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55
655회. 우리가 연 제군의 뒤를 받쳐 주겠소
말리현.
도리포.
중도객잔의 별채.
정오 무렵.
네 명의 노인과 한 명의 청년이 객청에 둘러앉았다.
야산에서 내려온 소요종 종사 태을 존자와 네 명의 제군들이다.
연적하와 태을 존자의 싸움 직후 처음 갖는 수뇌부의 모임이었다.
회의 분위기는 이전과 확연하게 달랐다.
세 명의 제군들은 드러내 말하지 않았지만 다들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진경(眞景)에서 나온 태을 존자는 ‘잘 풀었다’고 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두 사람은 행색부터 차이가 났다.
태을 존자의 머리와 복장은 흐트러져 있었지만 연적하는 처음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태을 존자의 코 주위에는 핏자국까지 있었다!
그걸 보고도 ‘잘 풀렸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태을 존자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양피지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받아만 두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천태종과의 양해각서였다.
“험, 이것은 얼마 전 연 제군이 혜문 존자에게 받아 온 양해각서요. 천태종에서 양해각서대로 진행하자고 하니 검토해 보십시다. 초요산 제군께서 읽어 주시겠소?”
태을 존자의 청에 초요산 제군이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종전(終戰) 후 천태종과 소요종에서 각각 한 명의 제군을 선발해 겨루게 한다. 승자에게 천뢰종의 처분을 일임한다.”
순간 제군들의 시선이 태을 존자를 향했다.
천뢰종의 명운이 달린 비무를 ‘종사’가 아니라 ‘제군’에게 맡긴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태을 존자 역시 찜찜했지만 이제 와서 양해각서를 무를 수는 없었다.
뒤로 천뢰종과 손잡은 전력이 있는 터라 더더욱 그랬다.
“이는 우리에게 유리한 방식이구려. 우리 소요종에는 연 제군이 있으니 말이오.”
태을 존자의 말에 초요산 제군은 연적하를 보았다.
종사도 당해 내지 못할 정도의 실력자이니 천태종에서 누가 나와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게다.
그런데 연적하 제군이 천뢰종의 처분을 태을 존자와 상의할까?
만약 상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그럴 리 없지만, 심지어 그가 미친 척하고 천뢰종을 갖겠다고 한다면?
한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천태종은 연적하 제군의 도움을 받았으니 그를 밀어 줄 게다.
‘그럼 연적하 제군이 천뢰종의 주인이 된다는 건데…….’
어차피 천뢰종에는 종사가 없다.
그들도 연적하 제군의 지배를 바랄지도 모른다.
연적하 제군이라면 장차 구주의 종사가 되고도 남음이 있으니까.
천문을 차지하려고 시작한 일이 어째 더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초요산 제군은 연적하 제군을 힐끔 보았다.
이 모두가 연적하 제군이 너무 뛰어나서 생긴 일이다.
그가 태을 존자의 한 수 아래면 소요종의 홍복인데, 지금은 분란의 원흉이 되고 말았다.
태을 존자가 두 개의 양해각서에 수결을 한 뒤, 하나를 연적하에게 내밀었다.
“연 제군이 혜문 존자에게 가져다 주시오. 그리고 내친김에 언제, 어디서 제군들의 비무를 할지도 정하고 오시오. 언제까지 우리가 완산주에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죠.”
연적하가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를 챙겼다.
어차피 지금 소요종에서 그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회의는 끝났다.
연적하는 두 종문 간에 양해각서를 이행하는 일이 촉박하므로 먼저 일어났다.
연적하가 떠난 뒤에도 태을 존자와 세 명의 제군들은 회의실을 지켰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을 맴돌았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태을 존자가 문득 진곤 제군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찌 된 일인가?”
평소 제군들에게 하던 하오체와는 조금 다른 말투다.
제군에 대한 형식적인 존중마저 내려 놓을 정도로 태을 존자는 분노한 상태였다.
