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52
552회. 사형은 나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어요!
한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산음현에는 평균 사흘에 한 번 꼴로 야수가 출몰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모두 ‘초목급’이라 격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 싸움에서 정덕행은 언제나 선봉에 섰다.
물론 자의가 아니다.
연적하는 정덕행을 ‘초목급’ 야수의 정면에 세웠다.
정덕행은 거의 매번 죽을 위기까지 몰렸고, 그럴 때마다 오줌을 지렸다.
정덕행의 집.
아침 식사를 마친 정덕행이 자리에서 막 일어날 때다.
입가심으로 숭늉을 마시던 그의 부친, 정원영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도 자경단에 나가느냐?”
“……예.”
머뭇거리던 정덕행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답했다.
“언제까지 자경단 일을 할 생각이냐?”
“눈이 녹으면 해체될 겁니다.”
“자경단이 해체될 때까지 거기에 있겠다고?”
“저도 그만두고 싶지만 연적하가…….”
“하아! 말 나온 김에 묻자. 너 그놈에게 밉보일 짓을 한 적이 있느냐?”
“전혀요. 밉보이기는커녕 그전에는 그와 말도 섞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너만 괴롭혀? 산음현에 네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내 친구들은 네가 연적하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거라고 한다. 연적하는 권위를 앞세우지 않아서 허투루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나? 그가 끊임없이 너를 괴롭히는데, 사람들은 네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한단 말이다. 혹시 술자리에서 그를 비방한 적은 없었느냐? 그래서 기억을 못 할 수도 있지 않으냐?”
“아버지, 연적하에 대해서는 정말 입도 뻥끗한 적이 없습니다. 한 달 전 식당에서 만난 게 처음입니다.”
“허면 연적하의 지인은?”
“지인요?”
“연적하에게도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니냐. 그의 지인이 누구냐?”
“공지섭 조장과 그의 조원들 외에는 지인이라고 할 만한 인맥도 없습니다.”
“허면 그들과 시비를 일으킨 적이 있느냐?”
“시비라니요. 공 조장과 조원들 대부분이 이대제자입니다. 모두 저의 윗분들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문득 공지유를 떠올린 정덕행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억측에 가깝지만 그녀도 연적하의 지인이라면 지인인 까닭이다.
“왜? 떠오르는 사람이 있느냐?”
“공지유가…….”
“그 아이에게 잘못을 한 일이 있더냐?”
“한 달 전에 공지유가 적안금저에게 잡혀간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연적하가 공지유를 구해 온 일을 두고 사제들과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공지유가 적안금저와 단둘이 한 시진(2시간)이나 있었으니 혼인은 어렵겠다고……. 그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건 걱정이 돼서 그랬던 겁니다.”
“커험! 너야 걱정으로 한 말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흉보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다.”
정원영이 골치가 아픈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비볐다.
제 자식이지만 저건 누가 들어도 뒷담화에 불과했다.
“아버지에게도 흉을 본 것처럼 들리셨습니까?”
“이놈아, 나는 네 아비다. 지금은 내 입장이 중요한 게 아니야. 공지유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지.”
“그러니까, 제가 공지유를 두고 한 말로 이렇게 됐다는 말씀이십니까?”
“꼭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뭐라도 하나씩 수습해 나가는 게 좋겠지.”
“수습요? 설마 공지유를 찾아가 사죄라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눈이 녹을 때까지 계속 오줌이나 지리게? 요즘 너 때문에 내가 얼굴을 못 들고 다닌다.”
“…….”
정덕행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침내 부친의 입에서 오줌 이야기가 나온 걸 보니 인내심의 끝에 다다른 모양이다.
***
그날 점심 무렵, 정덕행은 동문 근처의 찻집으로 공지유를 불러냈다.
점원이 차를 내주고 돌아가자 공지유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보자고 하셨어요?”
“왜는 무슨, 오랜만에 차라도 한 잔 마실까 해서 그러는 거지.”
이런 와중에도 정덕행은 여전히 공지유 앞에서 거들먹거렸다.
