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36
536회. 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었나?
연적하는 부지런히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그리고 건너편을 살피니 과연, 오른편에 유독 정상이 하얀 산 하나가 보였다.
“너구나!”
길눈이 어두운 연적하가 반색을 했다.
이건지 저건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척 봐도 설산(雪山)이라는 느낌이 왔다.
이제 독안귀마가 눈치채지 못하게 가서 ‘천년설연화’를 찾기만 하면 된다.
“국화와 배추를 섞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했겠다?”
그런 거라면 눈에 잘 띌 것도 같았다.
자신의 머리를 믿지 못하는 그가 ‘국화와 배추’를 중얼거리고 있을 때다.
갑자기 숲에서 일곱 명의 무인들이 튀어나왔다.
고산문의 무인들이었다.
연적하는 뚱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아까부터 뒤따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어서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곽초성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잠시 멈추시게. 우리는 고산문의 사람들일세. 자네가 현천문과 함께 온 연적하가 맞는가.”
“그런데요?”
“맞다는 말인가? 아니라는 말인가?”
“맞아요. 왜요?”
연적하가 가볍게 얼굴을 찡그렸다.
설산 앞에서 발목이 잡히니 은근 불쾌했던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학주는 다소 시건방진 연적하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지만 참고 지켜봤다.
‘의기발현(意氣發顯)’과 ‘이기어검’으로 독안귀마를 잡아 두었다는 말을 들어서다.
물론 ‘동방유의 일검에 독안귀마가 달아났다’는 소문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소리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과장인지 모르니 일단은 지켜볼 생각이다.
그건 곽초성도 마찬가지였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왜요?’라니 ‘울컥’했지만 참았다. 상대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아직 감이 오지 않아서다.
“험, 자네가 금단문의 동방유와 함께 독안귀마를 내악(內岳)으로 쫓아 냈다지?”
“그런데요?”
곽초성은 이를 악물었다.
한참 손위의 어른이 묻는데 또 ‘그런데요?’다.
그는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온 욕을 꿀꺽 삼키고 애써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누군가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아까부터 ‘그런데요’라니? 사실인가? 아니면 금단문에서 지어낸 이야기인가? 참고로 내가 동방유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아두게.”
곽초성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자신이 동방유보다 고수라는 것을 알렸으니 거짓말은 하지 못하리라.
“사실이에요.”
“그래, 금단문에서……. 응? 뭐라고 했나?”
“동방유라는 분이 독안귀마를 찌르니까 내악으로 달아나더라고요. 됐나요?”
“…….”
눈살을 찌푸리던 곽초성이 말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나조차도 독안귀마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보다 하수인 동방유가 독안 귀마를 쫓아낸단 말인가?”
“그래요? 그런데 정말 동방유라는 분이 독안귀마의 목을 콱 찌르니까, 후다닥 달아났어요. 뭐, 믿든 말든 그건 알아서 하시고요. 그나저나 내악에 독안귀마가 있는데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괜찮아요?”
“흥! 자네의 말에는 어폐가 있네. 독안귀마가 정말 내악에 있다면, 자네는 왜 내악에 들어왔나? 우리도 알 만큼 알고 왔으니 더 이상 거짓말은 하지 말게.”
“뭘 알고 와요?”
“월악산에는 독안귀마가 없었을 걸세. 자네와 동방유는 우연히 그걸 알아냈을 테고.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든, 아니면 동방유에게 얼마간 돈을 받았겠지. 그리고 동방유는 자네와 독안귀마를 쫓아낸 것으로 소문을 냈던 거야. 어때? 소름 돋도록 정확한 분석이지?”
“네, 소름이 돋기는 돋네요.”
공교롭게도 그때 연적하의 기감에 독안귀마가 걸려들었다.
보름 전에 외악에서 느끼던 종잡을 수 없이, 마치 바람처럼 가벼운…….
정말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곽초성은 이제야 상대가 인정했다고 생각해 벼르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제안을 하나 하지. 결코 자네가 손해를 보는 일은 없을 걸세.”
