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61
561회.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겁니까?
산음현.
북문 근처 갑자방(甲子坊).
산음현에는 번화한 곳이 셋 있다.
첫째는 현청이 자리한 직지방(直指坊), 둘째는 월명호수 인근의 소양방(小陽坊), 그리고 셋째가 갑자방이다.
그곳들의 점포에서는 술과 음식은 물론 의류, 가구, 농기구, 각종 병기 등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다 팔았다.
그러다 보니 항상 오가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지금은 겨울이라 도시 전체가 적막했지만 그래도 상점가만큼은 예외였다. 물론 봄, 여름, 가을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평화롭던 갑자방이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송아지만 한 혈랑(血狼)들이 떼 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 점포에나 뛰어들려 했지만 누구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점포 안이라고 안전한 것은 아니다.
혈랑이 앞다리를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 점포 문은 산산조각 났다.
그러면 비명과 함께 새로운 사람들이 죽음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갑자방 대표 정경우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호위들과도 떨어진 그는 위태로운 와중에도 부지런히 좌우를 살폈다.
포식자인 혈랑들로부터 몸을 보호할 장소를 찾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그의 눈에 석재상이 보였다.
석재로 가게를 둘렀으니 산음현에서 가장 튼튼한 곳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정경우만은 아닌 모양이다.
사람들이 우르르 석재상으로 몰려갔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석재상의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이보시오! 문 좀 열어 주시오!”
“살려 주세요!”
사람들의 간절한 외침에도 반응이 없었다.
사실 점포 주인들이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다.
굶주림에 미쳐 날뛰던 야수들은 배가 채워지면 다시 제가 살던 산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누군가 야수의 배 속으로 들어가야 끝날 일이었다.
점포 주인들은 야수가 거리의 사람들만 잡아먹고 떠나기를 바랐다.
석재상 주인 금산도 그런 이유로 문을 열지 않았다.
마음이야 아프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가족이 야수의 먹이가 될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사람들은 욕을 하며 떠나갔다.
하지만 정경우는 그러지 않았다.
문 앞에 진 치고 있던 사람들 중에 절반이 떠났을 때 그가 나섰다.
“금 형제, 날세. 문 열게.”
문을 등지고 서 있던 금산이 흠칫 놀란 얼굴로 돌아섰다.
귀에 익은 저 굵직한 목소리는 갑자방의 대표인 정경우가 분명했다.
그래도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버텼다.
정경우가 아니라 현령의 말이라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야수의 숫자를 생각하면 거리의 사람들이 다 잡아먹혀야 했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사람이 모여 있으면 야수가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그러니 문을 열 수 없었다.
억지로 외면하고 있는 그의 귓가로 정경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금 형제가 문을 열어 주지 않고 내가 살아나면, 후과를 감당할 수 있겠나?”
협박이었다.
순간 금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만약 정경우가 이일로 자신에게 원한을 품게 된다면?
산음현에서 먹고살기는 틀렸다고 봐야 한다.
그는 산음현 최고의 부자이자 갑자방의 대표, 석재상 하나 문 닫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정경우가 살 수 있을까?
거리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아!’
평화로운 시기에는 문 밖의 야수들만큼이나 무서운 게 가진 자들이다.
결국 금산은 내렸던 빗장을 들어 올렸다.
정경우와 문 밖에 남아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빗장부터 내걸라고 했다.
그들 역시 더 이상 석재상에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원치 않았던 것이다.
씁쓰름한 얼굴로 서 있는 금산에게 장경우가 다가갔다.
“고맙네. 오늘의 은혜는 잊지 않음세. 갑자방이 정상화되면 자네의 편의를 봐 주겠네.”
“감사합니다. 그걸 위해 문을 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돕고 살아야지요.”
“훌륭한 마음가짐이네.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의로운 일을 했어. 좋은 일이 있을 걸세.”
정경우는 금산이 선의로 문을 연 것처럼 그를 칭찬했다.
어차피 말에는 돈이 들어가는 게 아니니까.
정경우가 금산의 비위를 맞춰 주고 있을 때 문 밖에서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정경우는 입을 다물었다.
정경우는 저주받은 지옥의 혈랑이 석재상을 그냥 지나쳐 가기를 바랐다.
또다시 죽음이 난무하는 거리로 내쫓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야수의 코를 속일 수는 없었다.
굶주린 혈랑에게 인간으로 가득한 석재상은 식량 창고와도 같았다.
“크릉!”
단 한 번의 발짓으로 두꺼운 문짝이 박살났다.
정문이 떨어져 나가자 사람들은 막아 두었던 창문과 뒷문을 열고 밖으로 달아났다.
그런 사람들의 뒤를 혈랑이 덮쳤다.
석재상 앞마당을 가로지르던 정경우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철퍼덕 넘어지고 말았다.
곧이어 혈랑이 그의 등판을 앞발로 지그시 누르고 길게 울었다.
아우우-.
정경우는 일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혈랑의 힘을 당해 내지 못했다.
혈랑은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바로 그를 죽이지 않고 할짝거렸다.
죽음을 예감한 정경우는 필사적으로 소리 질렀다.
“사람 살려! 살려 주시오!”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혈랑이 정경우의 뒷덜미를 살짝 물었다.
정경우는 어깨를 움츠리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그가 침묵하자 혈랑은 목덜미에서 입을 뗐다.
그제야 정경우는 혈랑이 소리에 민감함을 알고 숨소리조차 죽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조금 가라앉았던 혈랑의 눈빛이 다시 광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가까운 곳에서 동족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혈랑은 가지고 놀던 먹이를 죽이고 달려갈 생각으로 입을 쩍 벌렸다.
