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62
562회. 나를 그냥 머리 나쁜 놈으로 만들 거야?
정경우는 현천문주 소천우의 입에서 공지유의 이름이 나올 때 ‘아차’ 싶었다.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다.
오죽하면 베갯머리송사라는 말도 있을까!
동생 정원영의 말에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다. 공지유를 끌어내리려고 했으면 그 여자 주변에 조력자가 있는지부터 확인했어야 했다.
그는 연적하가 공지유의 남자라고 넘겨짚었다.
순간 그런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은 소천우가 원망스러웠다.
“헉! 혹시 연 대협과 공지유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던 겁니까? 아니! 그런 일이 있으면 진즉에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셨어야지요!”
소천우의 행태에 울컥한 정경우는 ‘쾅!’ 하고 탁자를 후려쳤다.
그러자 소천우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진즉에 소문이 났겠지요. 저도 어제 연 대협 앞에서 공지유에 대해 함부로 말했다가 욕을 먹었습니다. 험, 험.”
그런 사이가 아니라니?
정경우가 기막힌 눈으로 소천우를 보았다.
가끔 저렇게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 봐야 아는 사람이 있다.
“아니, 그럼, 연 대협이 남의 일에 그토록 화를 냈다는 겁니까? 더구나 우리가 없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닌데? 겨우 그만한 일로 소 문주와 내가 욕을 먹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정경우가 따지고 들자 소천우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수염을 쥐어뜯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연적하와 공지유가 아무 사이가 아니건, 그렇고 그런 사이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정 대인,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연 대협이 공지유의 편에 섰다는 게 중요하지요. 산음현에서는 연 대협이 법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끙!”
정경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연 대협에게 백배사죄하십시오. 그는 종문 제자들과 달리 함부로 살수를 쓰지 않더군요. 그러니 잘하면 그냥 넘어갈지도…….”
소천우는 말 끝을 흐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살수를 쓰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서다.
정경우가 암울한 눈으로 소천우를 보았다.
“연 대협이 나에게 ‘목을 씻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건 죽이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죽일 거였으면 그 자리에서 죽였겠지요. 그건 겁을 주려고 한 말일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기다리지 말고 공지유를 찾아가 사죄부터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연 대협이 화가 난 것도 결국 공지유 때문이니 공지유의 속부터 풀어 주다 보면…….”
“연 대협도 풀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처분만 기다리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하아! 명색이 갑자방의 대표인 내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 대인.”
소천우가 답답한 눈으로 정경우를 보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데 체면을 따지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하지만 정경우도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상대가 공지유임에야.
정씨 집안에 걸쳐서 이 무슨 개망신인지, 조상이 알까 부끄럽다.
“소 문주, 나 정경웁니다. 내가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다면, 사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고작 살기 위해서 어린 계집아 이에게 머리를 숙이라니요.”
“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해야지요. 그러고 보니 깜박했습니다만, 연 대협은 자기가 한 말을 꼭 지키는 사람입니다. 대인과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르겠으나, 말로만 하고 끝내지는 않을 겁니다.”
반드시 보복할 거라는 소리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정경우의 어깨가 축 처졌다.
***
마음의 결정을 내리자 정경우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동문으로 공지유를 찾아갔다.
다행히 연적하는 어딜 쏘다니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경우는 공지유를 근처 다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간 있었던 일을 사과했다.
“……하여 내가 소 문주에게 ‘공 소저를 제외하라’는 실언을 했소. 그 일이 연대협의 귀에 들어가 그분의 노여움을 사게 됐고. 하아! 모두가 나의 부덕함으로 생긴 일이오. 용서해 주시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원하는 걸 뭐든 들어 드리리다.”
“그게 전부인가요?”
“연 대협께도 나를 용서하라는 말을 해 주면 고맙겠소.”
“연 대협의 용서가 필요해서 찾아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맞나요?”
“그렇소.”
“그럼 나는요?”
“먼저 공소저에게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았소?”
“그랬나요? 왠지 연 대협의 용서를 받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처럼 들려서요.”
“오해요.”
정경우는 구질구질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공지유에게 사죄한 것만으로도 이미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더러운 년. 연 대협을 앞세워 나를 능멸하다니……. 내 언제고 반드시…….’
그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공지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공지유는 정경우의 겉과 속이 다름을 알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만 나쁜 여자가 되고 마는 탓이다.
“알았어요. 용서해 드리지요. 됐나요?”
그녀의 다소 날 선 반응에 정경우는 움찔했지만 모른 척했다.
중요한 건 공지유의 태도가 아니라 연적하였다.
“연 대협께도 잘 말씀해 주시오. 공 소저의 일로 나에게 화가 많이 나 있으시니.”
“그럴게요. 하지만 그것으로 연 대협의 노여움이 풀릴지는 모르겠네요. 그분의 생각이 워낙 남달라서.”
“소저가 어떻게 말해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오.”
정경우는 연적하를 움직이는 게 공지유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납작 엎드리지 않는 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이다.
그는 공지유에게 자신이 연적하에게 굴복한 것임을 알려 주고 싶었다.
강자에게 굽히는 것은 수치가 아니니까.
이윽고 그는 가지고 있던 목함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사죄의 뜻으로 드리는 것이외다. 불우산까지 먼 길이니 여비에 보태 쓰셨으면 하오.”
공지유는 목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됐어요. 우리 집안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여비가 없을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아요.”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 돈을 받으면 정경우가 뒤에서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아예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정경우는 목함을 거둬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를 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소. 공 소저.”
그러고는 공지유의 말을 듣지도 않고 돌아섰다.
