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82
582회. 그냥 그렇게 된 거야
사월 말.
수미성.
시무현.
사시 초(오전 9시).
심재객점(心齋客店).
국수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운 정덕행이 아쉬운 눈으로 빈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산음현을 떠난 이후 오늘까지 자신의 주식은 국수였다.
노숙을 하던 때를 제외하고 다른 음식은 입에 대 본 적이 없다.
특히나 지난 보름 동안은 객점에서 삼시 세끼를 국수로 때웠다.
국수만 먹었는데 질리지 않냐고?
그거야말로 배부른 소리다.
국물까지 남김없이 비워야 겨우 하루를 버틸 힘이 생기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 아침까지만이다.
연적하와 공지유를 불우산 입구까지 안내하면 짐꾼 생활도 끝난다.
‘고기나 실컷 사 먹어야지.’
지금은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산음현으로 돌아가는 것은 목구멍에 기름칠을 하고 난 이후에 고민할 문제였다.
입맛을 다시고 있는 그를 보며 연적하가 말했다.
“정 형은 국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저러다 국수 장사를 하는 건 아닐까 몰라.”
“아하하…….”
정덕행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국수 장사라니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네놈이 국수만 먹여 놓고 그게 할 소리냐? 살려고 먹는다 이 자식아.’
삼천의 신들은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뭐 하는지 모르겠다.
창밖을 내다보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네. 전부 불우산에 가는 건가?”
정덕행이 이때다 싶어 한마디 했다.
“여기서 불우산까지 한 시진(2시간) 정도 걸리니까 연 대협도 슬슬 가셔야 할 겁니다.”
“‘비승과해’는 정오부터라며? 반 시진(1시간)이나 일찍 가서 뭐하게?”
“참가자들끼리 정보도 나누고 그러다 보면 반 시진은 금방 지나갑니다.”
그러자 공지유가 거들고 나섰다.
“연 대협, 그래도 시험인데 조금 일찍 가서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럴까요? 그럼 가죠 뭐.”
연적하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도(公道)는 말끔한 차림의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도검을 휴대하고 눈에 정기가 가득한 걸 보니 ‘비승과해’의 참가자들이 분명하다.
청년들은 긴장한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며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 숫자는 점점 불어나 마치 시장터를 방불케 했다.
공도가 사람들로 가득하자 연적하가 투덜거렸다.
“공 소저, 대체 몇 사람 뽑는데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요?”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열 명 안쪽으로 알고 있어요.”
“열 명도 안 된다고요?”
연적하가 황당한 눈으로 공도를 보았다.
함께 걸어가고 있는 청년들 숫자만도 수백 명이다. 이미 불우산에 도착한 사람도 많을 게다.
그런데 열 명도 안 뽑는다니?
결국 이 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불우산을 구경만 하고 되돌아간다는 소리다.
“네, 종문의 문은 상상 이상으로 좁답니다.”
“그래 보이네요.”
그때 옆에서 걷고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비승과해’는 처음이신가 봅니다?”
연적하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십 대 초반의 뺀질뺀질하게 생긴 남자였다.
“예, 그런데 그쪽은 여러 번 되나 봐요?”
“여러 번은 아니고 두 번쨉니다.”
“어이쿠! 한 번 떨어졌으면 됐지 뭘 두 번씩이나.”
연적하가 의아한 눈으로 청년을 보았다.
영기의 문제로 떨어졌으면 다시 응시하나 마나일 텐데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그러자 갑자기 청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종문에서 영기의 질을 중요시한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그래요? 일 년 묵으면 영기의 질이 좋아진답니까?”
“아니죠. ‘질이 안 되면 양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질에 문제가 있다면 양으로 승부를 보는 것도 방법이지요. 뭐 통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아…….”
연적하는 청년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영지 선초 따위로 영기의 양을 늘려서 재도전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질보다 양으로 다시 승부를 보러 왔다? 영지 선초라도 집어 먹고 왔나 봐요?”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뭐라도 해 봐야지요. 난 원천성에서 온 임정영입니다.”
“우리는 조양성에서 왔습니다. 난 연적하, 그리고 저쪽은 그냥 짐꾼.”
임정영이 연적하의 옆에 있는 아가씨를 슬쩍 보았다.
대단한 미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예쁘고 귀염성이 있는 얼굴이다.