혈랑이 막 정경우의 뒷덜미를 물어갈 때다.
거리 저 끝에서 사람 하나가 바람처럼 혈랑의 앞으로 달려왔다.
연적하였다.
그는 멈춰 서기도 전에 다짜고짜 청사를 휘둘렀다.
혈랑의 숫자가 많아 서둘러야 했기에 주변 확인은 나중이었다.
가가가각-.
처음부터 검강을 사용하자 뼈 갈리는 소리와 함께 혈랑의 머리가 툭 떨어졌다.
촤아아-.
정경우의 뒤통수로 혈랑의 피가 쏟아져 내렸다.
“악! 으아아악!”
엎드려 있던 정경우는 그게 제 피인 줄 알고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러 댔다.
보다 못한 연적하가 그를 누르고 있는 혈랑의 몸통을 발로 차며 말했다.
“아저씨, 늑대는 죽었으니까 안심해요.”
등을 찍어 누르던 힘이 사라지자 정경우는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자신을 핥아대던 혈랑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는 돌아선 청년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갑자방의 대표인 정경우라 합니다. 은인의 존성대명을 가르쳐 주십시오! 은혜를 꼭 갚고 싶습니다!”
못 들은 척하고 떠나려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갑자방의 대표 정경우란다.
돌아선 연적하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어라? 정경우라는 개만도 못한 놈이 당신이었어? 내가 누구냐고? 석경장의 장주 연적하야. 지금은 잠시 현천문의 객사에 머무르고 있어. 깨끗이 목 씻고 기다려. 늑대들부터 처리하고 손봐 주러 갈 테니까.”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정경우의 입이 쩍 벌어졌다.
현천문의 연적하라면 어지간한 종문 제자보다 강하기로 소문난 고수였다.
그런 그가 왜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낸단 말인가?
“대, 대협, 저는 대협을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대협의 존성대명을 입에 올린 적도 없고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오해가 분명합니다.”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 하지 말고. 정 궁금하면 현천문의 소 문주에게 물어봐. 그 인간도 사지를 부러뜨리려다가 봐줬으니까.”
말을 마친 연적하는 유령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정경우는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옆에 뒹굴고 있는 혈랑의 거대한 머리통이 아니었다면 꿈이라 믿었을 지도 모르겠다.
마수(魔獸)인 혈랑의 발밑에 깔리고, 연이어 연적하에게 협박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우우우-.
우우-.
갑자방 곳곳에서 혈랑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유 만만하던 처음과 달리 어딘지 쫓기는 듯한 느낌이 물씬 전해진다.
보나 마나 연적하 때문이리라.
곧이어 거리에 한 무리의 혈랑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정경우는 급하게 뒷걸음질 치다가 눈길 위에 엉덩이를 찧고 말았다.
하지만 혈랑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무려 십여 마리의 혈랑들은 놀란 황소 떼처럼 미친 듯 북문으로 달려갔다.
혈랑들이 왜 그러는지 정경우는 곧 알게 되었다.
한 자(약 30센티)가 못 되는 단검이 뒤처진 혈랑의 몸통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한순간이라도 뒤처지면 죽으니 필사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갈 수밖에.
갑자방을 피로 물들였던 혈랑이 모두 사라졌다.
거리가 잠잠해지자 사람들도 점포 문을 열고 하나 둘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밝은 얼굴과 달리 정경우는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퍼붓다가 사라진 연적하 때문이다.
‘현천문의 소 문주에게 물어보라고? 뭘? 연적하에 대해서 입도 뻥끗한 적이 없는데.’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는 그에게 금산이 다가갔다.
“정 대인,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현천문의 연 대협께서 혈랑을 물리쳤다고 하네요. 이번 겨울은 어찌어찌 넘어갈 것도 같습니다.”
“…….”
심사가 복잡한 정경우는 대답하지 않고 급히 발걸음을 떼었다.
현천문의 소 문주를 찾아가려는 것이다.
“정 대인?”
금산이 황당한 얼굴로 불렀지만 정경우는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갔다.
***
산음현.
현천문.
정경우는 곧바로 현천문주를 찾아갔다.
언제 연적하가 찾아와 해코지할지 모르니 이유라도 알아 두어야 했다.
“……은혜라도 갚자는 마음에 그의 이름을 묻자 돌연 화를 내더이다. 그리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을 했소. 개만도 못한 놈이라느니, 목을 씻고 기다리라느니. 솔직히 나는 오늘 처음으로 연 대협을 보았소. 그래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했더니, 궁금하면 소 문주에게 물으라 하더이다. 소 문주는 혹시 내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오?”
정경우가 뜨거운 눈으로 소천우를 보았다.
왜 연적하에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예, 연 대협이 무슨 일로 그러는지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요? 뭡니까? 그게? 그를 알지도 못하는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겁니까?”
정경우는 말하면서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며칠 전 소월루에서 저와 한잔하신 거 기억나십니까?”
“그게 왜요?”
“그날 정 대인이 ‘비승과해’를 두고 하신 말 때문입니다. 공지유의 행실이 좋지 않으니 다른 제자를 보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순간 정경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헉! 혹시 연 대협과 공지유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겁니까? 아니! 그런 일이 있으면 진즉에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셨어야지요!”
정경우가 버럭 소리 지르며 탁자를 내리쳤다.
공지유의 얼굴이 반반하고, 연적하도 혈기 왕성할 때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진즉에 소문이 났겠지요. 저도 어제 연 대협 앞에서 공지유에 대해 함부로 말했다가 욕을 먹었습니다. 험, 험.”
소천우는 제가 말하고도 민망한지 연신 헛기침을 했다.
괜히 호가호위(狐假虎威)를 꿈꾸다가 이게 무슨 개망신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