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53
553회. 비움과 채움의 차이
영천주.
청산성.
낙일현 유명산.
무망각(无妄閣).
염소수염의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연공 삼매경에 빠져 있다.
한 달 전 옥청 진인의 제자가 된 구천노도 심통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몸은 바닥에서 한 뼘쯤 허공에 떠 있었다.
이른바 부공삼매(浮空三味).
내공의 극치에 이른 사람들의 연공에서나 볼 수 있다는 그 현상이다.
전각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심통은 슬쩍 반개하고 있던 눈을 떴다.
곧이어 문을 열고 옥청 진인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스승님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심통은 무심코 옥청 진인에게 읍(揖)을 해 보였다.
그러자 옥청 진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무슨 인사법이냐? 손으로 손을 왜 가려?”
“아, 이건 제가 살던 마을에서 쓰는 인사법입니다. 상대에 대한 공경을 뜻하지요.”
“그래? 난 또 손바닥 안에 뭔가 감추고 있는 줄 알았다. 괜한 오해를 받지 않으려거든 다음부터는 하지 말아라. 나야 이해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암수(暗數, 속임수)를 쓰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느니라.”
“예.”
“천뢰종의 제자는 설사 종사를 만난다 해도 가벼운 묵례로 족하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심통은 속으로 천박한 예법이라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잠시 후 옥청 진인이 품 안에서 은색의 환단을 꺼내 심통에게 내밀었다.
“장생불사곰의 쓸개로 만든 ‘천뢰선단’이다. ‘원영’의 경지에 들면 소용이 없지만 ‘연허’의 너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게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심통은 황송한 얼굴로 천뢰선단을 받았다.
보름 전에 먹은 영물의 내단만 해도 분에 넘치는데 또다시 선단이다.
뭐 하나 해 준 것 없이 일방적으로 받으려니 송구스러울 정도다.
“지금 복용하고 운기를 해 보거라.”
“예.”
심통은 망설임 없이 천뢰선단을 입에 넣었다.
천뢰선단은 침에 닿자마자 부드럽게 녹아 아무런 걸림 없이 목울대를 넘어갔다.
이윽고 강맹한 뇌기가 십이경맥과 기경팔맥을 야생마처럼 내달렸다.
영물의 내단이 묵직하다면 천뢰선단은 짜릿했다.
심통은 즉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옥청 진인이 가르쳐 준 흡자결을 운영했다.
역시나 단전으로 뇌기가 한 점 남김없이 빨려 들어왔다.
영물의 내단 때 느낀 바 있지만 흡자결은 정말 대단한 신공이다.
강호의 심법들은 몇 날 며칠을 운기조식해야 겨우 약성의 일부를 흡수할 수 있는데, 흡자결은 그 모든 걸 한순간에 해내 버린다.
천뢰선단의 기운을 받아들이자 구천기가 한차례 요동쳤다.
단전에서 뇌성벽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르르릉-.
심통은 삼백 자 법문이 아닌 흡자결로 부지런히 천뢰선단을 갈무리했다.
삼백 자 법문이 아닌 흡자결을 사용한 이유는 욕심 때문이다.
삼백 자 법문보다 흡자결로 흡수하는 게 빨랐다.
삼백 자 법문과 흡자결을 모두 익힌 심통은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삼백 자 법문의 요결은 ‘비움’에 있다.
‘허심(虛心)’으로 기다리면 채워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삼백 자 법문으로 뭘 하려면 먼저 허심, 즉 비워 내야 했다.
그에 반해 흡자결은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기다릴 필요조차 없다.
흡자결을 외우는 순간, 마치 음식을 씹어 삼키기라도 하듯 단전이 채워졌다.
흡자결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내단, 선단은 물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영기까지도 빨아들인다.
그러니 시간에 쫓기는 심통이 삼백 자가 아닌 흡자결을 택한 건 당연했다.
둥실-.
심통의 몸이 허공으로 한 자(약 30센티)나 떠올랐다.