“천리포에 도착하자마자 연 제군이 좌군에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거 아니다. 나는 천태종을 돕기로 했으니 이만 헤어지자. 오늘 천리포에서 천태종을 건드리면 내 손에 죽는다.’ 그러고는 아시다시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좌군으로 하여금 천태종을 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진곤 제군의 말에 태을 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좌군이 자신의 명과 다르게 행동했지만 그건 잘한 짓이었다.
그 상황에서 만약 진곤 제군의 좌군이 미련하게 천태종을 공격했다면, 소요종은 천뢰종과 천태종 모두와 싸워야 했을 게다.
‘결국 연적하가 문제로군.’
진곤 제군이 아직 자신을 따른다는 걸 알고 태을 존자는 한시름 놓았다.
“흐음! 아까의 양해각서는 연 제군과 혜문 존자가 만든 것이오. 나는 양해각서를 읽기 전까지 연 제군이 왜 항명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소. 하지만 양해각서의 내용을 듣는 순간 알았소. 아무래도 연 제군이 천뢰종에 욕심을 내는 것 같소.”
“…….”
세 명의 제군들은 흠칫 놀란 얼굴이었지만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말이 좋아 비무지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연적하 제군이 비무에서 이길 게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가 천뢰종을 태을 존자에게 바칠까?
태을 존자와 그의 불편한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연적하 제군이 바보라면 모를까?
태을 존자에게 그런 대우를 받으며 기약 없이 소요종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의 무위라면 천뢰종의 일인자가 되어 구주의 종사를 노리는 게 당연했다.
초요산 제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연 제군이 천뢰종의 주인이 되겠다고 하면 어찌 되는 겁니까?”
“양해각서대로 하면……. 반대할 수가 없소.”
“…….”
초요산 제군이 황망한 눈으로 태을 존자를 보았다.
종사도 아닌 제군에게 하나의 종문이 송두리째 넘어갈 수도 있다니!
지금이 종문 역사상 처음 있는 대변혁의 시기라도 해도 너무했다.
그러자 한산월 제군이 못마땅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천뢰종을 연 제군에게 넘기다니요?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거니와, 있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왜 종산을 내려왔습니까? 천뢰종은 소요종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소요종의 입지만 줄어들게 됩니다.”
“한 제군은 연 제군을 설득할 자신이 있소?”
태을 존자의 물음에 한산월 제군은 대답하지 못했다.
태을 존자가 진곤 제군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 제군이 보기에는 어떻소? 연 제군이 천뢰종에 욕심을 낼 것 같더이까?”
“연 제군은 천리포에 이르러서야 항명할 뜻을 밝혔습니다. 솔직히 저는 그의 속을 조금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무슨 선택을 하는 놀랄 것 같습니다.”
“흐음, 내 생각도 그대와 같소. 그가 천리포에서 항명을 한 뒤로 나는 그에 대해 짐작하기를 포기했소. 그를 믿고 가는 수밖에…….”
말하다 말고 태을 존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종산을 하산하기 전에 연적하와 나눈 대화가 떠올라서다.
-……내가 양해 각서를 거절하면 어떻게 하겠다고 하던가?
-……믿고 가는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끝내 자신은 그 믿음과 상반된 명령을 내렸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자 ‘믿고 간다’는 말이 불길하게 여겨졌다.
***
연적하는 행여나 소요종이나 천태종에서 다른 말이 나올까봐 부랴부랴 백리하를 건넜다.
천리포 해안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여기서 격전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알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와 별개로 나루터에 나와 있는 천태종 고수들의 눈빛엔 날이 서 있었다.
백리하 건너편 소요종을 경계하는 것인지, 그저 싸움의 여파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땅으로 내려가야 한다.
연적하를 태운 구름이 천태종 고수들 앞쪽으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천태종 고수들이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상대로부터 호의가 전해지자 연적하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저렇게 반기는 걸 보면 소요종에 대한 경계는 아닌 모양이다.
천리포.
은수객잔(所水客棧)의 별채.
