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02
602회. 깨달음은 시간하고 별 상관이 없다.
연적하는 벽초 사형이 뒷간 청소의 일로 자신을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시간에 벽초 사형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병 형이 무슨 실수를 했나? 아니면 차 사형이 왜 남의 구역을 하냐고 항의를 했나?’
짧은 시간에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기우에 불과했다.
“봉황정은 모르겠고, 어제의 일로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다.”
“어제의 일요?”
연적하는 내심 안도했다.
청소와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니 긴장이 탁 풀렸다.
“소격각에 실망했느냐?”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렇다면 미안하구나. 변명 같지만, 나는 소격각 생활이 이십오 년이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소격각 생활을 십 년 이상 한 사람도 열 명이나 되지. 우리같이 무능한 사람들은 윗분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
연적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종문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벽초의 말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궁금하기는 했다.
정말 부당한 대우를 항의하는 것만으로도 불이익을 당하는지 말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벽초는 계속해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늘어놓았다.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소리지만 그는 진지했다.
“……연 사제가 위로 올라가서 좋지 못한 풍토를 바꾸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연적하의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연적하는 ‘부조리를 참는 사람’보다 ‘부조리에 맞서는 사람’을 좋아했다.
“미안한데 사형, 나는 칠각을 개혁하러 온 사람이 아니에요. 솔직히 칠각의 문제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어요. 내가 병 형의 복수를 도와준 건 그냥 인지상정 때문이에요. 그런데 사형도 알다시피 나와 소격각 사이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아니에요?”
연적하가 빤히 벽초를 응시하자 벽초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허어! 칠각의 다툼으로 비화되는 걸 막은 대신에 연적하를 잃었구나.’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리 속이 쓰린지 모르겠다.
“더 할 말 있어요? 없으면 가 보게요.”
“그, 그래. 어딜 가던 중이냐?”
“점심 먹으러요. 사형은 안 가요?”
“아, 가야지. 먼저 가거라. 나는 소격각에 들렀다가 갈 생각이다.”
벽초 방사는 소격각을 핑계로 그와의 동행을 거절했다.
그와 함께 식당에 갔다가 구요각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서다.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데 연적하와의 동행이라니!
‘소격각의 터줏대감이라는 소문만으로도 충분하지.’
그는 소요종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연적하와 구요각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예, 그럼 가 볼게요.”
연적하는 미련없이 돌아섰다.
같은 방을 쓰고, 뒷간 청소까지 대신해 주기로 한 병휴라면 모를까? 벽초 사형이 점심시간에 뭘 하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다.
***
점심을 먹기에 조금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소담관(천주봉의 식당)은 한산했다.
연적하는 정문과 뒷문을 두고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뒷문으로 향했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자신이 없어서다.
뒷문에서 기다리던 몇몇 소격각 사람들이 어색한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연적하는 그들에게 눈인사를 보낸 뒤 가까운 나무 등걸에 걸터앉았다.
멍하니 앉아 땅바닥에 지나가는 개미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연 형.”
돌아보니 자신을 대신해 세심정과 봉황정의 청소를 맡은 병휴였다.
“아, 병 형. 일은 어때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연적하는 떠넘긴 일의 결과부터 확인했다.
“할 만합니다. 아까 봉황정에서 여제자분들을 만났는데, 새로 바뀌었냐고 묻더라고요. 한 달만 바꿔서 하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하하!”
“아.”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 달간 대신해 주기로 했다면 이상하니 그냥 바꿨다고 한 모양이다.
두 사람이 노닥거리는데 뒷문을 열고 구요각의 견우 방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연적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묵례를 했다.
얼떨결에 연적하가 고개를 까딱이자 보고 있던 병휴가 호들갑을 떨었다.
“여어! 구요각 숙수들이 먼저 인사하는 건 처음 보네요.”
“인사가 뭐 대수라고요.”
“소격각에는 큰일이죠. 아무도 알은체 안 하잖아요.”