심통의 귀에만 들리던 뇌성벽력은 이제 옥청 진인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커졌다.
옥청 진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허어! 영물의 내단과 천뢰선단 한 알로 연허 십 성(十成)이라니!’
아무리 흡자결이 대단하다 해도 저건 가공할 속도다.
자신은 물론, 흡자결을 익힌 어떤 종문제자도 심통처럼 진전이 빠르지는 않았다.
‘어쩌면 원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구나.’
‘연허 십 성’ 다음은 ‘원영’이다.
‘연허’에서 ‘원영’으로 넘어가는 것은 개인의 자질에 달린 터라 언제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하루 만에 원영이 될 수도 있지만, 십 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일 수 있다.
옥청 진인은 심통이 죽지 않고 ‘원영’에 오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물론 그가 익힌 공법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마침내 천뢰선단의 기운을 모두 갈무리한 심통이 눈을 번쩍 떴다.
심통의 두 눈에 시퍼런 뇌전이 맺혔다가 이내 스르륵 사라졌다.
“연허 십 성에 도달했구나. 내 평생 너와 같이 빠른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난 심통은 옥청 진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모두가 스승님 덕분입니다.”
“‘연허 십 성’에 도달했으니 지금의 네 육신으로 더는 이룰 것이 없다. 이제 부지런히 수련하여 ‘원영’의 경지에 오르도록 해라.”
“‘원영’의 경지란 대체 어떤 것입니까?”
“내 너에게 천뢰종의 상급 검법인 천지뢰행(天地雷行)을 가르쳐 주겠다. 그것은 ‘의형검강’의 깨달음이 있어야 가능한 검법이니라.”
“의형검강요?”
“백 번 듣는 것보다는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밖으로 나가자꾸나.”
전각에서 나간 옥청 진인은 심통을 데리고 가까운 봉우리로 올라갔다.
그리고 검을 뽑아 허공에 가볍게 그었다.
우르릉-.
우렛소리가 나더니 하늘에서 시퍼런 뇌전이 사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굵기가 굵고 선명한 게 한눈에 봐도 검강이다.
검강으로 만들어진 일백여 개의 뇌전이 맞은편 바위 절벽에 꽂히자 천 지가 진동했다.
쿠쿠쿠쿠쿵-.
곧이어 바위 절벽이 한 꺼풀 흘러내리며 ‘천지뢰행’이라는 네 글자가 드러났다.
가공할 검법의 위력에 심통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지금까지 연적하의 검법을 최고로 알았는데 그건 우물 안 개구리였다.
연적하라 할지라도 저런 신위를 보이지는 못하리라.
그런 검법을 자신이 배우게 되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네가 ‘천지뢰행’의 검강을 하나라도 구현할 수 있다면 ‘원영’에 오른 것이다.”
심통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스승이 보여 준 백여 개는 어렵겠지만 하나라면 어찌어찌 가능할 것도 같았다.
***
조양성.
산음현.
현천문.
객사.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쉬고 있는 연적하에게 공지유가 찾아왔다.
“연 대협. 잠깐 시간 되시나요?”
“네, 왜요?”
“여쭤 볼 게 있어서요.”
“뭔데요?”
자신과 관계된 이야기인 지라 잠시 머뭇거리던 공지유는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혹시 정 사형을 자경단으로 부르신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이유요?”
“네. 있다면 알고 싶어서요.”
“왜요? 정 형의 일로 공 소저에게 누가 뭐라고 했어요?”
“이런 건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죠?”
언제 고민했냐는 듯 공지유가 단단한 눈으로 연적하를 응시했다.
“그야 물론이죠. 무슨 일인데 그래요?”
“어제 정 사형이 저를 따로 만나자고 해서 만났어요. 정 사형이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연 대협이 알게 된 것 같다고. 저는 아닐 거라고 했지만 정 사형은 제 말을 믿지 않았어요.”
“…….”
연적하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듣기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공지유는 알 수 있었다.
