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55
555회. 빙설화, 웃지 않는 꽃
문득 구회일의 뇌리로 ‘호랑이가 산을 내려가면 개에게도 괴롭힘을 당한다’는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딱 그랬다.
천지종 최고의 기재가 수약주의 변두리에서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다.
본래 구주를 떠도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다.
자신은 천지종 최고 기재로 구주의 종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청년 고수……였다.
정확히 지난해까지 그랬다.
작년 봄 빙설화(氷雪花)가 입문하기 전까지 자신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였다.
비천봉에서 수련 중이라 종문의 소식에 어두웠다.
설사 칩거하지 않았어도 몰랐으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의 일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름에 접어들면서부터 그럴 수 없었다.
잊을 만하면 ‘현인’인 진명존자가 자신의 스승을 찾아와 새로 얻은 제자를 자랑했다.
종문에서 ‘존자(尊者)’라고 불리는 ‘현인’들은 여간해서 제자를 거두지 않는다.
더구나 까다롭기로 소문난 진명존자가 여제자를 거두다니?
누군지 궁금했지만 진명존자는 빙설화를 꼭꼭 숨겨 두고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잊을 만하면 비천봉으로 달려와 스승인 일성존자에게 제자 자랑을 늘어놓았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빙설화는 일문십지(一問十知)로도 부족한 아이라오. 하나를 들으면 정말로 열을 깨달으니. 의기발현(意氣發顯, 검의를 끄집어내는 것)의 이치를 설명해 주자 초급 검법으로 의형검기(意形劍氣, 검의를 검기로 형상화하는 것)를 펼치지 뭐요.”
‘의기발현’은 갓 입문한 ‘연단’의 제자들이 배우는 검공이고, ‘의형검기’는 ‘연허’의 제자가 익히는 검공이다.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의기발현’이 ‘뿌리’라면 ‘의형검기’는 거기서 뻗어난 ‘가지’와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진명존자의 자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중급 검법인 추일검(追日劍)의 검결을 가르쳤소. 그랬더니 하루가 가기 전에 대성(大成)을 해 버리더이다.”
백번 양보해 그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의형검기까지 갔으면 중급 검법 하나쯤은 대성하는 게 당연하니까.
“그래서 하루에 하나씩 총 열 개의 중급 검법을 가르쳐 보았소. 그랬더니 열흘 만에 열 개의 중급 검법을 대성하더이다. 내가 거두었지만 이제는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소.”
반선(半仙)인 ‘원영’의 고수들도 중급 검법을 열 개나 익히고 있지는 않다.
아니 못한다.
재능의 문제라기보다 시간이 부족해서다.
그런 이유로 종문에서는 종문이 보유한 무공의 절반쯤만 가르쳤다.
‘원영’까지 익힐 수 있는 검법은 총 서른 개.
세부적으로 보면 초급 검법이 열 개, 중급 검법이 열 개, 상급 검법이 열 개다.
천지종 최고 기재 소리를 듣는 자신은 모두 열다섯 개의 검법을 익혔다.
그것만으로도 ‘미친 재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뭐? 입문한 지 고작 반년인 빙설화가 열흘 동안 중급 검법 열 개를 대성했다고?
허언도 그런 허언이 없다.
그런데 귀가 따갑도록 빙설화의 이름을 들어서일까?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진명존자가 꼭꼭 감추었음에도 그녀에 관한 소문은 은밀하게 돌아다녔다.
-천상의 꽃처럼 아름다운데 웃지를 않아 빙설화로 불린다.
-그게 무엇이든 단 한 번 보거나 들으면 외워 버린다. 그녀에게 두 번은 없다. 심지어 상급 검법 천붕낙월(天崩落月)의 일만 자 검결도 한 번에 외웠다.
-신안(神眼)을 가지고 있어 그녀의 앞에서는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
-‘연단’에 하루, ‘연허’는 열흘, ‘원영’은 백 일이 걸렸다. 천 일이면 ‘독요’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종문의 역사는 빙설화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될 것이다.
그중에는 ‘빙설화에 비하면 구회일은 양민(良民)이다.’처럼 자신과 관계된 이야기도 있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천재라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질투심보다 호기심이 더 강하게 일어났다.
