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95
595회. 요령껏 하라는 말이다.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일홍(日江)의 폭발적인 힘에 지면이 한 자(약 30센티)나 아래로 푹 꺼져 있었다.
검서린 진인은 천천히 호흡을 조절하며 한편으로 연적하를 찾았다.
‘죽었겠지?’
조금 전까지 죽이고 싶었는데 막상 죽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의 지적은 옳았다.
천애곡에 누군가의 자리가 있을 리 없다.
태을 존자의 자리도 없는데 고작 진인에 불과한 자신이 자리 타령이라니.
누가 알까 두려울 정도다.
속으로 자신의 방종을 자책하던 검서린 진인의 얼굴이 굳었다.
먼지가 걷힌 뒤 드러난 연적하는, 마지막 모습 그대로였다.
연적하와 검서린 진인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순간 검서린 진인은 태산처럼 거대한 ‘검의 환영(幻影)’을 보았다.
흠칫 놀란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검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검서린 진인은 ‘검의 환영’이 만든 공포에서 깨지 못했다.
‘어떻게 방사(方士)가…….’
애써 진정시켰던 호흡이 점차 빨라졌다.
금방이라도 ‘검의 환영’이 다시 나타나 자신을 찢어발길 것 같았다.
그때 연적하가 청사로 검서린 진인을 가리켰다.
하지만 어딘지 몽롱한 그의 눈은 검서린 진인이 아니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천둔검의 마지막 구결은 ‘치심일허(置心一虛) 무사불변(無事不辨) 순상즉비(純想卽飛) 무중생유(無中生有) 허공득물(虛空得物)’의 스무자 글자다.
조금 전 연적하는 부지불식간에 그 중 여덟 자를 깨우쳤다.
강호에서의 오랜 명상이 ‘왕들의 하늘’에서 열매를 맺게 된 셈이다.
‘치심일허 무사불변’의 깨달음을 얻은 그는 무아지경에서 금방 깨지 못했다.
강호의 도가(道家)가 익히지 못했다는 천둔검의 비밀이 마침내 드러나는 것일까?
그는 계속해서 검결에 빠져들었다.
곧이어 ‘순상즉비 무중생유 허공득물’의 열두 자에 담겨 있던 비의(秘意)가 막 드러나려는 순간.
“멈추어라!”
천둥 치는 듯한 호통과 함께 두 사람 사이로 누군가 떨어져 내렸다.
수선당(修仙堂) 당주 무종 노조였다.
그 소리에 연적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처음 보는 노신선이 자신과 여자 사이에 서 있었다.
분위기가 싸하자 연적하는 재빨리 청사를 갈무리하고 노신선의 눈치를 살폈다.
높으신 분들 앞에서 버릇없게 굴어 봤자 자신만 손해인 까닭이다.
그제야 ‘검의 환영’에서 벗어난 검서린 진인이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무종 노조님, 초월전의 검서린이 인사 올립니다.”
무종 노조는 연적하를 한번 본 후에 검서린 진인에게 힐난하듯 물었다.
“소요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천애불문비’ 앞에서 싸움이라니? 이는 소요종의 역사상 없던 일이다. 무슨 철천지 원한이 있기에 때와 장소조차 가리지 못한단 말이냐?”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 제자의 부덕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무종 노조가 재차 묻자 검서린 진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윗사람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실은…….”
검서린 진인은 자리를 두고 연적하와 말다툼 벌인 일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그가 저에게 욕설을 하는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손을 썼습니다.”
무종 노조가 기막힌 얼굴로 검서린 진인과 연적하 방사를 번갈아 보았다.
진인이 천애곡에서 방자하게 행동한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방사 따위가 진인에게 욕설을 하다니?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무종 노조가 말했다.
“내가 소요종에 입문한 뒤로 수많은 싸움을 보았지만, 너희와 같은 사유는 처음이다. 검서린.”
“예.”
“천애곡이 네 것인 양 자리를 주장한 것은 잘못이다.”
“…….”
