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691
691회. 지나가던 사람인데요
자리에서 일어난 연적하는 황우연 가족들이 머무르던 자리로 가 보았다.
깨끗했다.
모닥불을 피웠던 자리에는 차갑게 식은 재와 곰의 뼈다귀만 굴러다녔다.
자신의 몫으로 가지고 왔던 고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도 함께 먹으려니 하고 황우연 가족의 자리에 내버려 둔 게 잘못이었다.
“야아! 내가 이렇게 또 인생을 배우는구나!”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녹림의 도적들도 이 정도는 아닌데 구주 사람들은 정말 예측 불허다.
황우연의 생명을 구해 주고, 그의 딸에게 귀한 선단(仙丹)까지 주었는데, 자신의 고기를 들고 가 버릴 줄이야.
아침 식사야 도시의 식당에 가서 하면 되니 별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황우연의 인간성을 몰라 봤다는 게 뼈아팠다.
비명 소리를 듣자마자 단창을 들고 나서기에 쓸 만한 인물인 줄 알았는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쯧쯧!’ 하고 혀를 차던 그는 운종술을 펼쳐 동쪽으로 날아갔다.
황우연 가족의 일로 마음이 상한 연적하는 더 이상 피난민들에게 다 가가지 않았다.
그는 운종술로 날아가다가 깊은 산중에서 잠깐씩 쉬었다.
대로(大路)는 영천주에서 도망쳐 나온 피난민들로 바글거려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식사다.
선단 주머니를 서윤에게 준 터라 다른 방식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사냥이나 채집으로 허기를 달랠 수도 있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결국 마을이나 도시를 지날 때마다 잠깐씩 내려가 음식을 사 먹고 나왔다.
하지만 그건 생각처럼 딱딱 아귀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배가 고파도 마을이 없으면 꼬르륵 소리를 들으며 날아가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황우연 가족을 떠올리며 이를 박박 갈았다.
그들로 인해 피난민들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피해 다닌 덕분에 그는 예상보다 빨리 광천사 베레드의 군세와 만나게 되었다.
***
영천주.
여주성.
남대천 강변.
정오 무렵.
하늘에서 남대천 강변의 나루터로 한 사람이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운종술로 날아가던 연적하다.
나루터는 텅 비어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도 사용했던 듯 잘 관리가 되어 있었다.
남대천에서 만난 사람에 의하면 강 저편은 이미 마천의 마귀들에게 점령을 당했다.
강변을 끼고 발달한 마을과 나루터가 비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연적하는 강 저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과연! 대낮임에도 어둑어둑한 하늘 위로 음산한 마기가 가득했다.
“광천사 베레드가 저곳에 있다 이거지.”
목적지에 이르자 갑자기 ‘마신이 정말 나를 찾아올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아니, 그 전에 광명진천은 왜 마신이 자신을 찾아온다고 단정한 것일까?
메누아와 육 일 동안 동행한 것은 맞지만, 그때 메누아는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
게다가 떠날 때는 다시 만나지 않을 것처럼 말했다.
그런 메누아, 아니 마신이 왜 자신을 찾아온다는 말인가?
“이거 괜히 헛고생만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머리를 긁적이던 연적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강 건너편에서 누군가 ‘풍덩!’ 하고 물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뭐야? 설마 헤엄쳐서 건너겠다는 건가?”
남대천은 무량하의 지류로 강폭이 넓었다.
게다가 물살까지 세서 보통 사람이 헤엄쳐 건너기에는 무리였다.
설상가상으로 남자는 머리에 커다란 봇짐까지 올린 상태.
연적하는 남자가 힘에 부쳐 떠내려 가면 도와줄 생각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십 대로 보이는 청년은 물살에 떠내려가면서도 조금씩 전진했다.
반 시진(1시간)쯤 지났을까?
기어코 청년은 혼자 힘으로 강을 건넜다.
이윽고 물 밖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온 청년이 격하게 숨을 헐떡였다.
“푸하! 헉! 헉! 헉!”
강변에서 지켜보던 연적하가 감탄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뒤늦게 연적하를 발견한 남자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뉘슈?”
“지나가던 사람인데요. 헤엄을 잘 치네요?”
