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596
596회. 노사라고 불러 줘요
병휴가 감동에 휩싸인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자신을 위해 복수를 해 주겠다니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괜찮겠냐고요? 당연하죠. 걱정은 내가 아니라 그 천주금이 해야 할 거예요.”
“연 형이 정말 내 복수를 해 준다면, 한 달 동안 연 형의 일을 대신 해 주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연적하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의리도 지키고, 뒷간 청소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일석이조가 따로 없다.
“굳이 그래야 마음이 편하겠다면, 그렇게 해요. 세심정과 봉황청 청소를 오전에 해야 한다는 거 알죠?”
“압니다. 복수만 확실히 해 준다면 오전이 아니라 새벽에라도 하겠습니다.”
“좋아요. 복수해 줄 테니까 일단 만두부터 먹어요.”
그제야 병휴는 침상에서 내려와 탁자로 다가왔다.
그가 다리를 질질 끌며 다가오자 연적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런 다리로 청소가 가능할까 싶어서다.
“병 형, 북명전에는 가 봤어요?”
삼전(三殿)의 하나인 북명전에서는 선단과 약을 제작할 뿐 아니라 환자의 치료도 병행했다. 속세로 치면 의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예, 오늘 갔더니 속보단(速保丹)이라는 걸 세 개 주더군요. 뼈가 부러지지 않았으면 하루에 하나씩 사흘이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연적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복수가 끝나도 사흘은 자신이 청소를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병휴는 배가 고팠는지 식은 만두를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었다.
그런 그를 연적하가 안쓰러운 눈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종문의 제자가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는지 죽어도 모를 게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병휴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하아! 소요종에 입문하면 신선처럼 살 줄 알았는데……. 이런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가문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며칠 동안 잔치를 벌였을 텐데. 우리가 소격각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원영(元嬰)을 만들면 된다잖아요.”
“연 형은 자신 있습니까? 나는 벽 사형을 생각하면 잠도 잘 안 옵니다.”
“벽 사형이 특이한 거예요. 늦어도 십 년이면 원영을 만든다고 하던데.”
“하아! 내가 원영을 만들어 이 띠를 풀어 버리면, 소격각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눌 겁니다. 더럽고, 의리도 없고, 아, 연 형은 빼고요.”
이제 기분이 풀렸는지 병휴는 조금씩 농담을 했다.
연적하는 그제야 침상으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오늘 운 좋게 깨달은 천둔검의 요결을 조금 더 파고들기 위해서다.
무종 노조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머지 열두 자의 오의(奧義)도 알 수 있었을 게다.
그래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구천구검을 믿는 마음도 있지만, 느낌상 천둔검의 완성이 머지않은 것 같아서다.
***
연적하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검서린 진인은 소요종 신진 고수들의 우상이었다.
소요종의 혈기 왕성한 남자들이 그녀를 연모했다면, 여자들은 흠모했다.
그들은 검서린 진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다.
천애곡에서의 다툼이 신진 고수들 사이에 퍼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소문이 조금 이상하게 났다.
-소격각의 방사 하나가 검서린 진인의 미모에 반해 껄떡이다가 맞았다.
-그가 죽기 직전 무종 노조가 개입하여 싸움이 흐지부지 끝났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검서린 진인이 일방적으로 몰아세운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겉으로만 보면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수세를 취하던 연적하가 반격하기 직전에 무종 노조가 개입했으니 말이다.
여하튼 검서린 진인에 대한 애정이 있는 고수들은 소격각이라면 이를 갈았다.
그들은 고결하고 순결한 검서린 진인이 소격각에 더럽혀졌다고 생각했다.
봉황정.
담여화 노사(연허)는 평소보다 빨리 천애곡에서의 수련을 끝내고 봉황정으로 돌아왔다.
‘천애불문비’ 앞에서의 명상은 내일도 할 수 있지만, 응징에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봉황정 앞길을 응시했다.
‘소격각의 연적하라고 했겠다.’
얼마 전 경람 노사에게 봉황정 뒷간 청소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나온 이름이 연적하였다.
