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65
565회. 산음현의 무신(武神)
수약주.
조양성.
산음현.
겨울은 길었다.
이러다 죽겠다 싶을 즈음에야 봄이 온다더니 정말 그랬다.
다져진 눈 위에 눈이 쌓이고, 그 위에 다시 눈이 쌓이기를 반복했다.
야수들의 침입은 겨울이 깊어질수록 더 빈번해졌다.
동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개의 성문은 거의 열린 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야수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몰려와 사람을 물어 갔다.
연적하도 굶주린 야수들이 사람을 물어 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그래도 산음현 사람들은 연적하를 삼천의 신들처럼 떠받들었다.
조금만 버티면 연적하가 야수를 물리쳐 주었기 때문이다.
야수가 배불리 먹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던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덩달아 자경단의 권위도 높아졌다.
산음현의 식당과 주루, 찻집에서 자경단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경단에 지원하는 무인도 늘어났다.
야수의 습격으로 자경단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지만 희생자의 빈자리는 곧 채워졌다.
동문.
정오 무렵.
연적하는 막막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으로 물든 하늘을 보니 해가 지기 전에 또 눈이 오려는 모양이다.
눈이 내리면 그다음 날은 반드시 야수가 습격했다.
내일은 또 얼마나 많이 죽을까?
강호에 있을 때만 해도 인간이 만물의 으뜸이요, 우주의 중심인 줄 알았다.
그렇게 배웠고, 또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구주에서 인간은 초원에 널린 풀과도 같았다.
야수들은 마음껏 인간을 사냥했다.
만약 사람이 잡초처럼 번식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멸종당했을 것이다.
다행히도 야수에게 잡아먹힌 사람보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걸 다행이라고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벽 위에 서서 하늘을 보던 연적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세요?”
귀에 익은 자신감 넘치는 음성이다.
힐끔 돌아보니 형부(刑部)의 직장 신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달쯤 전 현천문에서 함께 술을 마신 뒤로 처음이다.
“신 직장님?”
“어머! 영광이에요.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신연이 어울리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고관이시잖아요. 그것도 형부의.”
솔직히 다른 관인이라면 가물가물했을 테지만 ‘형부’ 소속인지라 의식하지 않아도 외워졌다. 녹림의 도적에게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까닭이다.
“켕기는 게 많으신가 봐요? 산음현의 영웅께서.”
“전에 말하지 않았나요? 내가…….”
“거기까지만 들을게요.”
신연은 얼른 연적하의 말을 막았다.
뒤늦게 연적하는 그녀가 유독 그런 쪽의 이야기를 싫어한다는 걸 떠올렸다.
“아, 네. 그런데 여기는 어떤 일이에요?”
“신양촌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서요.”
“신양촌에서요?”
연적하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신양촌은 동문에 있는 마을이다.
이렇게 혼란한 와중에 살인이라니 한편으로는 좀 너무했다 싶다.
“야수만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랍니다.”
“…….”
어쩐지 여운이 느껴지는 말이다.
야수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는데, 사람들의 삶은 여전한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연적하의 귓가로 신연의 음성이 들려왔다.
“연 대협이 고생해서 지켜 준 사람을 죽이다니 괘씸하죠?”
“아, 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연적하의 반문에 신연이 다짐하듯 말했다.
“연 대협의 노고가 헛되지 않게 꼭 잡을게요. 그 말씀 드리려고 왔어요. 그럼 저는 이만.”
신연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에 돌아서 갔다.
연적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는 왜 야수처럼 기습적으로 찾아와 엉뚱한 다짐을 하고 가는 것일까?
‘난 그저 현천문의 식객에 불과한데.’
그때 문득 콧잔등 위로 눈송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야수의 출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다.
새삼 ‘이러다 죽겠다 싶을 즈음 봄이 찾아온다’던 말이 떠올랐다.
그건 추위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누적된 한기가 불편하게 느껴지자 연적하는 자경단 천막으로 돌아갔다.
***
연적하가 ‘누가 야수에게 물려갔다’는 말을 들어도 담담해질 즈음, 봄이 왔다.
얼어붙었던 땅이 녹자 사람들의 표정도 다양해졌다.
겨우내 세워져 있던 자경단 천막이 해체됐고, 자경단도 뿔뿔이 흩어졌다.
자경단이 해체된 뒤로 연적하는 현천문을 나가지 않았다.
봄이 되자 현천문의 문주 소천우는 앞장서서 ‘비승과해’를 준비했다.
‘비승과해’에 대한 기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공지유의 일로 연적하에게 욕을 먹은 뒤 그는 연적하를 내보낼 궁리만 했다.
그러기에 ‘비승과해’보다 더 좋은 핑계도 없었다.
소천우가 시키지도 않은 일로 바쁘게 돌아다닐 때, 연적하는 홍익방을 찾아갔다.
***
홍익방.
정오(낮 12시).
연적하가 찾아왔다는 말에 홍익방의 방주 홍인비는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연 대협!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오실 때가 된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홍인비는 물론 홍익방의 누구도 감히 연적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산음현에서 무신(武神)으로 불리고 있었다.
연적하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홍익방은 사람 찾는 일에 매달렸다.
그래서 결과는 시원치 않았지만 떳떳하게 연적하를 맞이할 수 있었다.
홍인비는 연적하를 의사청으로 모시고 가서 상석에 앉혔다.
그리고 그의 앞에 공손히 서서 지금까지의 경과를 보고했다.
“늦가을에 시작하여 어제까지, 수 약주의 십삼 개 성 중에 세 개 성을 조사했습니다. 하지만 찾으시는 그분은 없었습니다. 겨울이 끼는 바람에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제 봄이니, 늦어도 가을까지는 열 개 성을 모두 조사할 수 있을 겁니다.”
