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93
593회. 입문제자는 동네북이니까
연적하는 공지유가 평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 기대하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왕왕 사람들의 기대나 희망과 동떨어질 때가 있다.
“스승 없어요.”
“없다고요?”
공지유가 눈을 동그랗게 치뜨고 연적하를 보았다.
연적하와 같은 엄청난 고수에게 스승이 없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녀의 물음에 신이승이 답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종문에서 무공의 재능보다 영기의 질을 우선시해서 그런 것일 게요.”
말을 하면서 그는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답답해하는 공지유와 달리 신이승의 눈빛은 담담하다 못해 냉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신 형의 말대로예요. 내 영기가 하품(下品)에도 들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연 대협 같은 분을 못 알아보다니! 사람들 눈이 삔 게 분명해요. 나 같은 사람도 청요 노조의 제자가 되었는데…….”
하지만 신이승은 동의하지 않았다.
“스승님께서는 경지가 올라갈수록 영기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셨소. 그래서 진인(원영의 경지)까지는 노력으로 가능하나 그 이상은 타고나야 한다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윗분들이 거두지 않았을 게요.”
“…….”
공지유는 그의 말에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연적하의 상황이 답답해서 해 본 소리인데 왜 자꾸 영기 타령인지 모르겠다.
“그럼 지금 어디에 계시는 거예요?”
공지유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살폈다.
뒤늦게 그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과 달리 구김이 많고, 심지어 고약한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았다.
“소격각에서 일하고 있어요. 입문 제자들은 십 년 동안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일을 해야 한다더라고요. 공 소저와 신 형은 무슨 일을 하고 있어요? 나는 뒷간 청소를 맡았는데.”
공지유가 머뭇거릴 때 신이승이 나섰다.
“스승을 모신 제자들에게는 딱히 주어진 일이 없소. 스승을 모시는 게 일이라면 일일까. 그런데 나의 경우 초요산 제군께서 오히려 챙겨 주시는 터라, 감사히 받고만 있소. 공 소저는 어떻소?”
“저도……. 따로 맡은 일이 없어요.”
공지유는 연적하의 안색을 살폈다.
혹시 그가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 봐 신경이 쓰여서다.
하지만 연적하는 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봐 아는데 저건 관심이 눈곱만큼도 없을 때 짓는 표정이다.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그는 본래 체면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지금도 불공평하다고 툴툴거릴지언정 부끄러워하지는 않을 게다.
“허면 혹시 지금도 일을 하던 중이었소? 아까부터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은데.”
신이승의 말에 연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세심정의 청소를 끝내고 봉황정으로 가기 전에 잠깐 쉬던 중이에요.”
“봉황정이라면 여제자들의 숙소가 아니오?”
“예. 왜요?”
“별건 아니오. 그저 여제자들 숙소의 뒷간 청소를 남자가 한다는 게 의외라.”
신이승은 말을 얼버무렸다.
당사자가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니 이야기를 계속 끌고 가기도 뭐했다.
“그럼, 나는 명상을 하러 가 보겠소. 스승님께서 일 년 이내에 원영을 이루라고 하셔서.”
‘일 년’이라는 말에 공지유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신이승을 보았다.
“어머, 일 년요? 그게 가능해요? 빠른 사람도 칠팔 년이라고 하던 데.”
“그야 평범한 입문제자들의 이야기고. 제군과 존자의 제자들은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일이 년이면 원영을 만든다고 하더이다. 영기의 질이 다르니까.”
말과 함께 신이승은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영기의 자질이 하품에도 들지 못한 그에게는 실로 불편한 이야기일 터였다.
그런데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한 표정이었다.
애써 영기의 질을 강조한 자신만 가벼운 사람이 된 느낌이다.
제군을 스승으로 둔 것도, 상품의 영기를 가진 것도 자신이건만 기분이 영 그렇다.