“공지유예요.”
그러자 임정영이 눈을 맞추고 인사를 했다.
“공 소저. 반갑습니다. 내가 경험이 있으니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십쇼.”
순간 연적하가 끼어들었다.
“임 형, 우리 짐꾼도 삼 년 전에 도전한 적이 있어요.”
그제야 임정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짐꾼을 보았다.
그냥 잡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비승과해’의 참가자였다니!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막일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닌 것도 같다.
‘문파에서 날고 기는 사람이 짐꾼이라고?’
의아해 하고 있는 그의 귓가로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 그래도 삼 년 전보다는 작년이 더 낫겠죠? 무슨 시험을 보던가요?”
임정영은 얼른 짐꾼에 대한 관심을 접었다.
어제의 영화는 의미가 없다.
그사이에 집안이 망했을 수도 있고, 문파에서 내쳐진 것일 수도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면서 경전을 외우라고 하더군요. 경전을 외우지 못한 사람은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경전을 외우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그보다는 산을 올라가는 게 더 어려웠습니다. 걸음마다 함정이라 경전을 볼 틈이 없었으니까요. 암기력을 보겠다는 건지, 순발력을 보겠다는 건지 모르겠더군요.”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정 형 때는 대접에 물을 가득 따라 주고 오르게 했다던데, 경전으로 바뀌었나 보네요. 젠장, 대접에 담긴 물이 훨씬 좋은데.”
하지만 임정영은 동의하지 않았다.
“대접에 물을 따라주었다고요? 정말 극악의 난도네요. 그게 너무 어려워서 경전으로 바꾸었나 봅니다. 경전은 땅에 떨어트려도 흘릴 게 없지 않습니까?”
공지유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외우기에 자신이 없는 연적하만 썩은 표정이었다.
‘물 대접’과 ‘경전’에서 보았듯 임정영과 공지유는 말이 잘 통했다.
알고 보니 둘 다 약초학을 오래도록 공부한 데다가, 독서량까지도 엄청났다.
그러다 보니 둘은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처럼 금방 친해졌다.
대화에서 소외된 연적하는 어느새 정덕행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정 형.”
“예.”
“오래 알고 지내는 거 아무 의미 없어. 저 두 사람 봐 봐. 조금 전에 만났는데 십년지기 같잖아. 정 형은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지?”
“……예.”
정덕행의 입가에 씁쓰름한 미소가 어렸다.
어디 같이 자라기만 했나.
한때는 ‘내 여자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이제는 모두 물 건너갔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봐 봐. 정 형은 그냥 짐꾼이잖아. 왜 이렇게 된 것 같아?”
“제가 함부로 입을 놀려 사매와의 관계를 망쳤습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입을 잘못 놀린 죄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어.”
“그, 그게 뭡니까?”
“그냥 그렇게 된 거야. 꽃이 지고, 물이 흐르듯이, 그냥 그렇게 된 거라고. 아무 이유 없어.”
“…….”
정덕행은 알쏭달쏭한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뭔가 가슴을 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냥 헛소리 같았다.
“지금도 봐 봐. 공 소저랑 내가 친하게 지냈잖아? 그런데 공 소저 옆에 누가 있어?”
“임 소협요?”
“그래, 그리고 나는 정 형과 따분한 얘기를 하고 있지. 왜 이렇게 된 것 같아?”
‘그야 네놈이 무식하니까 그렇지!’
연적하가 자기 옆에 오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임정영과 공지유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해 뭉그적거리다 그렇게 된 거다.
“모, 모르겠습니다.”
정덕행은 행여나 연적하의 비위를 거스르게 될까 봐 극도로 말을 아꼈다.
“내가 말했잖아. 그냥 그렇게 된 거라고. 아무 이유 없다니까.”
“아, 예.”
정덕행은 확실히 알았다.
연적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헛소리다.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 들면 안 된다.
그냥 ‘어디서 개가 짖는다’ 생각하고 흘려들어야 한다.
“저기 저거 불우산 아냐?”
갑자기 연적하가 손가락으로 운무를 머리에 이고 있는 산을 가리켰다.
“맞습니다.”
“다 왔네?”
“예.”
정덕행은 뛸 듯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정 형, 내가 이런 말 하기가 조금 그런데. 사람이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구별하는 게 맞습니다.”