검서린 진인은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종 노조의 시선이 연적하에게로 향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연적합니다.”
“허리에 두른 띠를 보니 방사렷다?”
“예.”
무종 노조가 복잡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보통이 아님은 알았지만 하필이면 그 연적하일 줄이야.
연적하.
오래전에 제자를 통해 들은 이름이다.
며칠 전 ‘비승과해’가 열리던 날에는 출타 중이라 참가하지 못했다.
그 뒤에 따로 알아보니 ‘호색한’이란다.
무위는 뛰어나지만 타고난 영기가 저질이라 아무도 거두지 않았다나?
영기의 질은 차치하고, ‘호색한’이라는 말에 관심을 끊었다.
그랬는데 오늘 직접 보니 그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박했던 것 같다.
방사가 아무리 뛰어나도 진인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게 당연하다.
진인의 ‘영기’와 ‘상급 무공’을 생각하면 방사에게 밀릴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전 자신이 막지 않았다면 검서린 진인은 죽었을 것이다.
연적하의 검공은 진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방사가 진인을 죽인다?
그건 그야말로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는 격이다.
“소속이 어디냐?”
“소격각요.”
무종 노조가 복잡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영기가 하품(下品)만 됐어도 그를 제자로 삼겠다는 사람이 줄 섰을 게다.
“검서린 진인의 처사가 그릇됐다 해도 윗사람에게 욕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아, 그게, 종문은 능력이 신분이라고 해서요. 내가 지금은 방사지만 방사로 끝날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진인에게 욕을 했다? 하면 언젠가는 태을 존자에게도 욕을 하겠구나?”
물론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나불거리는 연적하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극단적인 비유를 든 것뿐이다.
그런데 저놈의 입방정에는 한계가 없었다.
“헤헤, 제가 원래 남에게 일방적으로 당해 주는 성격이 아니라서. 열 대 맞더라도 한 대 때리자, 뭐 그런 생각이라.”
“…….”
오히려 말을 꺼냈던 무종 노조가 당황했다.
저건 ‘상대가 태을 존자라 해도 맞서 싸우겠다’는 소리였다.
그에게 가지고 있던 동정과 연민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소격각에 있다’는 말에 제자로 거두어 볼까 했는데, 그럼 안 될 것 같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자존감이 도를 넘었다.
무종 노조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연적하와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어험! 여러 사람과 어울려 지내다 보면 때로는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다른 이들은 성격이 없어서 참고 사는 줄 아느냐? 모두가 성질대로 살면 세상에 어느 조직이 버텨 나겠느냐? 너에 대한 처분은 따로 내릴 것이니 자중하며 기다리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그런데 신선 어르신?”
“나는 수선당의 무종 노조니라.”
“예, 무종 노조님. 그런데 지금처럼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찾아 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다 해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칙이 있는 법이다. 네놈처럼 아무나 성질대로 들이받으라고 그런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 그럼 언제 참고, 언제 들이받아야 하나요?”
무종 노조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연적하의 순진무구한 눈을 보니 정말 몰라서 묻는 것 같았다.
‘이놈 눈치가 없는 건가? 아니면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인가?’
문득 태을 존자에게 ‘소요종 미녀가 누구냐?’고 물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눈치도 없고, 궁금한 것도 못 참는 놈이었다.
“무엇을 하는 때와 장소를 가리라는 말이다. 천애곡은 소요종의 보물인 ‘천애불문비’가 있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싸우다가 ‘천애불문비’에 손상이라도 가면,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예?”
연적하가 무종 노조를 빤히 보았다.
주저하던 무종 노조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나직이 말했다.
“요령껏 하라는 말이다. 요령껏.”
“아!”
연적하는 알 듯 말 듯 했지만 더 물으면 바보 취급당할 것 같아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연적하의 문제를 일단락 지은 무종 노조가 이번에는 검서린을 향해 돌아섰다.
“검서린, 한산월 제군님의 얼굴을 봐서 오늘 일은 더 묻지 않겠다. 돌아가 반성하도록 해라. 이후로 연적하 방사와 다시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건 연적하가 아니라 검서린 진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한 소리였다.