“저어, 그런데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인가?”
“어허! 할아버지라니!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아직 안 했군. 나는 고산문의 일대제자인 곽초성일세. 이것도 인연이니 앞으로는 ‘곽 노사’라고 부르도록 하게.”
연적하의 나이가 삼대제자들과 비슷하니 틀린 호칭은 아니었다.
곽초성은 이미 쌀이 익어 밥이 다 된 것처럼 혼자 들떠서 말을 이어갔다.
“외악의 독안귀마는 지금처럼 자네와 동방유의 공으로 남겨 놓겠네. 하지만 동방유만 좋은 짓을 해서야 쓰나. 내악은 우리 고산문과 자네가 한 것으로 함세. 동방유보다 내가 고수라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을 게야. 자네는 외악에 이어 내악까지, 월악산의 영웅이 되게. 조양성은 몰라도 최소한 월악산 인근 다섯 개 현에서는 자네를 알아줄 걸세. 어떤가?”
폭포수 같은 곽초성의 말에 연적하는 정신이 없었다.
독안귀마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왜? 명성만으로는 부족한가? 허면 우리가 얼마를 얹어 주면 되겠나? 혹시 금단문에서도 돈을 받았나? 그렇다면 그 정도까지는 맞춰 줄 수 있네.”
곽초성이 뜨거운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오늘날 동방유와 금단문의 입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지출은 감수할 만했다.
“아, 예, 말씀은 알겠는데 이거 어쩌죠?”
“왜? 무엇 때문에 그러나? 금단문에서 자네에게 뭐라고 할까 봐?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우리 고산문에 비하면 금단문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저기, 그럼, 이러는 건 어떨까요?”
“뭔가? 말만 하게.”
“제 이름은 빼 주시고, 그냥 고산문에서 내악의 독안귀마를 상대한 것으로 하죠?”
“그래도 되겠나?”
“예, 저도 외악에 이어 내악에서까지 독안귀마와 얽히기는 싫어서요.”
그건 진심이었다.
독안귀마의 그 기이한 수법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중에 딴소리하지는 않겠지? 만에 하나 그랬다가는 경을 칠 걸세.”
“절대요.”
“알겠네. 얼마면 되겠나?”
“주시는 대로 받을게요.”
연적하는 빨리 돈을 받고 설산으로 달아날 생각이었다.
그런 연적하의 속도 모르고 곽초성은 이학주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잠시 후 곽초성이 연적하에게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금 다섯 냥일세. 마음 같아서는 더 주고 싶지만 이게 전부라. 아쉽겠지만 내악에서 ‘일엽선초’ 다섯 뿌리를 캤다고 생각하게.”
연적하는 돈주머니를 받아 얼른 갈무리했다.
“감사합니다. 독안귀마를 맡아 주시는 것도 대단한데, 돈까지 주시다니. 오늘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걸세. 내악의 독안귀마는 우리 고산문에서 처리한 것이네. 알겠나?”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도 될까요?”
“이건 여담이네만 월악산에 독안귀마가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가?”
“없다니요? 독안귀마는 동 노사의 일검을 맞고 달아났는데요.”
연적하는 내친김에 동방유에게도 ‘노사’라는 호칭을 붙였다.
곽초성과 비슷한 배분의 사람이니 그냥 그렇게 통일한 것이다.
순간 곽초성의 입가에 피시시 미소가 번졌다.
“정말 철저한 사람이로군. 마음에 들어. 그래, 외악은 동방유가, 내악은 나 곽초성이 상대한 것으로 하지. 아주 믿음이 가는 친구야. 그만 가 보게.”
“예, 그럼, 곽 노사의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푸훗! 건승은 무슨. 가 봐.”
곽초성은 연적하의 철두철미한 마무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피차 내막을 뻔히 아는데도 끝까지 동방유와 자신이 독안귀마를 상대한 것처럼 말하다니.