“정 형이 불우산까지 짐도 들고, 길 안내도 해 줬잖아? 이거 계산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 나는 안면 있다고 공짜로 부려 먹는 사람들이 참 싫더라. 정 형은 어떻게 생각해?”
“저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덕행은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아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챙겨 주면 못 이기는 척하고 받고, 아니면 말 생각이다.
“아니야, 계산은 바로 해야지. 우리가 얼추 한 달 정도 같이 있었나?”
“예, 정확히는 오늘로 이십팔 일입니다.”
“그래, 계산하기 쉽게 한 달로 하자. 나는 잔머리에 약해서 크게 가야 돼.”
‘그게 아니라 계산을 못하는 거지.’
정덕행은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황송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연 대협, 본래 대인은 자잘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뭐 어쨌든 계산은 바로 하자고. 한 달 짐꾼 삶이 얼마지? 은자 두 냥 받나?”
“그 정도는 받습니다만, 굳이 챙겨 주시지 않아도…….”
“아냐, 아냐.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한다니까. 그리고 길잡이는 얼마 정도 받아?”
“한 달이면 은자 세 냥 정도는 줘야 합니다. 하지만 굳이 주지 않으셔도……. 그동안 제가 연 대협께 배운 게 워낙 많아서.”
“그래, 내가 정 형을 상남자로 만들어 줬지. 그렇다고 해서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면 안 돼. 짐꾼과 길잡이면 얼마를 줘야 해?”
“은자 다섯 냥입니다.”
“그래, 은자 다섯 냥 맞지? 더 없지? 딴소리 하면 안 돼?”
“예, 은자 다섯 냥입니다.”
“좋아. 그럼 이제 내가 받아야 할 돈도 계산해 보자.”
“예?”
정덕행이 황당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자신이 받아야 할 돈이라니?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한 달 동안 내가 정 형을 지켜 줬잖아. 내가 전에 호위 일을 해 봐서 알아. 그런데 이곳에서 호위가 얼마를 받는지 모르겠네? 한 달 동안 지켜 줬으면 얼마나 받아야 돼?”
“아니, 저는 연 대협께서 불우산까지 안내하라고 하셔서…….”
“그래서 너는 짐꾼에 길 안내비까지 받아도 되지만, 나는 국물도 없다? 그러니까 씨도 안 먹힐 병신 같은 소리는 하지 마라? 뭐 그런 거야?”
그제야 정덕행은 자신이 개 같은 놈에게 물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문의 제자도 때려잡을 정도로 강한 놈이 왜 하는 짓은 쓰레기인지 모르겠다.
“그, 그럴 리가요. 공과 사를 구별하자는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드려야지요. 연 대협께서 말씀해 주셔서 제가 큰 실수를 면했습니다. 상단의 호위들은 한 달에 은자 다섯 냥 정도를 받습니다.”
“소요종 고수도 은자 다섯 냥을 받아?”
“아, 아닙니다. 소요종의 고수분들은 아무리 못 받아도 그 열 배는 받을 겁니다.”
“그럼, 내가 받을 돈 오십 냥에서, 줄 돈 다섯 냥을 빼면 마흔……다섯 냥인가?”
그것도 계산이 잘 안 되는지 연적하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정덕행은 또 무슨 덤터기라도 쓸까 싶어 서둘러 돈주머니를 꺼냈다.
허둥지둥 세어 보니 은자 마흔다섯 냥이다?
‘이 개 같은 놈이 언제 내 돈주머니를 뒤져 봤나? 왜 이렇게 딱 맞지?’
결국 정덕행은 돈주머니를 통째로 넘겨 줘야 했다.
“정 형, 그동안 고생했어. 불우산이 앞에 있으니 이젠 돌아가도 돼. 언제 인연이 되면 또 만나자고. 여기서 그냥 가. 공 소저에게는 내가 잘 말해 줄게.”
“예? 예…….”
연적하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공지유는 임정영과의 대화에 빠져 돌아보지도 않았다.
산더미 같은 짐을 등에 지고 우두커니 서 있던 정덕행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탈탈 다 털렸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지?’
그때 불현듯 연적하의 말이 떠올랐다.
-그냥 그렇게 된 거야. 아무 이유 없어.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니 맞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