“……예.”
검서린 진인이 맥 빠진 얼굴로 답했다.
솔직히 싸우라고 누가 등을 떠밀어도 연적하와 다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 거대한 ‘검의 환영’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물러들 가라.”
무종 노조의 명에 연적하와 검서린 진인은 천애곡을 떠나갔다.
잠시 후 무종 노조가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중년인에게 물었다.
“너는 뭔데 거기 있느냐?”
곽종산 노사는 퉁퉁 부은 얼굴을 손으로 더듬으며 답했다.
“저는 대라각의 제자로…….”
“명상을 하러 왔으면 명상이나 할 일이지, 무슨 구경이 났다고 거기 서 있는 것이냐?”
“아, 예.”
곽종산 노사는 찍소리도 못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연적하 방사에게 맞았다고 해 봐야 국물도 못 건질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무종 진인의 시선이 문득 연적하가 서 있던 지면으로 향했다.
사방 일 장(약 3미터) 넓이의 땅이 한 자나 푹 꺼져 있었다.
저렇게 엄청난 검공을 맨몸으로 받아 내다니?
‘허어! 무슨 방사가…….’
고개를 젓던 무종 노조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산에 있던 흙더미가 날아와 눌린 자리를 흔적도 없이 메웠다.
무종 노조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든 걸 원상태로 돌려놓고 사라졌다.
***
그날 저녁.
여느 때처럼 공터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연적하는 숙소로 돌아가려다 멈칫했다.
침상에 누워 있는 병휴가 떠올라서다.
그는 식당 뒷문으로 돌아가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병휴를 위해 음식을 챙겼다.
산속이라 해가 금방 져서 소격각에 도착할 즈음에는 벌써 어두웠다.
방으로 들어간 그는 탁자 위에 먹거리를 올려놓고 병휴에게 말했다.
“병 형, 내가 저녁을 받아 왔는데. 좀 먹어요.”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다 굶어 죽어요.”
“예, 이대로 죽을랍니다. 소격각에서 뒷간 청소를 하는 것도 괴로운데, 냄새를 피운다고 맞았으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죠.”
“뭐 그런 일로 죽어요? 내가 오늘 대라각 사람 하나를 패 줬으니까 기분 풀어요.”
“대라각 사람을요? 언제, 어디서요?”
세상과 담쌓은 듯 벽 보고 누워 있던 병휴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아까 낮에 천애곡에서요. 갑자기 주먹질을 하길래 그냥 받아쳤어요. 한 방 맞고 나가 떨어지더라고요. 그걸 병 형이 봤어야 하는데.”
“잘했습니다. 그런데 당분간은 천애곡 근처에도 가지 말아요. 몸에 똥도 좀 찍어 바르고.”
“왜요?”
“그래야 대라각 사람들이 안 건드리죠. 분명히 복수하겠다고 연 형을 찾으러 다닐 텐데.”
“에이, 설마요. 병 형이 맞고 왔지만 소격각에서 복수해 주겠다고 나선 사람은 없었잖아요.”
각주인 백무영 진인도 모른 척한다는 데 무슨 복수?
다른 곳의 사정도 소격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그야 여기가 소격각이니까 그런 거죠. 다른 곳은 자기들끼리 얼마나 챙겨 주는데요. 우리가 괜히 동네북이 된 줄 압니까? 누가 맞고 와도 다들 나 몰라라 하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부러움’으로 시작된 말은 ‘보호받지 못한 자의 울분’으로 끝났다.
병휴의 절절한 말이 연적하의 심금을 울렸다.
“냄새 풍긴다고 병 형을 때린 놈이 누구예요? 내가 병 형하고 똑같이 만들어 줄게요.”
“됐습니다. 소격각 선배들도 못 하는 일을……. 말만이라도 고맙네요.”
“진짜라니까요. 내가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에요.”
연적하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지자 병휴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천주금 노사예요. 하급 무공에 통달했다고 하는데, 정말 괜찮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