡아서…….”
“다른 곳은요?”
“백운산도 괜찮은데 산세가 그저 그래서 약초꾼들이나 찾는 곳입니다.”
산세가 ‘그저 그렇다’니 연적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산에 영기가 충만할 리 없을 테니까.
“그다음은요?”
“조금 멀리에 불비산이 괜찮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이번 가을은 소요종에서 입산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삼 년에 한 번씩, 비경(秘境)이 열릴 때마다 일반인의 출입을 막거든요.”
“비경이 뭐래요?”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종문들의 행사라고밖에는.”
“종문들요? 다른 종문도 모여요?”
“특정 종문이 입산을 막으면 다른 종문들에게 공격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불비산 말고는 없어요?”
“그래서 저희도 멀지만 천관산맥으로 갔던 겁니다.”
연적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지금 ‘영지 선초’를 구할 곳은 천관산맥뿐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거긴 너무 멀다.
“월악산으로 가야겠네요.”
“연 대협, 월악산에는 ‘독안귀마’가 있어서 종문 제자들도 피해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