그에게 여자란 남자를 보조하기 위한 존재였다.
“오랜만이라뇨? 저는 정 사형과 차를 마신 적이 없는데. 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 해 주세요. 제가 좀 바빠서요.”
공지유는 차에 입도 대지 않고 정덕행을 빤히 보았다.
사실 그의 초대에 응한 것은 오줌싸개라 욕먹고 다니는 그가 불쌍해서다.
그것마저도 거절하면 어디 가서 코 박고 죽을 것처럼 보여 마지못해 응했다.
그런데 마치 친했던 사이처럼 말하니 어이가 없었다.
“겨울에 바쁠 일이 뭐가 있다고? 설마 시집갈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닐 테고.”
“…….”
공지유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꾹 참았다.
“저기요, 사형.”
“왜?”
“사형과 제가 한가하게 차나 마시면서 대화할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혹시 삼 년 전의 그 일 때문이야?”
“가리산에서의 일을 기억은 하시나 보네요?”
“그걸 어떻게 잊겠어? 그렇지 않아도 언제고 사매에게 사과할 생각이었어.”
“아, 그러셨어요?”
공지유는 그를 향한 동정심을 깨끗이 비워 냈다.
그러고 보니 흥분한 야수 앞에 자신을 버려두고 달아난 남자였다.
“오늘 사매를 보자고 한 건 사실 다른 이유 때문이야.”
“뭔데요?”
공지유의 얼굴에 씁쓰름한 미소가 번졌다.
삼 년 전의 일은 ‘사과할 생각이었어’라는 말로 흐지부지 넘어갈 모양이다.
“한 달 전에 사매가 적안금저에게 끌려간 적이 있었잖아.”
“그런데요?”
공지유는 그 일과 정덕행이 무슨 관계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사매가 걱정이 돼서 내가 입방정을 좀 떨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연 대협 귀에 들어갔던 모양이야.”
“연 대엽은 또 왜 나와요?”
공지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덕행의 입방정과 연 대협이 무슨 상관이라고?
그제야 정덕행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우선 사매가 걱정이 돼서 한 말이니까 오해 없이 들어 줬으면 좋겠어.”
“뭐라고 했기에요?”
공지유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저렇게 변명부터 늘어놓는 걸 보니 좋은 소리를 한 것 같지가 않다.
“‘적안금저와 사매가 한 시진이나 함께 있었으니까, 혼인은 좀 어렵지 않겠나…….’라는 식의 이야기를 사제들과 한 적이 있어. 사매가 걱정돼서 한 소리니까 오해하면 안 돼. 내가 사매 좋아했던 거 알잖아?”
“잘 알죠. 좋아한다고 말한 그날, 야수 앞에서 혼자 달아난 분이 사형이었죠.”
“그,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랬던 거야. 천 사부가 그랬잖아. 우리가 한데 모여서 버텨야 한다고.”
“그 전에 동문을 배려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도 하셨죠.”
“여하튼 한 달 전의 일은 정말 사매가 걱정이 돼서 한 말이었어.”
“걱정이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공지유가 돌연 정덕행의 얼굴에 찻물을 확 뿌렸다.
“으앗! 뜨, 뜨, 뜨…….”
정덕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두방정을 떨었다.
깜작 놀란 점원이 마른 헝겊을 들고 달려왔다.
정덕행은 점원이 건넨 헝겊으로 얼굴과 상체의 물기를 대충 닦아 냈다.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하마터면 델 뻔했잖아!”
“아쉽네요. 조금 빨리 말하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확실하게 데었을 텐데.”
“…….”
공지유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정덕행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기왕 꺼낸 이야기는 잘 마무리 지어야 했다.
“하아! 좋아. 이제 네 분이 풀렸냐?”
“글쎄요. 사형은 세 치 혀로 내 인생을 갈기갈기 찢었어요. 그에 반해 사형은 찻물을 뒤집어 쓴 게 전부죠. 내 분이 풀렸을 거라고 생각해요?”
“찻물이 전부라고? 내가 죽을 만큼 수치를 당하고 있는 건 안 보여?”