노닥거리던 두 사람은 견우 방사가 나누어 주는 식판을 들고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연적하는 바로 음식을 먹지 않고 한참 이리저리 살폈다.
“안 먹고 뭘 그렇게 봅니까?”
“뭐 이상한 거 들었을까 봐요. 어제 나랑 저 사람들이랑 한바탕 했잖아요.”
“아! 설마, 그렇다고 음식에 장난을 쳤으려고요.”
말과 달리 병휴도 찜찜한 얼굴로 자기 음식을 이리저리 파헤쳤다.
그 모습을 본 연적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 형님들이 숙수들과는 말싸움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젠장…….”
“그래도 인사할 때 보니까 그럴 얼굴은 아니던데요? 그냥 믿고 먹읍시다.”
“그래야겠죠?”
머뭇거리던 연적하는 음식을 떠서 입에 넣었다.
돌이나 머리카락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았지만 의심을 해서 그런지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럭저럭 식사를 마칠 즈음 병휴가 물었다.
“연 형은 오후에 뭘 할 계획입니까?”
“무궁전에 들렀다가 천애곡으로 가려고요.”
“무궁전요?”
“거기에 소요종의 무경서가 있대요. 신분에 맞는 건 자유롭게 열람도 가능하고요.”
“그래요? 나도 나중에 한번 가서 읽어 봐야겠다.”
“병 형은 오후에는 용화봉으로 가야죠? 너무 시간이 부족한거 아니에요?”
연적하는 병휴가 힘들다고 하면 줄여 줄 생각이었다.
복수를 대신해 주었다는 이유로 그의 수련 시간을 빼앗는 게 미안해서다.
“괜찮습니다. 아침에 반 시진(1시간)가량 천애곡에서 명상을 했습니다. 오후에도 잘하면 한 시진(2시간) 이상 가능할 것 같고요.”
“하루에 한 시진 반으로 괜찮겠어요?”
“깨달음은 시간하고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십오 년을 봐도 모르는 분이 계시니까요.”
연적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 벽초 사형의 비유는 참으로 시의적절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식판을 반납하고 헤어졌다.
***
천주봉.
무궁전.
무궁전은 왕의 궁전을 보는 것처럼 크고 화려해서 입이 쩍 벌어질 지경이었다.
하얀 띠를 맨 연적하가 두리번거리자 적색의 띠를 맨 방사가 다가왔다.
“무슨 일로 왔느냐?”
“아, 무경서를 좀 열람하려고 왔는데요. 너무 커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무궁전은 와 본 적이 있느냐?”
“처음 와 보는데요?”
“너는 언제 입문했느냐?”
“올해요.”
“신입이 용케도 무궁전을 알고 찾아왔구나?”
“각주님이 무궁전에 가면 무경서를 열람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오호! 어느 각이기에 신입에게 그런 것까지 가르쳐 주셨을꼬?”
“소격각요.”
선후배 간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딱 거기까지였다.
적색 띠를 맨 중년 남자, 목강산 방사가 어색한 얼굴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담장 옆에 전각이 보이느냐?”
“예.”
“방사들을 위한 무경서는 그곳에 있다. 가면 사서(司書)가 알려 줄 게다.”
말을 마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연적하는 돌변한 상대의 태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소격각이라고 하면 십중팔구는 다 저렇게 행동하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만류각(萬流閣).
전각에 붙어 있는 현판만 봐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 것 같았다.
온갖 잡다한 무경서를 다 끌어다 모아 놓았으리라.
계단으로 올라가자 작은 탁자 뒤에 앉아 책을 읽던 중년인이 장부를 들이밀었다.
“소속과 직책, 이름을 차례로 적어라.”
연적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붓을 들어 ‘소격각 방사 연적하’라고 썼다.
기록을 확인한 중년인, 석동천 방사가 연적하를 힐끔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언제 입문했느냐?”
“올해요.”