곽초성이 멀어져 가는 연적하의 뒷모습을 보며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처세에 능한 녀석이야. 저러니 금단문에서 믿고 손을 잡았겠지.”
이학주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인 줄 알겠습니다. 여하튼, 사형. 축하드립니다. 사형은 오늘 내악의 독안귀마를 물리치셨습니다.”
“하하하. 그게 어디 나 혼자만의 공인가? 사제와 저 녀석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가 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공치사를 늘어놓는데 어디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이이-.
곽초성은 말을 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산 정상에 서 있으니 바람이 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시원함을 넘어 왜 이렇게 등골이 서늘한지 모르겠다.
푸르르-.
어디선가 투레질 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사제, 무슨 소리 못 들었나?”
“소리요? 아, 좀 전에 ‘푸륵’ 하는 소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누가 몰래 방귀라도 뀌었나 보지요. 누구냐? 누가 방귀를 뀌어 사형을 놀라게 했느냐?”
이학주가 제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객쩍은 농담에 다섯 명의 남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한편 연적하는 독안귀마가 점점 다가오자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품 안의 돈주머니를 생각하니 그간의 답답함이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다.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사실대로 말하고 받은 돈이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지. 내가 거짓말을 하기를 했어? 진짜 말 한마디 더 보탠 게 없잖아. 나같이 정직한 사람도 없다니까.”
독안귀마의 기운이 점점 멀어지는 걸 보니 고산문 사람들에게 붙은 모양이다.
그렇게 ‘독안귀마가 내악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는데 왜 안 믿는지 모르겠다.
“자기들 잘못이지. 난 분명히 독안귀마가 있다고 했으니까.”
물론 곽초성이 믿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설산으로 가자. 죽어도 자기 욕심으로 그렇게 된 거지 내 책임은 아니잖아.”
하여간 인간의 욕심에는 답이 없다.
쥐꼬리만 한 명예를 얻으려고 눈앞에 닥친 재앙도 못 알아보다니!
막 설산의 초입에 들어서려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와아! 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었나? 걸음이 안 떨어지네. 샹!”
사실 고산문의 사람들을 떡밥으로 여기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독안귀마가 그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설산으로 가는 거다!
‘천년설연화’를 생각하면 그렇게 해야 하는데, 팔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양심의 무게가 이처럼 무거울 줄이야.
“이제 보니 내가 성인(聖人)이었어. 하기야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구천현녀님도 나를 도와준 거겠지? 몰랐네, 몰랐어. 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었다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연적하는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퍽 하고 사라졌다.
장천봉 정상.
고산문의 이대제자들이 키득거리자 곽초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왔다.
이윽고 거친 투레질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이대제자들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크고 선명했다.
푸르륵! 푸륵!
순간 이학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사형,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장천봉까지 누가 말을 끌고 왔을 리는 없고…….”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다. 서둘러 외악으로…….”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다.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에서 새까만 흑마 한 마리가 툭 떨어져 내렸다.
곽초성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독안귀마다!”
멍하니 바라보던 고산문 사람들이 뒤늦게 칼을 뽑았다.
차차창-.
일곱 개의 칼날이 햇살을 받아 번득였다.
고산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가장 어른인 곽초성에게로 향했다.
곽초성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하고 넘어갔다.
‘정말 독안귀마가 내악에 있었구나! 이런 놈을 동방유가 쫓아냈다고?’
놈이 뿜어내는 기운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데 대체 무슨 수로?
그때 문득 ‘목을 찔렀더니 달아났다’는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목에 무인의 조문(照門)과도 같은 약점이 있는 걸까?
그는 암암리에 전신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벼락처럼 튀어나가 검 끝으로 독안귀마의 목을 힘차게 찔렀다.
순간 ‘땡강!’ 소리와 함께 검신이 ‘뚝’ 부러졌다.
“헉!”
뒷걸음질 치려는 그의 머리를 독안귀마가 앞발로 가볍게 찍어 눌렀다.
“캑!”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곽초성은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지면에 들러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