가을이라는 말에 연적하의 풀이 죽었다.
십전무후 남궁연이 수약주에 있기나 한 걸까?
그녀의 미모와 뛰어난 머리면 수약주뿐 아니라 구주에 소문이 나고도 남았다. 그런데 남궁연이라고 짐작할 만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때 홍인비의 음성이 들려왔다.
“연 대협,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머니 속의 송곳이 감춘다고 감춰지겠습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연적하는 금자 칠십 냥이 든 자루를 슥 내밀었다.
‘천년지령선과(千年地靈仙果)’를 판 돈의 일부였다.
“금자 칠십 냥이에요.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현천문으로 사람을 보내요. 그곳에 가면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게 될 테니까.”
자신이 소요종에 입문할지도 몰라서 한 소리다.
만약 소요종에 입문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현천문에는 행선지를 알릴 생각이었다.
홍인비는 전과 달리 돈 자루를 챙기지 않고 연적하의 눈치만 봤다.
이제는 돈이 아니라 신뢰의 문제가 됐다.
그의 신뢰를 잃게 되는 순간 홍익방과 자신은 죽었다고 봐야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연적하는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
사월 초하루.
현천문.
아침부터 연적하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지역 유지와 관리 들이 현천문을 찾았다.
그중에는 형부의 직장 신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이 연적하를 어려워하여 주변을 맴돌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신연은 마치 자기 일처럼 연적하를 따라다니며 챙겼다.
“연 대협, 다른 문파에서는 중순경에 출발한다는데, 너무 이른 거 아니에요?”
“그래요? 소 문주는 지금쯤 가야 늦지 않는다고 하던데.”
“늦지 않는다고요? 연 대협을 어지간히 빨리 쫓아내고 싶은가 보네요. 지금 가면 못해도 보름은 시무현에서 머물러야 할 거예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시무현이나 산음현이나.”
사실 구주 사람이 아닌 연적하에게는 거기가 거기였다.
당사자인 그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자 신연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괜히 현천문주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봐야 좋을 게 없어서다.
“저 사람이 그 정덕행이죠?”
신연의 손가락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힐끔 보던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호! 생김새는 멀쩡한데요?”
“허우대만 멀쩡한 놈이에요.”
연적하의 악평에 신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사람을 왜 데리고 가요?”
“저런 놈을 내가 좀 아는데 말로 해서는 못 알아 처먹더라고요. 알아도 그때뿐이라 돌아서면 또 같은 짓이고. 저런 놈들은 가까이 두고 뼈에 새겨 줘야 돼요.”
“뭘 새겨 주시게요?”
그녀의 집요한 질문에 연적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남을 괴롭히지 않고 착하게 사는 거?
아니면 사람답게 사는 거?
하지만 막상 말하려고 하니 구주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러게요? 갑자기 헷갈리네요? 분명히 뭔가 단단히 가르쳐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훗! 설마 요리는 아니겠죠? 저 사람 겨우내 죽자 사자 요리를 배웠다던데.”
“가다 보면 차차 알게 되겠죠. 저 허우대만 멀쩡한 놈에게 뭘 새겨 줘야 할지.”
“아무쪼록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아서요.”
그녀의 말에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형부의 직장다운 말이다.
“죽일 거면 힘들게 끌고 다니지도 않아요. 그리고 내가 얼마나 마음이 여린 사람인데요.”
“아, 여리시구나.”
두 사람이 정덕행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 현천문주 소천우가 나타났다.
지역 유지들과 관리들이 소천우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소천우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그런 소천우를 보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내가 원래 소 문주 같은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요? 마음이 바뀌셨어요?”
“아뇨. 진짜 싫어졌어요.”
“왜요?”
“자기가 지켜 줘야 할 대상을 이용하려고만 하잖아요. 달면 삼키고, 쓰면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뱉고. 자기 욕심을 채우면서 대의를 위한 척. 내가 그런 사람들하고 상성이 좀 안 맞아요.”
문득 천지맹의 제갈승운이 떠오르자 연적하는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그때 소천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사람들이 열렬히 박수 치며 환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연적하가 물었다.
“원래 ‘비승과해’에 간다면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축하해 주고 그래요?”
“전혀요. 모두 연 대협과 안면이라도 익혀 두려고 모인 사람들이에요.”
“아하!”
“그걸 소 문주가 알뜰하게 이용해 먹는 거고요. 어차피 떨어질 ‘비승과해’에 출정식이 어디 있고, 연설이 어디 있어요? 그냥 원님 덕에 나팔 부는 거지.”
연적하가 신연을 힐끔 보았다.
역시 형부의 고관답게 보는 눈이 날카로운 것 같다.
이렇게 직관이 뛰어난 사람도 세 번이나 ‘비승과해’에서 떨어졌다니 놀랄 일이다.
‘공 소저와 내가 비승과해를 통과할 수 있을까?’
은연중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자신감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잠시 후 ‘출정식’도 ‘연설’도 아닌 행사가 끝났다.
사람들이 슬슬 몰려들 기미가 보이자 연적하는 신연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신 직장님, 나쁜 놈들 많이 잡아요. 나는 이만 가요.”
연적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정문으로 걸어갔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던 공지유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마지막으로 정덕행이 가족과 친지들의 눈물 어린 배웅을 뒤로하고 현천문을 나섰다.
인사할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허탈한 얼굴로 하나 둘 흩어졌다.
그렇게 산음현의 무신(武神) 연적하는 구주로 일보를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