연적하는 혜문 존자에게 태을 존자의 수결이 담긴 양해각서를 내밀었다.
“조금 전에 수결을 해 주시더라고요. 내친김에 비무를 언제, 어디서 하는지도 정해 오라고 하시네요?”
혜문 존자가 피식 웃으며 양해각서를 펼쳤다.
“태을 존자가 군말 없이 수결을 해 주더이까?”
“예, 왜요?”
“제군에게 일임한다는 조항에 이의를 제기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구려.”
“그 전에 저하고 한바탕했거든요.”
“허허헛! 역시 그랬구려. 어제 소요종이 바로 도리포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들었소. 내부적으로 정리할 일이 있나 보다 생각했는데, 연 제군 때문이었구려.”
“소요종을 감시했어요?”
“우리 제군들이 태을 존자를 믿지 못하겠다고 몰래 따라갔던 모양이오.”
“왜요?”
“우리가 믿는 건 연 제군이지 태을 존자가 아니오. 어제 아침 소요종이 천뢰종을 지나쳐 천리포로 들어올 때는 눈앞이 캄캄했소. ‘이제 끝났구나!’ 절망하고 있는데, 연 제군의 외침이 들리더이다.”
“아…….”
괜히 뻘쭘해진 연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날 아침 천리포에서 좌군에게 한 말을 혜문 존자가 들은 모양이다.
“솔직히 천태종의 제군 중에 연 제군을 능가할 사람은 없소. 이번 비무의 승자는 연 제군이 될 게요. 그래서 말인데, 연 제군께서는 천뢰종을 어찌할 생각이오?”
“어쩌다니요?”
“내가 천뢰종의 처분을 제군에게 일임하겠다고 한 것은 연 제군 때문이오.”
“저요?”
“그렇소. 나는 연 제군이 천뢰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저는 종사가 아닌데요?”
“천뢰종의 광성 존자가 천태종의 손에 있소. 흡자결로 금제해 둔 그의 영기를 취하시오. 허면 종사의 경지를 앞당길 수 있을 게요.”
“광성 존자의 영기를 흡수하라고요?”
“어차피 그도 지금까지 다른 종문 고수들의 영기를 취해 왔소. 연 제군이 그의 영기를 취한다고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을 게요.”
“그러니까 광성 존자의 영기를 취한 다음에 천뢰종의 주인이 되라 이건가요?”
“맞소.”
곰곰 생각하던 연적하가 혜문 존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저에게 그런 특혜를 베풀어 주려는 거예요? 광성 존자의 영기를 직접 취하셔도 될 것 같은데.”
“나는 이미 한계까지 영기를 모은 사람이오. 이제는 정순하게 갈고닦는 일만 남았소. 그래서 연 제군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이오.”
“천태종에도 제군이 여럿 있잖아요.”
“그래서 연 제군에게 주겠다는 것이오. 천태종 제군 중에 어느 한 사람이 광성 존자의 영기를 취하면, 내분이 일어날 테니까.”
어디 제군 간의 다툼뿐이랴.
광성 존자의 영기를 취한 제군이 종사가 되면 그것도 골치였다.
그 꼴을 보느니 연적하 제군에게 주고 생색이라도 내는 게 백번 나았다.
“그럼 차라리 비무의 승자에게 광성 존자도 넘기는 것으로 하죠? 그래야 뒷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네요.”
“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오. 그럼, 천뢰종의 주인이 되시겠소?”
“제가 천뢰종의 주인이 되면요? 그 다음에는요?”
“천태종과 손잡고 다른 종문을 막아 내십시다. 우리가 연 제군의 뒤를 받쳐 주겠소.”
천태종과 손잡고 다른 종문을 막아 내자면서, 뒤를 받쳐 주겠단다.
왠지 ‘종문 간 전쟁에 너를 앞세우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강호에서 녹림과 금의위를 겪은 연적하는 단번에 혜문 존자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홉 종문을 손에 넣어야 할 연적하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까짓것, 그렇게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