빙설화는 대체 어떤 여자일까?
그런 놀라운 재능을 가졌으면서 왜 스물다섯에 입문한 걸까?
관심의 씨앗은 부지불식간에 뿌리를 내리고 거목으로 자라났다.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있다.
늦가을 즈음이었을 게다.
‘천지종에서 자신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은 빙설화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은.
비천봉을 떠난 것은 그녀를 위해서였다.
피부의 노화(老化)를 막아 준다는 영물, 금와(金蛙, 금두꺼비)를 잡아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금와라면 빙설화를 찾아갈 명분으로 부족함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무량하를 따라 동쪽 끝 천관산맥까지 둘러보았지만 허탕이었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좋을 리가 없다.
그 답답함은 무례한 관병의 목을 자르고, 건들거리는 귀문방도들을 참살했음에도 풀리지 않았다.
구회일은 스산한 눈으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면, 죽을 수밖에 없다. 아니 죽어 마땅하다.
그를 무참하게 찢어발김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구주의 종문에 알릴 것이다.
천지종의 구회일이 어떤 존재인지를!
살육의 욕구가 걷잡을 수 없게 치밀어 올랐다.
번들거리는 그의 눈빛은 피에 굶주린 마천(魔天)의 악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천지종의 구회일이다. 너는 누구냐?”
“나? 석경장의 연적하다. 천지종 사람이 왜 수약주의 호구조사를 하고 다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
막 등 뒤의 검을 뽑으려던 구회일이 멈칫했다.
당연히 소요종의 제자려니 생각했는데 석경장은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상관없지.’
그게 거짓이건, 진실이건 결과는 같다.
죽인다.
구회일은 연적하의 출신 사문에 대한 관심을 접고, 천천히 검을 뽑았다.
‘정말 은급 야수를 죽인 놈이라면 중급 검법은 통하지 않으려나.’
그렇다고 천하의 구회일이 어린놈에게 처음부터 상급 검법을 쓰기도 뭐하다.
그거야말로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니까.
그가 상대를 요리할 방법을 두고 잠깐 고민할 때다.
방금까지 뚱한 얼굴로 앉아 있던 연적하가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연이어 등 뒤에서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검기가 날아왔다.
쉬이이익-.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구회일은 다래원의 지붕을 뚫고 위로 솟구쳐 올랐다.
콰르르르.
다래원의 천장 중앙에 구멍이 뻥 뚫리며 쌓여 있던 눈덩이가 이 층 실내로 쏟아져 내렸다.
맛있게 점심을 먹던 손님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깜짝 놀란 이 층 손님들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달아났다.
다래원이 무너질 듯 진동하자 일 층의 손님들도 뒤늦게 탈출 대열에 동참했다.
연적하는 창문을 통해 지붕 위로 쾌속하게 날아올랐다.
구회일은 상대가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감히!”
그는 연적하가 자신에게 먼저 손을 썼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지금까지 만난 적은 모두 수동적이었다.
적당히 무마되었으면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그들의 발목을 잡아서다.
그러다 죽은 사람도 있고, 병신이 된 사람은 셀 수도 없다.
하지만 어떤 적도 눈앞의 연적하라는 놈처럼 적극적이지 않았다.
구회일은 검법을 고를 틈도 없었다.
그래서 가장 몸에 익은 검법인, 추일검법(追日劍法)을 사용했다.
추일검법은 중급 검법으로 분류되지만 위력은 상급 검법 못지않아 ‘원영’에 오른 뒤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중급과 상급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익힌 검법이기도 했다.
구회일의 검 끝에서 태양처럼 눈부신 광구(光球)가 튀어나왔다.
번쩍!
‘헉!’
폭발적인 빛에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은 연적하는 어기충소의 수법으로 솟구쳐 올랐다.
까마득한 허공까지 올라가자 겨우 사물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위기는 해결되지 않았다.
예의 그 광구가 자신을 집어삼킬 듯 떠오르고 있었다.
하필 그때 한계에 도달한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연적하는 실눈을 뜨고 광구를 노려보았다.