‘더럽고 냄새나는 놈이 감히 검서린 진인에게 침을 흘리다니…….’
다른 사람이 알고 찾아오기 전에 먼저 잡아 족칠 생각이다.
그래야만 분이 풀릴 것만 같았다.
사시 말(오전 11시)쯤 됐을까?
봉황정 앞의 오솔길로 왜소한 체구의 남자 하나가 타박타박 걸어왔다.
잔뜩 구김이 간 옷차림을 보니 소격각 사람이다.
정상적인 남자라면 저런 몰골로 여자들 숙소를 방문하지는 않을 테니까.
담여화 노사는 바람처럼 튀어나가 청년의 앞을 막아섰다.
“멈춰라!”
연적하가 멀뚱멀뚱 여자를 보았다.
경람 노사가 잠잠해지니 새로운 얼굴이 잔소리를 이어 가려는 모양이다.
“네가 소격각의 연적하냐?”
“그런데요?”
“네 죄를 네가 알렷다!”
“뒷간이 그렇게 더러워요?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 건데.”
경람 노사 때를 떠올린 그는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고 침착하게 응대했다.
그러자 담여화 노사가 ‘흥!’ 하고 냉소를 치며 팔을 뻗었다.
말하다 말고 여자가 대뜸 멱살을 잡으려 하자 연적하는 가볍게 쳐 냈다.
“감히 방사 주제에 저항을 해? 과연 듣던 대로 대담한 놈이로구나!”
“청소하러 온 사람한테 왜 그러는데요? 불만이 있으면 말로 하라고요. 누군 성질이 없어서 말로 하는 줄 알아요?”
순간 담여화 노사의 눈두덩이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방사 주제에 노사 앞에서 성질 운운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단단히 벼르고 온 담여화 노사는 벼락처럼 검을 뽑아 들었다.
“네놈이 검서린 진인께 지분거릴 정도도 간덩이가 부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오늘 너의 팔 하나를 잘라 검서린 진인에 대한 불경과…….”
가만히 듣고 있던 연적하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뭐래? 뒷간 청소 문제로 찾아온 거 아니었어?”
“본녀가 고작 뒷간의 일로 너 따위 놈을 기다린 줄 아느냐! 검서린 진인께 죄를 지었으니 벌을 달게 받아라!”
말과 함께 담여화 노사는 중급 검공인 명월요공(明月遙空)을 펼쳤다.
그녀의 검 끝에 달덩이 같은 백광(白光)이 맺히는가 싶더니 화살처럼 날아갔다.
연적하는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위치를 바꾸었다.
하지만 백광은 마치 이기어검처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백광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연적하는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손을 치켜세웠다.
척 봐도 백광을 쳐 내려는 모양새다.
담여화 노사는 권장으로 감당할 수 없게끔 명월요공에 더 많은 내력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백광은 감히 마주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빛을 뿌렸다.
백광이 심상치 않자 연적하는 접인술을 펼쳤다.
품 안에 있던 청사가 스르륵 빠져나와 그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적하는 즉시 구천세법 육 식 천뢰무망(天雷無望)으로 백광을 받아쳤다.
우르르릉! 콰쾅!
천뢰무망에 맞은 백광이 산산조각 나 소멸했다.
그 반탄력으로 담여화 노사의 신형이 한차례 크게 휘청거렸다.
‘크윽! 무슨 검공이 이렇게 강하지?’
그녀는 불신의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소요종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검공이었다.
속세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종문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래서 종문 제자들은 입문과 동시에 종문의 무공을 다시 익힌다.
자신이 익힌 명월요공도 그중 하나였다.
“너 방금 어떤 수법을 사용한 거지? 말해 봐라! 설마 다른 종문의 무공이었느냐!”
그녀는 연적하가 다른 종문의 검공을 익혔다고 생각했다.
소요종의 중급 검공이 속세의 무공에 패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여자야, 그냥 당신이 약한 거야. 어디서 다른 종문 타령이야?”
“그, 그럴 리가! 속세의 검공으로 명월요공을 꺾었다고? 소요종의 중급 검공이 속세의 무공보다 못하다는 말을 믿으라는 거냐!”
