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7
57회. 이 몸은 연설주 님이시다
처음에 화양상방 신의대 대주 천풍도 양무기는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무시무시하다’는 소문과 달리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그저 그랬다.
오죽하면 ‘그동안 이런 것들에게 통행세를 바치고 다녔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투지 하나만큼은 인정해 줄 만했다.
하지만 아이들 전쟁놀이라면 모를까?
상방과 녹림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투지 하나로 승패가 결정되지 않는다.
싸움은 일각(15분)이 지나기도 전에 상방의 승리로 끝났다.
도적 다섯을 죽이고 열다섯은 포로로 잡았다.
기대 이상의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마음이 불편했다.
도적들의 태도가 너무도 뻔뻔해서다.
무공은 형편없는 놈들이 포로로 잡혔음에도 여전히 눈알에 힘을 팍팍 주고 있었다. 마치 ‘이대로 끝날 것 같으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던 적풍채와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놈들이다.
산채로 올라가자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건 도적들의 소굴이라기보다 산 속에 숨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맹세코 녹림의 산채에서 해맑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황동엽이 다가왔다.
“양 대협, 오봉십걸이라는 도적들이 도망간 걸까요?”
“아닐 걸세.”
지금까지 오봉산채에 도전한 상방의 숫자는 알려진 것만 해도 다섯 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산채 안까지 들어간 적이 없다.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포로들의 태도로 보아 오봉십걸은 산채에 있는 게 분명하다.
그때 노인 하나가 나타났다.
핏기 없는 얼굴과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볼 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었다.
양무기는 낙양오협과 함께 노인을 향해 나아갔다.
상방무사들 앞에 선 노인, 구밀복검 심양각이 푸들푸들 웃으며 말했다.
“흘흘,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가?”
양무기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노인은 나름 친절해 보이려고 웃는 것 같은데 왠지 짜증이 났다.
“나는 화양상방 신의대 대주 양 모라고 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이쪽은 낙양오협, 강호행 중인 명문 무관의 제자들이오. 오봉십걸은 지금 어디 있소?”
양무기는 만일을 대비해 ‘강호행’과 ‘낙양의 명문 무관’을 강조했다. 알아서 기라는 의미로 한 말인데, 이 기분 나쁜 노인은 용케 알아들은 눈치다.
“아! 강호행. 어느 가문의 자제들이신지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소?”
양무기는 내심 안도하며 낙양오협을 소개했다.
“……특별히 이 소저는 의천문 문주 군자검 이연익 대협의 따님이시고, 연 소저는 와룡검객의 동생이외다.”
그러니 제발 알아서 기든지 달아나 달라고!
양무기의 소리 없는 외침이 심양각에게 전해진 것일까?
심양각이 놀란 얼굴로 이소민을 바라보았다.
“여협의 부친이 정말 군자검이오?”
이소민이 새침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래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죠? 오봉십걸은 어디에 있고요?”
“이 늙은이는…… 방통이라고 하오. 오봉십걸은 이제 곧 내려올 게요.”
심양각은 차마 본명을 대지 못하고 방통이라 했다.
“내려온다고요?”
“그렇소, 손님들이 온 것 같다고 오봉산 제일봉으로 잠시 올라가셨다오.”
“흥! 손님 좋아하시네. 그쪽으로 달아난 게 아니고요? 아니면 거기에 함정이라도 파고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거나?”
“아니외다. 제일봉에 일곱째 형님이 계셔서 모시려고 간 것이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양무기는 상인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괜히 난전 중에 피해라도 입을까 봐 멀찍이 떼어 놓은 것이다.
대충 전투 준비가 끝날 무렵, 입구 쪽에 열 명의 남녀가 등장했다.
더도 덜도 아닌 열 명.
양무기와 낙양오협은 그들이 오봉십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양무기는 암암리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봉십걸은 화양상방이 적풍채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 소년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늘어섰다. 저건 아무리 봐도 결사 항쟁의 자세였다.
오봉십걸이 다가오자 양무기는 저도 모르게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대신해 낙양오협이 어떤 인물들인지 소개해 줬으면 해서다.
‘늙은이, 어서 말을 하라고!’
연적하가 굴비 두름처럼 엮여 있는 도적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독심낭인 황요명이 퉁퉁 부은 얼굴로 소리쳤다.
“연 형님! 화양상방의 양무기가 미친 연놈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오봉산채의 이름에 먹칠을 해서 죄송합니다!”
순간 연설주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살인이 꺼려져서 목숨을 붙여 놓았더니 분수를 모르고 또 욕질이다. 저런 놈들은 오봉십걸이 무릎을 꿇기 전까지 계속 저럴 게다.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지…….’
연설주의 손이 검 손잡이로 향했다.
그때 황동엽이 슬그머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직 나서지 말라는 뜻이다.
솔직히 지금 황동엽의 심정도 양무기와 다르지 않았다. 난전 중에 이소민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심양각이 연적하에게 다가가 허리를 조아렸다.
“연 형님, 저들은 화양상방의 양무기와 낙양오협이라고 하는 신진고수들입니다. 낙양오협 중에는 의천문주의 딸이 있으니 손속에 사정을 두셨으면 합니다.”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호초출인 그는 아직 칠파이문의 힘을 잘 몰랐다.
“의천문주?”
“예, 의천문의 문주는 군자검이라고 불리는데 제법 고수입니다. 녹림삼존과 대등한 경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녹림삼존은 누군데?”
“녹림의 총채주인 파천마군 님 다음으로 강한 세 마두를 녹림삼존이라 합니다. 지금은 은거를 해서 만나기가 쉽지 않지만요.”
“아하!”