“무슨 수치요? 아하, 오줌을 지리는 거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요?”
공지유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제야 정덕행이 자신을 불러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연적하가 정말 정덕행의 말을 들었을까?
뜬금없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것만도 아니었다.
두 사람이 자경단에 가입한 건 한 달 전의 그 일 이후였으니까.
순간 공지유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연적하의 귀에 그런 추잡한 소리가 들어갔다.
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정덕행이 조심스레 말했다.
“연 대협이 나를 괴롭히는 이유가 아무래도 너 때문인 것 같다. 그것 외에는 달리 이유가 없어.”
“그래서요?”
“아버지가 그러시더라. 내가 걱정돼서 한 소리라도, 흉보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고.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냐?”
“자신에게는 참 관대하시네요. 사람을 죽여 놓고 오줌 몇 번 지린 것으로 충분하다고요?”
“내가 누구를 죽였는데?”
“나요. 사형은 나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어요!”
“사매가 화를 내는 건 이해해. 하지만 나 혼자만 그런 소리를 한 건 아니야. 지금도 뒤에서 별소리를 다 한다고. 그런데 왜 나만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건데?”
“그냥 팔자려니 생각하세요.”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냐?”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만 적안금저에게 끌려갔잖아요. 사형도 그날의 나와 같은 거예요.”
“하지만 사매는 적안금저에게서 풀려났잖아. 나도 연 대협의 손에서 풀어 줘. 부탁이야.”
“연 대협이 그러는 게 정말 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것 외에 내가 연 대협에게 찍힐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어서 그래.”
공지유는 죽을 것처럼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 달콤했다.
자신을 위해 연적하가 분노해 주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정덕행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자신은 그렇게 함부로 짓밟아도 되는 여자가 아님을.
“사형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면서, 용서는 연 대협에게 받으려고 하네요?”
“흉보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고 설명했잖아.”
공지유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덕행은 늘 저런 식이다.
자기가 왕인 양 늘 통보하듯 말하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변명으로 일관한다.
삼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과라는 걸 모른다.
“겨울에 바쁠 일이 뭐가 있냐고 했었죠? 시집갈 준비라도 하는 거냐고. 바쁜 이유를 알려 드리죠. 삼 년 전 사형처럼 나도 소요종의 ‘비승과해’를 준비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내 차례거든요. 삼 년 전에 사형이 그랬죠? 소요종 제자가 돼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나도 그래요. 소요종 제자가 되어도 정 사형이 한 짓은 잊지 않을게요.”
“네, 네가 ‘비승과해’에 간다고?”
“그래요. 곡 사형 다음이 나니까, 내년 봄에는 내가 갈 차례예요.”
“험, 그랬구나. 여자 혼자서 불우산까지 갈 수 있겠느냐? 남자에게도 쉽지 않은 길인데.”
“소요종의 여제자들이 들으면 참 좋아할 소리를 하시네요? 소요종 제자들 중에 여자들도 꽤 많다는 거 알고 하는 소리죠?”
“무, 물론 알다마다. 그분들이 아니라 너를 두고 한 말이었다. 아, 너를 무시해서 그러는 게 아니니 오해는 말고. 그저 걱정이 돼서 해 본 소리다.”
“알아요. 나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다 오해죠.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요.”
“뭘?”
“삼 년 전에 사형이 물었었죠? 사형이 싫다니까, 왜 싫으냐고. 그때는 그냥 싫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알겠어요. 혹시 이유를 듣고 싶으세요?”
“뭔데?”
“첫째 자기 주제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거. 둘째 잘못을 하고도 사과할 줄 모르는 거. 셋째 그런 소리를 남의 이야기처럼 흘려 듣는 뻔뻔함. 그런 게 참 싫네요.”
“……오해다.”
공지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연 대협에게 모두 오해라고 잘 말씀드릴게요. 나도 내 복수를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는 않거든요. 물론 연 대협이 정말 그 일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지유는 정덕행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후 찻집을 나갔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정덕행이 중얼거렸다.
“공 사매의 차례라고? 현천문을 대표하려면 덕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