“말귀가 어둡네. 명월요공인지 뭔지가 약한 게 아니라, 당신이 약해서 그런 거라고. 당신이 펼친 건 명월(明月)이 아니라 등촉(燈燭, 촛불과 등불)이야. 자기가 부족한 걸 탓해야지 어디서 유언비어를 퍼트리려고 그래?”
“허, 헛소리하지 마!”
순간 연적하가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담여화 노사의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담여화 노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뒤통수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이봐, 종문은 약육강식이라면서? 내가 당신을 살려 줘야 하는 이유를 하나만 대 봐.”
뒤늦게 담여화 노사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연적하의 검공이 속세의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아! 아무리 당신이 제멋대로라도 봉황정 앞에서 나를 죽이지는 않겠죠?”
내용은 둘째치고, 바뀐 그녀의 말투에 연적하는 슬며시 손을 뗐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니고, 고분고분해진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다 좋은데, 선배. 나 검서린 진인에게 지분거린 적 없어. 이래 봬도 임자 있는 몸이라고.”
“담여화 노사라고 불러 줘요.”
“담여화 노사 선배. 나 임자 있는 몸이라고요. 그러니까 이상한 소문 퍼트리지 말아 줘요.”
담여화 노사는 복잡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호색한이라고 들었는데 말투며 눈빛은 그런 쪽과 거리가 먼 느낌이다.
“좋아요. 그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검서린 진인께 무례하게 굴지 말아요. 그럼 나도 당신의 부탁을 들어줄게요.”
“그 말은 검서린 진인이 잘못을 해도 못 본 척하라는 건가요?”
“검서린 진인은 잘못을 할 분이 아니에요.”
“아니긴 개뿔. 담여화 노사 선배 들어 봐요. 어제 내가 천애곡에서 명상하고 있었어. 그런데 검서린 진인이 뒤늦게 와서 하는 말이, 자기 자리니까 다른 데로 가래. 그래서 비켜 줬더니, 이번에는 자기 자리에서 뒷간 냄새가 난다고 시비를 걸더라고. 그래서 싸웠어요.”
반말과 존댓말이 뒤섞여 있었지만 담여화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방금까지 죽일 듯 싸웠는데 그가 말투가 대수일까.
그보다는 천애곡에서 벌어진 싸움의 내막을 알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듣고 보니 결국은 자리다툼이 원인이다.
구름 위를 노닐 것 같은 검서린 진인에게 그런 인간적인 면모가 있을 줄이야!
실망보다는 검서린 진인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그런 복잡 미묘한 느낌이다.
“어쨌든 소요종에서 잘 지내고 싶으면 검서린 진인께 무례하게 굴지 말아요.”
“젠장, 검서린 진인이 무슨 진선(眞仙)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시네. 빨리 방사를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담여화 노사는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구시렁거리던 연적하는 뒷간 청소에 늦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정오 무렵, 봉황정의 청소를 끝낸 연적하는 잠시 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
‘일이 곧 수련’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내공을 쓰지 않았더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마치 병휴의 말대로 몸에 똥을 찍어 바른 형국이다.
코를 틀어막고 입으로 숨을 쉬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병휴의 복수를 마무리하고 ‘천애불문비’의 비밀을 터득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는 바람처럼 대라각을 향해 달려갔다.
***
대라각.
단숨에 대라각으로 이동한 연적하는 처음 만난 사람을 불러 세웠다.
“거기, 선배님! 잠깐만요.”
백제의 진인의 부름을 받고 분주하게 걸어가던 한청 노사가 우뚝 멈춰 섰다.
‘선배님’이라니?
소요종에 입문한 지도 어언 오십 년.
그건 방사 시절에도 들어 본 적이 없는 꽤나 낯선 호칭이었다.
“누구…… 방사냐?”
돌아보던 한청 노사가 뜨악한 얼굴로 청년을 보았다.
선배라기에 최소한 노사는 된 줄 알았다.
그런데 허리에 띠를 두른-그것도 무려 흰 띠다-방사 나부랭이가 자신을 선배라고 칭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