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77
577회. 남자는 어떻습니까?
‘혼돈이 하품(下品)보다 낮을 수도 있다’는 곽상문의 말에 이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극상을 뛰어넘어 전설로 전해지는 ‘혼돈’이 ‘하품’보다 낮은 게 가능할까?
“사형, 그건 좀 다른 문제 같습니다. 오행이나 태극이 돌고 도는 것은 천지조화의 이치입니다만, 영기의 등급이 그처럼 조화를 이룬다는 말은 없지 않습니까?”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는 말도 없지. 영기라 해도 본질은 결국 오행과 음양, 태극이 아닌가.”
“하지만…….”
“뭐, 너무 흥분하지는 말게. 나도 그걸 믿지는 않으니까. 처음 스승님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도 자네처럼 발끈했다네.”
그가 믿지 않는다고 하자 이휴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의견이 다르다면 모를까?
생각이 같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논쟁은 불필요했다.
식사를 먼저 끝낸 것은 소요종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상단과 함께 움직였기에 상단 사람들과 함께 음식점을 떠났다.
연적하 일행은 느긋하게 식사를 즐겼다.
아직 ‘비승과해’의 개시일까지 여유가 많아 서두를 이유가 없어서다.
특히나 연적하는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 동안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연적하 일행을 보던 주인이 차를 가지고 왔다.
“이건 ‘죽음의 회랑’에서만 나는 것으로 ‘천상비’라고 합니다. 모처럼 오신 손님들에게도 대접하려고 했는데, 다른 분들은 서둘러 가시네요?”
주인이 의아해하자 공지유가 웃으며 답했다.
“그분들은 상단 사람들이라서 그래요.”
“아! 외지인들이 워낙 없는 마을이라 모두가 일행이신 줄 알았습니다.”
“함께 ‘죽음의 회랑’을 건너오기는 했지만, 일행은 아니에요.”
그러자 주인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죽음의 회랑’을 건너오셨습니까?”
“네.”
공지유가 으쓱한 얼굴로 답했다.
‘죽음의 회랑’을 건너고 나니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게 됐다.
그 일은 ‘비승과해’ 다음으로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터였다.
때마침 창밖으로 상단 사람들이 질서 정연하게 지나갔다.
상단의 진행 방향을 확인한 주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야! 정말 그러네요? 제가 이곳에서 장사를 한 지 이십 년인데, ‘죽음의 회랑’을 건너온 상단은 처음입니다. 거길 어떻게 넘어왔지?”
궁금해하는 그를 위해 공지유가 간단하게 설명을 보탰다.
“상단을 지켜 주기 위해서 소요종 고수들이 여섯 분이나 오셨더라고요.”
“아! 소요종에서……. 어쩐지. 하아! ‘죽음의 회랑’에 야수만 좀 덜했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이쪽으로 다니는 외지인은 없어요?”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종문의 고수로 보이는 분들이 드물게 다니시곤 하니까요.”
“종문의 고수요?”
공지유가 확인하듯 묻자 주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제 생각에 그렇다는 겁니다. 종문의 고수들이 아니면 ‘죽음의 회랑’을 지나갈 수가 없으니까요.”
“아하.”
공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종문의 고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인 것은 사실이었다.
세 개의 상단이 모두 지나가자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단의 후미가 겨우 보일 정도로 거리를 두고 가던 연적하가 정덕행을 돌아보았다.
“정 형.”
“예?”
“여기가 어딘지 알아?”
“예, 원양현입니다.”
“이제 불우산까지 찾아갈 수 있겠어?”
“조금만 더 가면 백야촌이라고 들었습니다. 양도에서 남과 북으로 갈렸던 길이 만나는 곳이죠. 거기서부터는 가 본 길이라 찾아갈 수 있습니다.”
“백야촌까지는 상단 꽁무니를 따라 가야겠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확실히 하려면 그러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정덕행의 자신 없는 얼굴을 본 연적하가 ‘쯧쯧!’하고 혀를 찼다.
“아니 길눈이 그렇게 어두워서 어쩔 거야?”
“죄송합니다.”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제가 이쪽으로는 처음인지라…….”
정덕행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변명을 했다.
생전 처음 와 본 길인데 ‘길눈이 어둡다’고 타박하니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한 게 죄였다.
다행히 정오 무렵, 공도(公道)에 백야촌의 이정표가 나타났다.
[백야촌 오십 리]“백야촌까지 오십 리(약 20 킬로미터)라는데?”
“예. 그때부터는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백야촌에서 불우산까지는 몇 리나 돼?”
“천 리(약 400킬로미터)가 조금 못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라지게 머네.”
연적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천 리면 최소한 열흘은 꼬박 가야 하는 거리였다.
“조금 쉽게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뭔데?”
“원양현에서 시무현까지 마차를 타면 됩니다. 그럼 닷새 정도 걸릴 겁니다.”
“마차도 좋긴 한데 시간이 너무 남아서 안 돼.”
“아, 예. 그렇기는 합니다.”
정덕행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서도 연적하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지금도 남들보다 보름 이상 빠른데 여기서 더 단축할 이유가 없었다.
***
백야촌.
해거름 무렵.
연적하 일행은 백야촌에 도착했다.
거대한 석주(石柱)들 사이를 목책이 두르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마을이었다.
연적하가 석주 사이에 설치된 문으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마을 규모가 좀 되나 보네. 기둥을 석주로 세운 걸 보니.”
“그러게요. 부자 마을인가 봐요. 어지간한 현(縣)만큼 공을 들였는데요?”
공지유의 말에 정덕행이 한마디 했다.
“사매, 마을 규모도 크지만 그보다는 가까운 곳에 채석장이 있어서 그런 거야.”