“공 소저도 가 봐야 하지 않소? 청요 노조의 기대가 클 텐데.”
신이승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공지유를 보았다.
연적하와 그녀가 석종(石鐘)을 맞바꾼 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눈치 빠른 공지유는 바로 알아차렸다.
은근 불쾌했지만 틀린 말이 아닌지라 반박하지 못했다.
“연 대협, 저도 명상을 하러 가야 할 것 같아요. 연 대협은 언제 천애곡에 가세요?”
“나는 오후에 가 보려고요.”
“아, 오후에 가시는구나. 저는 스승님이 오전에 다녀오라고 하셔서…….”
“가 봐요. 공 소저는 총명하니까 좋은 결과를 얻을 거예요.”
“감사해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연 대협도 잘될 거예요.”
잠시 후 신이승과 공지유가 천애곡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부럽다, 부러워. 스승이 있으면 일을 안 해도 되는구나. 어디 괜찮은 스승 하나 없나.”
***
점심 무렵.
봉황정의 청소를 끝내고 그늘에서 쉬던 연적하는 식당으로 향했다.
음식을 받으러 뒷문으로 가니 벽초를 비롯한 소격각 사람들이 몇 보였다.
오전에 수련을 해서 그런지 표정들이 좋았다.
벽초가 손을 들어 알은체를 했다.
“어떠냐? 일은 할 만하냐?”
“그저 그래요. 그런데 스승이 있으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요?”
“맞다. 스승을 모셔야 하기 때문이라지만 사실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게다. 스승을 제자들이 모시더냐? 구요각과 소격각에서 다 해 주는데.”
“수련보다 스승 하나 구하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요.”
“그렇기는 하다만 소격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소격각에 떨어질 정도면 영기가 밑바닥이라는 뜻인데, 누가 그런 사람을 제자로 삼겠느냐?”
“아, 그놈의 영기, 영기. 아주 귀에 딱지가 앉겠어요.”
“본래 신선술은 영기가 근원이라 어쩔 수 없다. 그러니 괜한 생각 말고 명상이나 열심히 해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깨달음이 있으면 나에게도 슬쩍 알려 주고.”
“사형이 저에게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헐! 이십오 년이나 제자리걸음인 나에게 뭘 배우겠다고. 나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겠다면 모를까? 뭘 배울 생각은 하지 마라.”
두 사람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깨달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도 음식은 나오지 않았다.
소격각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런지 전과 달리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다 지친 연적하가 막 욕을 하려는데 뒷문이 활짝 열렸다.
잠시 후 식판을 받아 든 연적하는 공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왜 그리로 가느냐? 이쪽으로 오지 않고?”
벽초가 음습한 구석으로 가자고 불렀지만 연적하는 응하지 않았다.
식사라도 좀 쾌적한 곳에서 하고 싶어서다.
자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 황인보가 보였다.
같은 소격각의 사람이래도 황인보는 벽초와 달리 양지바른 자리를 좋아했다.
연적하는 황인보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식사에 열중하던 황인보가 힐끔 돌아보았다.
“오전에 일을 한다고?”
“예.”
“식사 후에는 천애곡으로 가겠구나?”
“그러려고요.”
“들었는지 모르겠구나. 오늘 병휴가 냄새를 풍긴다는 이유로 천애곡에서 맞았다. 소격각의 신입들이 오면 늘 겪는 일 중에 하나지.”
“맞았다고요?”
“몰랐나 보군. 대라각의 오래된 고질병이다. ‘너희들 때문에 고생했으니 맛 좀 봐라’라고나 할까. ‘비승과해’ 참가자는 건드리지 못하지만, 입문제자는 동네북이니까.”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또 뭐냐?”
황인보의 반문에 연적하는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소요종의 지배자인 태을 존자가 ‘무한 경쟁’과 ‘동문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했는데 안 될 게 또 뭐란 말인가.
“병휴는 좀 어떤가요?”