연적하의 어색한 표정을 보니 정덕행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달콤하면서도 씁쓰름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그건 정 사형이 저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대요. 그러니 연 대협의 오해를 풀어 달라고…….”
“오해래요? 야수에게 팔 하나쯤 먹혀 봐야 정신을 차릴 사람이네요.”
“연 대협.”
“네?”
“연 대협이 저의 일을 대신해서 해결해 주면, 제가 자꾸 의지하려 들지도 몰라요. 그럼 안 되잖아요?”
공지유가 조금은 기대 어린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이럴 때 그가 ‘의지해도 된다’고 말해 준다면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연적하는 그러지 않았다.
“당연히 안 되죠.”
단호해서 차갑게 느껴질 정도다.
이 한겨울에 차가운 얼음물 한 사발을 들이켠 기분이다.
공지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 대협이 보시기에 답답하겠지만 제 일은 제가 처리하고 싶어요.”
“아! 제 생각이 짧았네요. 공 소저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내 눈에 거슬려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들 겸 데리고 다녔던 거예요. 공 소저가 원한다면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을게요.”
심지어 관여하지 않겠단다.
공지유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이런 말 하면 조금 이상하지만, 정 사형은 저에게 보약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를 떠올리면 꼭 소요종의 제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꼭 되세요.”
“네, 연 대협도요.”
이야기가 정리되자 공지유는 묵례를 하고 물러갔다.
홀로 남겨진 연적하는 딱히 할 일이 없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낯선 세상에 홀로 남겨져서 그런지 애쓰지 않아도 금방 허심이 찾아왔다.
티끌처럼 구천기가 쌓였다.
그가 호흡에 집중한 동안 창문 밖으로 다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정오.
동문.
정덕행은 오전 내내 천막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공지유에게 사정을 했으니 오늘 뭔가 반응이 와야 정상이었다.
그가 바짝바짝 말라 가는 입술을 연신 침으로 적실 때다.
언제 가져다 놨는지 모를 평상에 길게 누워 있던 연적하가 손짓했다.
“정 형.”
정덕행은 한달음에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예.”
“좀 어때? 이제 부족한 게 좀 채워진 것 같아?”
그의 부드러운 음성에 자경단원들이 의아한 얼굴로 둘을 힐끔거렸다.
부족한 게 채워지다니?
아직도 야수와 대면하면 다리부터 떠는 정덕행이 그럴 리가 있나?
그런데 정덕행의 생각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예! 채워졌습니다.”
자경단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연적하가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말을 했다.
“내 생각에는 아직 아닌 것 같은데, 정 형이 채워졌다니 채워진 거겠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이후로는 정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자경단에 남고 싶으면 남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
“정말 떠나도 됩니까?”
“왜? 자경단에 남아서 야수를 잡고 싶어?”
“…….”
정덕행은 자경단원들 앞이라 차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아직 안 채워진 거 아냐? 왜 아니라는 말을 못 해?”
연적하의 말에 자경단원들이 ‘킥킥’거렸다.
사실 자경단은 모두가 자원한 강골들이라 억지로 끌려온 정덕행과는 맞지 않았다.
정덕행도 자경단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아 양측은 물과 기름 같았다.
그러니 작별의 순간에도 서로를 소 닭 보듯 했다.
“아닙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 연로한 부모님을 모셨으면 합니다.”
“효자 났네? 가 봐.”
“예.”
정덕행은 연적하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에 도망치듯 자경단을 떠났다.
서문.
그 시간 한 청년이 서문으로 진입했다.
폭설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는 눈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고지식한 데다 눈썰미까지 없는 관병 하나가 창대로 그의 앞을 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요?”
순간 몸통에서 분리된 관병의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실로 섬전 같은 손놀림이다.
대경실색한 관병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청년을 지켜보기만 했다.
“종문 제자에게 날붙이를 들이대면 이 꼴 나는 거야. 잘 봐 두라고.”
관병들은 감히 따지지 못하고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던 청년은 휘적휘적 안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