연적하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심양각은 한마디 덧붙였다.
“실은 군자검보다 그의 아비인 의천검존 이의정이 더 대단한 자입니다. 그는 파천마군 님처럼 천하십대고수로 불리고 있습니다.”
연적하는 파천마군과 비슷하다는 말로 알아듣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뒤에 의천검존이 있으니까 심하게 하지 말라는 소리지?”
“의천검존의 비위를 건드렸다가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쩝, 부모 복은 타고나는 건가 봐. 젠장. 좋겠다. 부모 잘 만나서 가는 데마다 좋은 대접을 받고. 누군 자기 집에서도 개 취급 받았는데…….”
연적하는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양무기는 물론 낙양오협은 내외공의 고수다.
당연히 오 장(약 15미터)여 떨어진 거리에서 나누는 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가 있다.
이소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지금까지 자신을 두고 저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다.
“저자들이 감히…….”
“언니, 참으세요. 저건 도적들의 뻔한 격장지계예요. 넘어가면 안 돼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설주의 표정도 이소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소민이 집안 얘기에 발끈했다면 연설주는 질투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적풍채도 그렇고 여기서도 온통 의천문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누구도 와룡장을 알아주지 않았다.
저 유명한 남궁세가도 인정한 와룡장을 말이다.
두 아가씨가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 양무기가 앞으로 나섰다.
“오봉십걸의 이름은 익히 들었소! 그러나 당신들의 악행도 오늘까지요. 나 천풍도 양무기와 낙양오협이 천하 창생을 위하여…….”
“형씨, 좀 조용히 해 봐. 나 지금 머리가 복잡하니까.”
연적하가 양무기의 말을 끊었다.
분노한 양무기가 튀어 나가려고 할 때다.
아까부터 단단히 벼르고 있던 연설주가 한발 빠르게 달려 나갔다.
“이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계속 주절거리는데! 실력이 그 얄미운 주둥이를 따라가는지 이 누님께서 확인해 봐야겠다!”
차앙.
달려가면서 발검 한 연설주는 벼락처럼 검을 쳐올렸다.
갈지자로 아래에서 위로 현란하게 솟아오르는 검식은 비룡승천.
쉬이이익.
그림 같은 검격에 낙양오협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 검식은 언제 봐도 놀랍다.
지금까지 연설주가 검을 뽑으면 반드시 한 명씩 쓰러졌다.
그들은 ‘아직 소년 태를 벗지 못한 도적이 저 검을 당해 낼 리가 없다’라고 생각했다.
한편 연적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도 눈에 익은 검식이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구천세법을 만날 줄이야!
그는 황망 중에 뒷걸음치며 들고 있던 박도로 비룡승천의 검로를 차단했다.
차차창.
눈 깜짝할 사이에 상대로부터 멀어진 연적하가 큰 소리로 외쳤다.
“너는 누구냐!”
“이 몸은 낙양오협이시자, 와룡장의 여검객인 연설주 님이시다! 이제 좀 겁이 나느냐?”
“너!”
연적하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 이름을 어찌 잊을까!
연설주는 배다른 누이다.
자세히 보니 어릴 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순간 연무백, 연승백 그리고 백미주와 연무독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써 잊고 있던 과거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배다른 형제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기억과 큰어머니 백미주의 학대.
창고에 갇혀 지내던 날들.
그리고 ‘목숨이 질기다’고 푸념하던 와룡장의 무사들까지.
분노하자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구천여일진경의 내력이 단전에서 치고 올라왔다.
휘이이잉-.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연적하의 주위로 돌풍이 몰아쳤다.
기세등등하던 연설주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됐다.
눈앞에서 기의 폭풍이 휘몰아치는데 겁먹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소년 도적의 화등잔 같은 눈에서 불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지옥의 군주가 눈앞에 강림한 것 같은 느낌이다.
공포에 사로잡힌 연설주는 맞서 싸울 생각을 접고 뒷걸음질 쳤다.
그때 소년 도적의 모습이 퍽 하고 사라졌다.
연설주가 놀란 눈으로 좌우를 살피는데 하늘에서 어마 무시한 암경(暗 勁)이 쏟아졌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꺄아악!”
연설주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오봉산에 울려 퍼졌다.
곧이어 연설주가 맥없이 풀썩 쓰러졌다.
깜짝 놀란 이소민이 연설주를 구하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꼭지가 돌아 버린 연적하는 이소민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용무천상에 이어 운룡풍호가 펼쳐졌다.
구천여일진경으로 펼치는 구천세법은 와룡장의 그것과 궤를 달리했다. 박도가 스치고 가는 곳마다 대기가 일그러지며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마침내 박도가 연적하의 머리 위에서 호선을 그릴 때쯤, 돌개바람은 거대한 용권풍으로 화해 있었다.
용권풍 속에서 한 마리 청룡의 형상이 꿈틀거렸다.
언젠가 천지상인이 당했던 바로 그 용형도기(龍形刀氣)다.
콰콰콰콰.
박도와 함께 용권풍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꺄아아아악!”
이소민은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의 비명은 연설주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고 날카로웠다.
용형의 도기가 마치 애무하듯 이소민의 몸통을 나선형으로 휘감고 내려갔다.
스스스스.
곱게 갈린 옷 조각과 머리카락이 용권풍을 따라 날아다녔다.
신의대주 양무기는 물론 나머지 낙양오협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했다.
너무도 압도적인 무력 앞에 싸울 의지도 사라진 것이다.
특히나 양무기는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망한 건가…….’
상단들이 왜 오봉산채를 토벌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천지상인과 관련된 설이 왜 흐지부지 사라졌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