“식사를 하러 오지 않은 걸 보니 많이 다친 모양이다.”
“천애곡이면 보는 사람도 많았을 텐데……. 말리는 사람도 없었나 봐요?”
“너라면 모르는 사람들의 싸움을 말리겠느냐?”
“모르는 사람들이라뇨? 그래도 동문이잖아요. 흰 띠를 맨 신입이 맞는 걸 구경만 해요?”
“연단 이 성까지 흰 띠를 매기에 대라각 사람들이 아니면 신입을 알아보기 어렵다.”
“아…….”
하기야 자신이 오가며 본 흰 띠만도 백여 명이 넘었다.
‘비승과해’를 운영한 대라각 사람이 아니면 신입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대라각 사람들 참 구질구질하게 노네요.”
신입의 얼굴을 안다는 걸 그런 식으로 악랄하게 활용하다니!
“그래도 어쩌겠느냐? 소격각 각주인 백무영 진인은 대라각의 주역봉 노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대라각에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병휴에게 깨끗이 씻고 다니라 할 게다.”
“와아! 정말 일할 맛 안 나는 소리네요.”
“종문 인심이 그런 걸 어쩌겠느냐? 그러니 너도 당분간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명상을 하도록 해라. 괜히 좋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눈치 없이 굴지 말고.”
“난 어차피 자리 안 따져요. 절벽이 그렇게 큰데 자리는 무슨.”
“그럼 됐다. 내가 전에 알려 준 자리 기억하지? 거기라면 다른 사람들도 가까이 오지 않으니까 그곳에서 명상을 하도록 해라.”
연적하는 답하지 않았다.
황인보가 가르쳐 준 자리는 바닥이 고르지 않아 좌선을 하기에 불편했다.
“왜 답이 없어? 그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냐?”
“바닥이 너무 울퉁불퉁해서요.”
“알아서 해라. 시비가 일어나면 항상 소격각만 손해를 본다는 거 명심하고.”
“사형,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때려도 돼요?”
“누굴 때리게?”
“누가 시비를 걸면 같이 때리려고요. 그냥 순순히 맞아 줄 수는 없잖아요.”
“종문에서 배분은 호칭 이상의 의미가 없다. 오히려 아랫사람에게 맞은 윗사람을 비난할 게다. 그런 실력으로 지금까지 잘도 살아남았다고.”
“싸움에 아래위가 없다는 말이네요?”
“아래위를 따질 거면 관인(官人)이 됐어야지. 종문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비웃음을 살 뿐이다.”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드네요.”
연적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싸움에서도 영기의 질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면 진짜 절망할 뻔했다.
***
천애곡.
미시 정(오후 2시).
청년 하나가 천애곡으로 휘적휘적 들어섰다.
연적하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연적하의 눈이 반짝였다.
뒤쪽 숲과 맞닿은 부분의 바위 위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나무 그늘에, 절벽이 잘 보여 명당 자리 같은데 별일이다.
하늘이 땀 흘려 일한 자신을 위해 예비해 둔 것일까?
연적하는 자연스럽게 바위로 다가갔다.
혹시나 누가 잠깐 자리를 비웠나 싶어 주변을 살폈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구석이겠지?’
물론 극도의 자기 합리화다.
소격각 사람들이 봤다면 미쳤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격각 사람들은 대부분 오전에 다녀가 그를 만류할 사람이 없었다.
편편한 바위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인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냄새부터가 달랐다.
나무 아래 그늘이 품고 있던 서늘하면서도 향긋한 꽃냄새가 폐부 깊숙이 밀려왔다.
뒷간 냄새를 맡다가 와서 그럴까?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대오각성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좋구나.’
그가 열반의 기쁨 속에서 ‘천애불문비(天涯不文碑)’를 응시하고 있을 때다.
돌연 뒤쪽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누군데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느냐? 이 시간이면 항상 내가 사용한다는 걸 몰랐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