“규칙을 설명해 주마. 만류각을 비롯한 무궁전의 책들은 전각 밖으로 가지고 가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을 기회를 주어야 하니까. 하지만 필사는 가능하다.”
“필사한 걸 가지고 나가는 건 괜찮은가 봐요?”
“규정상 그렇다. 하지만 필사를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곳의 책이 천고의 절학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으니까.”
“아, 예.”
“무궁전의 서각(書閣)은 사시 초(오전 9시)에 열고, 유시 초(오후 5시)에 닫는다. 더 궁금한 게 있느냐?”
“없는데요.”
그러자 석동천 방사가 가 보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연적하는 꾸벅 인사를 한 후에 안 쪽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한가해 보이던 외부와 달리 만류각의 내부는 방사들로 바글거렸다.
연적하는 서두르지 않고 빽빽하게 세워진 서가(書架) 사이를 돌아다녔다.
소요종의 초급 공법을 모아 놓은 서가가 따로 있었는데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책을 가까이하지 않아서 그런지 두툼한 책은 보기만 해도 질렸다.
그는 그중에 가장 얇은 책 하나를 뽑았다.
금단양신진결(金丹陽神眞訣).
분명 처음 보는 책인데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든다.
곰곰 생각하던 연적하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석종(石鐘)에 새겨져 있던 글귀였다.
주역봉 노조는 은소선이 무려 삼백 년 만에 맞추었다고 칭찬을 했었다.
내용이 많지 않으니 누군가 필사해서 속세에 반출했던 걸까?
‘아니지.’
종문이 그렇게 허술할 리가 없다.
시험으로도 내고, 태을존자가 칭찬한 걸 보면 소요종에서 허락한 것일 수도 있겠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연적하는 ‘금단양신진결’을 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창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에게 누군가 다가와 알은체를 했다.
“연 대협? 다시 뵙네요.”
귀에 익은 음성, 공지유였다.
연적하가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애곡에 이어 무궁전에서도 만나니 동문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공지유가 바짝 다가와 연적하의 앞에 놓인 책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뭘 읽고 계세요?”
연적하는 대답 대신 겉표지를 보여 주었다.
“아! 그거네요?”
머리가 좋은 공지유는 단번에 ‘비승과해’에서 있던 일을 기억해 냈다.
이심전심이랄까.
석종을 떠올린 두 사람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때다.
지나가던 사람이 어깨너머로 보고는 한마디 툭 던졌다.
“그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예요. 원영(元嬰)을 만들려면 금양진결(金陽眞訣)을 보세요.”
연적하는 상대를 금방 알아보았다.
태을존자의 제자가 된 은소선이었다.
연적하의 시선이 무심코 그녀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역시나. 같은 방사이건만 그녀의 허리에는 띠가 없었다.
다시 보니 공지유의 허리에 있는 것도 은장식이 달린 요대(腰帶)다.
순간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뒤를 돌아본 공지유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은 소저, 맞으시죠? 저는 청요 노조님의 제자인 공지유라고 해요, 스물셋이고요. 연 대협은 스물넷.”
그녀가 일찌감치 나이를 밝힌 것은 은소선에 대한 호칭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눈치 빠른 은소선이 담담한 어조로 화답했다.
“저는 스물둘이니까 편하게 사매라고 불러 주세요.”
공지유는 겸양의 말로 사양하지 않고 바로 말을 놓았다.
“은 사매, 그러니까 ‘금양진결’이 원영의 수련에 더 도움이 된다는 거지?”
“네, ‘금단양신진결’은 ‘금양진결’의 주해(注解) 일부분에 불과하거든요.”
“그랬구나. 연 대협, 들으셨죠? ‘금양진결’을 읽으세요.”
그러자 은소선이 물었다.
“그런데 저분은 왜 ‘연 대협’이에요?”
같은 동기인데 누군 ‘사매’고 누군 ‘대협’이냐는 가벼운 항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