“아! 근처에 채석장이 있구나.”
공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현에서도 잘 쓰지 않는 석주가 왜 이런 곳에 있나 했다.
석주 사이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과연 지금까지 봤던 마을보다 확실히 컸다.
마을을 관통하는 길도 다른 곳의 두 배는 됨 직해 보였다.
마을 한복판의 번화가 역시 촌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화려했다.
어찌나 마을이 크던지 세 개 상단도 어디로 갔는지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연적하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우! 마을이 커서 다행이다. 난 노숙도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공지유가 배시시 웃었다.
“왜요? 객점에 자리가 없을까 봐요?”
“삼백 명이 넘게 왔잖아요. 그 정도 인원은 수용하고도 남을 것 같죠?”
“네, 그래 보이네요.”
뒤에서 듣고 있던 정덕행이 와 봤던 마을이라고 슬쩍 끼어들었다.
“연 대협. 여기가 발달한 건 수미성과 조양성을 잇는 곳이라서 그런 겁니다. 수미성의 양도와 비슷한 곳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알아, 알아. 그 정도도 모를까.”
연적하의 핀잔에 정덕행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조금 친해졌다 싶어서 나섰는데 말투를 보니 아직 먼 느낌이다.
객점에 방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백야촌은 수미성과 조양성을 다니는 사람들에 맞춰 발전한 마을.
세 개 상단이 ‘죽음의 회랑’을 통해 왔건, 남쪽 길로 왔건 백야촌과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어느 길로 왔건 백야촌에서 만나는 건 같았으니까.
***
세 개 상단이 백야촌을 떠난 지 닷새.
그동안 원요는 이휴의 빈자리로 들어가 충실하게 곽상문을 모셨다.
이휴가 곽상문의 말벗이었다면 원요는 심부름꾼 역할을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원요는 자청해서 곽상문의 수발을 들었다.
보통은 사제 관계에서나 할 법한 일을 아무 관계도 아닌 원요가 한 것이다.
그걸 두고 다른 연허의 고수들은 뒤에서 수군거렸지만 원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기이한 것은 곽상문의 태도다.
그는 원요를 멀리하지 않고 다른 연허의 고수들보다 더 가까이했다.
정오 무렵.
선두에서 공도를 걷던 곽상문이 원요에게 물었다.
“그들은 아직 따라오고 있느냐?”
“예, 후미로부터 백 장(약 30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흠! 백산현이 코앞이니 곧 헤어지겠군.”
“그럴 겁니다.”
원요는 짐짓 담담한 어조로 말했지만 속은 기대에 차 있었다.
백산현에서 상단과 저들은 갈라설 터였다.
상단은 불우산에 물건을 납품해야 하니 바로 가겠지만, 저들은 다르다.
‘비승과해’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이십 일이나 남았다.
백산현에서 불우산까지 오일여 거리.
지금 가면 ‘비승과해’까지 보름이나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다른 참가자들처럼 시무현에서 시간을 보낼 게 분명했다.
곽상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소요종 제자가 될 테지…….”
순간 원요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뛰어난 영기를 가진 자가 있었습니까?”
영기를 알아보는 추도영법(追到靈法)은 원영에 올라가서야 배울 수가 있다.
그러니 원요로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여자 쪽이 오행(五行)의 영기를 가졌으니 제자가 될 게다.”
“허면 남자는 어떻습니까?”
원요가 슬쩍 곽상문을 보았다.
그가 소요종에 들어오면 오래도록 얼굴을 맞대야 하니 그것도 고려해야 했다.
“그는 하품에도 들지 못할 영기를 가졌다.”
원요의 얼굴이 밝아졌다.
소요종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어떻게 그 단검의 신수를 다룰 수 있었을까요?”
“그가 익힌 심법과 맞아서다.”
“허면 심법을 모르면 무용지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마도 그럴 확률이 높다.”
“…….”
원요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이 남자의 단검에 눈독 들이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다.
***
백산현.
세 개의 상단은 백산현에 들렀다가 바로 떠났다.
서둘러 떠난 상단과 달리 연적하 일행은 백산현에 객점까지 얻어 눌러앉았다.
그날 오후.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연적하는 백산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상단과 함께 다닐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고즈넉한 거리의 풍경과 장사꾼들의 호객행위.
시정잡배들이 들개처럼 돌아다니며 노점상인들에게 돈을 뺏는 걸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심지어 관원이 노점상인에게 돈을 뜯어내는 것까지 닮았으니 말 다했다.
오후 내내 쉬어서 그런지 어둑어둑 해지는데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
기운이 뻗친 연적하는 백산현 구석 구석을 개처럼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슬슬 모든 게 지겨워질 무렵, 객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멀리 객점 간판이 보였다.
고작 하루를 머무르고 있을 뿐인데 고향에라도 돌아온 것처럼 반가웠다.
타박타박 걸어가는 그를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소형제.”
돌아보니 초저녁부터 객점 근처 거리에서 어슬렁거리던 잡배들이다.
“왜요?”
삼십 대 초반의 사내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아까부터 오락가락하던데, 특별히 찾는 게 있나?”
“없는데요?”
“에이, 없긴 뭐가 없어. 긴 밤이 적적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여자가 필요하지? 우형(思兄)을 믿고 따라와 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그때 어둠 속에서 초로의 노인이 걸어 나왔다.
“흥! 몸에서 비린내가 풀풀 나는 걸 보니 흑점(黑店, 인육을 파는 곳)에 속한 놈들이구나. 꺼져라.”
소요종 고수 원요였다.
잡배들은 원요를 노려보다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을 보고는 슬금슬금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