자존심 때문에 돈을 거절한 것으로 생각해 강제로 떠안긴 것이다.
공지유는 황당했지만 목함에 손을 대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계산대로 다가가자 여주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 소저, 자리에 짐이 남아 있네요?”
“그거 정 대인이 깜빡 잊고 간 거예요. 갑자방의 정대인 아시죠? 번거로우시겠지만 그분에게 돌려주세요.”
“아, 네…….”
여주인은 두 번 묻지 않았다.
찻집에 손님이 없어 두 사람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은 까닭이다.
공지유가 전낭을 꺼내자 여주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십 푼이지만 열 푼만 내세요.”
“왜요? 혹시 정 대인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아니에요. 자경단에게는 좀 싸게 드리려고요. 겨울에 한해서요.”
사실 계산은 정경우가 사 전(사십 푼)을 주고 감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녀는 목함과 함께 공지유의 찻값도 되돌려 줄 셈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공지유는 피식 웃으며 열 푼을 내고 나갔다.
***
유시 초(오후 5시)가 되자 연적하는 슬슬 자경단 천막을 나섰다.
예고했던 대로 정경우를 찾아가기 위함이다.
그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갑자방에 가서 아무나 잡고 물으니 거리 한복판의 전각을 가리켰다.
비록 입구가 깨져서 현판은 볼 수 없었지만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의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으나 보다시피 야수의 습격으로 수리 중에 있소이다. 급한 일이 아니라면 다음에 방문해 주시면 안 되겠소?”
“급한 일이니까 정 씨 좀 불러 줘요.”
“우리 금란전장에는 정 씨가 제법 많소. 소형제가 찾는 정 씨는 누구요?”
연적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간판이 안 보여서 몰랐는데 돈놀이를 하는 곳이었다니.
“여기 주인인 정경우를 만나러 왔어요. 여기 있죠? 내가 기다리고 있으라 했는데.”
“헛! 혹시 연 대협이십니까?”
빳빳하던 사내의 허리가 급하게 꺾였다.
“정 씨나 빨리 불러와요. 저녁 식사 시간 늦으면 안 되니까.”
“예,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연 대협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사내는 부리나케 뒤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 중에서 정경우를 발견한 연적하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뭐 좋은 일이라고 저렇게 사람들을 끌고 왔는지 모르겠다.
가까이 다가온 정경우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접었다.
“연 대협, 오셨습니까? 갑자방의 상인들이 연 대협의 대명을 듣더니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지 뭡니까. 어서 인사들 올리시게.”
기다렸다는 듯 상인들이 한마디씩 했다.
“연성 포목점의 고주원입니다. 감사합니다.”
“광해반점의 진자앙입니다.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화양주루의 심해원이에요. 보은하고 싶으니 아무 때라도 찾아 주세요. 명주(名酒)를 많이 구비해 두었으니 몸만 오시면 돼요.”
상인들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소개를 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정경우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연적하의 안색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상인들 앞에서 설마 해코지를 하랴 싶었지만 모를 일이다.
종문의 고수들은 앞뒤 따지지 않았으니까.
연적하도 자신의 무공을 믿고 충분히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상인들의 소개가 막 끝났을 때다.
나서기 좋아하는 심해원이 슬쩍 운을 뗐다.
“그런데 연 대협이 전장에는 어쩐 일이세요? 혹시 급전이 필요해서 오신 건 아니겠죠?”
그녀의 말에 상인들이 가볍게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어이, 정 씨. 내가 목 씻고 기다리라니까 깜찍한 짓을 했더라? 어떻게 공 소저 찾아갈 생각을 다 했대? 옆에서 조언해 주는 사람이 있나봐?”
“…….”
상인들이 화들짝 놀란 눈으로 정경우를 보았다.
척 봐도 연적하가 정경우의 잘못을 따지러 온 삭막한 분위기다.
“인사도 드렸고 하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약속이 잡혀서요.”
“저도 계약을 하기로 해서…….”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상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결국 금란전장에 속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를 피했다.
방패막이로 세웠던 상인들이 사라지자 정경우는 풀썩 무릎을 꿇었다.
“연 대협!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뭘 잘못했는데?”
“공 소저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소저를 찾아가 용서를 구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아니야. 정 씨는 뭐가 잘못됐는지 몰라.”
“알고 있습니다. 제 말실수로 공 소저의 명예가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몰랐는데 정 씨 조카가 정덕행이더라? 맞지?”
“예.”
“말해 봐. 공 소저를 ‘비승과해’에 보내면 안 된다는 얘기 누가 처음 꺼냈어?”
“…….”
정경우는 차마 조카를 고해바칠 수 없어서 침묵했다.
“장사꾼인 정 씨가 왜 ‘비승과해’를 거론해? 더군다나 요즘은 야수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텐데. 안 그래? 그런데 말야, 공 소저가 얼마 전 정덕행에게 ‘비승과해’에 간다고 했다 더라? 정 씨가 소 문주를 만난 것도 그때쯤이고. 순간 뭔가 번쩍하고 뇌리를 스쳐 지나가더라고. 아! 이 새끼구나! 내가 머리는 별로인데 통찰력은 좀 있어. 어때? 나를 그냥 머리 나쁜 놈으로 만들 거야? 통찰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 거야?”
그는 막판에 신연의 말을 응용해 다그쳤다.
물론 그녀는 ‘내가 나쁜 년이라고 인정했잖아요. 그렇게 나를 무능하 기까지 한 여자로 만들고 싶으세요?’라고 했지만 말이다.
연적하의 괴상한 추궁에 정경우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그를 ‘머리 나쁜 놈’으로 만들었다가는 상황이 더 나빠질 게 뻔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