잠깐 구천세법 팔 식 구룡번신을 떠올렸지만 이내 떨쳐 냈다.
구회일의 무위를 생각하면 피한다고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제길! 뒤통수를 내줄 수는 없지.’
그럴 바에야 얼핏 무모해 보이지만 정면 승부가 낫다.
연적하는 즉시 구천구검 일 식 현녀강림(玄女降臨)의 수법으로 광구를 찔러 갔다.
이윽고 만변(萬變)의 변화를 담은 청사와 태양처럼 빛나는 광구가 공중에서 마주쳤다.
꽈광!
귀청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연적하의 몸이 뒤로 튕겨 났다.
훌훌 날아가던 연적하는 이름 모를 전각의 벽을 뚫고 들어가 버렸다.
한편 구회일도 위에서 가해진 충격에 다래원 지붕을 뚫고 이 층으로 뚝 떨어졌다.
“이익!”
구회일은 이 층 바닥에 닿자마자 다시 지붕을 부수고 위로 날아올랐다.
그의 발이 막 다래원 지붕에 닿았을 때다.
난리통에 대들보가 부러졌는지 다래원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순간 구회일은 당황하지 않고 연적하가 처박힌 전각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때다. 전각의 벽을 뚫고 연적하가 튀어나오며 청사를 던졌다.
쉬이익-.
깜짝 놀란 구회일은 검으로 파란 광망에 휩싸인 단검을 힘껏 쳐 냈다.
채앵-.
맑은 쇳소리와 함께 단검이 튕겨났다.
구회일은 연이어 빈손으로 서 있는 연적하에게 진검강(眞劍罡)을 뿌렸다.
깊은 바다처럼 시퍼런 강기가 연적하의 허리를 양단할 듯 날아갔다.
연적하는 감히 맞받아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옆으로 훌쩍 피했다.
콰콰콰콰-.
거대한 전각이 상하로 분리되는가 싶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구회일이 미꾸라지처럼 피한 연적하에게 다시 한번 손을 쓰려고 할 때다.
돌연 뒤통수에서 섬뜩한 느낌이 전해졌다.
구회일은 돌아볼 틈도 없이 뒤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중급 검법인 단사천벽(單紗天壁)이다.
검이 지나간 자리에 ‘검사(劍絲)’가 그물처럼 번지는가 싶더니, 검사로 된 벽[劍壁]나타났다.
가가가각-.
단사천벽에 박힌 청사는 용을 썼지만 검사를 뚫지 못했다.
뒤늦게 청사를 본 구회일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벽을 펼치지 않았다면 당하는 것은 자신이었으리라.
‘하아! 내 진검강을 피하는 와중에 이기어검으로 뒤를 노렸다고?’
연적하는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적들 중에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아니 그보다 어떻게 반선인 나와 호각지세로 싸울 수가 있지? 그게 가능한가?’
비록 자신이 그를 몰아붙이고는 있지만, 그도 확실히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임기응변의 마구잡이가 아니다.
놈의 반격은 너무도 치명적이라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자신이 당할 판이다.
‘미친! 소요종에 저런 놈이 있다고?’
아무래도 자신의 칩거가 너무 길었던가 보다.
그는 연적하를 ‘소요종에서 비밀리에 키우고 있는 기재’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거목으로 자라기 전에 뿌리째 뽑아야 한다.
‘결국 상급 검법을 쓰게 만드는군.’
‘원영’의 ‘반선’들이 익히는 상급 검법은 ‘의형검강’을 기반으로 한다. ‘검기’나 ‘검사’가 아닌 궁극의 ‘진검강’으로 검의(劍意)를 드러내는 것이 ‘의형검강’이다.
그리고 ‘의형검강’은 ‘의형검강’으로 상대해야 한다.
연적하가 자신처럼 ‘원영’의 경지에 들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구회일은 가장 공들여 익힌 상급 검법, 천붕낙월(天崩落月)의 검결 일만 자를 떠올렸다.
우우웅-.
가공할 암경이 그와 연적하의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말 그대로 하늘이 무너지고[天崩], 달조차 떨어뜨릴[落月]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