남자, 홍이범은 의구심 어린 눈으로 연적하를 빤히 보았다.
“남대천 부근에 사는 사람들은 죄다 피난을 갔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요?”
“뭐 하는 게 아니라 지나가던 길이라니까요.”
청년의 말에도 홍이범은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다.
관병까지도 달아난 지역에 아무 이유 없이 왔을 리가 없어서다.
“뭐 하는 사람이오?”
상대가 계속해서 꼬치꼬치 캐묻자 연적하는 은근 짜증이 났다.
나름 호감을 표시했건만 무슨 포교(捕校)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를 하다니!
“그쪽은 뭐 하는 사람인데요?”
그제야 홍이범은 상대가 불쾌하게 받아들였음을 깨닫고 얼른 태도를 바꿨다.
그는 상대가 만만하게 굴면 더 닦달을 하고, 강하게 나오면 예우를 해 주는 부류였다.
“아, 오해하지 마시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나는 이곳 여주성 사람으로 홍이범이라 하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경계를 하게 돼서.”
“나는 연적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곳을 지나가던 중이고.”
홍이범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지나간다는 것은 즉, 마천에 점령당한 강 저편으로 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혹시 강을 건너갈 생각이라면 꿈도 꾸지 마시오.”
홍이범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강 저편은 이미 구주의 일부라기보다는 마귀들의 세상에 가까웠다.
하늘은 우중충하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괴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요행을 바라고 숨어 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잡아먹혔다.
“왜요? 그쪽도 방금 거기서 왔잖아요?”
“나는 운이 좋아 살아남은 거요. 그쪽은 강을 건너자마자 괴물들에게 잡아먹힐 거요.”
나이 대가 비슷하다고 생각한 연적하와 홍이범은 서로를 ‘그쪽’이라 불렀다.
“강 건너에 괴물이 그렇게 많아요?”
“많냐고 물었소? 장날 모여든 사람들만큼이나 바글거리더이다.”
“그런데 피난이 꽤나 늦었네요? 강 이쪽에도 사람이 없는데 건너편에서 오다니.”
연적하가 홍이범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공은 자경단 수준을 넘지 못한 것 같은데 말하는 건 꽤나 당찼다.
홍이범이 슬쩍 말을 돌렸다.
“그쪽은 관원이오?”
“관원에게 쫓긴 적은 몇 번 있어도, 관원은 아닌데요?”
그러자 홍이범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집에 두고 온 짐이 있어 잠시 가지러 갔던 거요.”
“아하! 짐을 가지러 다시 가셨다?”
연적하가 비꼬듯 말했지만 홍이범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딴청을 부렸다.
순간 연적하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느낌이 왔다.
빈집을 털고 온 모양이다.
흔히 말하기를 아무리 가난해도 도둑이 훔쳐 갈 물건은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물며 급하게 피난을 가다 보면 깜빡 잊고 챙기지 못하는 물건도 많다.
홍이범은 목숨을 걸고 그럴 챙겨 왔으리라.
‘그래서 관원이냐고 물었구나.’
연적하는 홍이범을 좀도둑으로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홍 형, 이것도 인연인데 점심이나 같이 먹죠.”
“아니오. 내가 급해서. 이 근처에서는 먹을 곳도 마땅치가 않고…….”
홍이범은 연적하의 식사 제안을 거절했다.
초면에 그가 누군지 알고 함께 먹는단 말인가.
자신이 강 저편에서 한 보따리 이고 오는 걸 본 사람과는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연적하는 그를 그냥 보낼 마음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근처에 먹을 곳이 마땅치 않으니 더욱 그가 필요했다.
“뭘 먹을지 생각해 둔 요리가 있어요?”
연적하는 그가 거절했음에도 함께 먹기로 한 것처럼 밀어붙였다.
“나는 바쁠 뿐 아니라, 이 근처에는 먹을 곳도 없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까 더더욱 뭘 먹을 건지 생각해야죠.”
“귀가 먹었소?”
홍이범이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놈이 왜 갑자기 동문서답을 하는지 모르겠다.
“홍 형.”
“왜 부르쇼?”
홍이범이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연적하를 쏘아보았다.
“내가 같이 먹자고 하면 같이 먹는 겁니다.”
말과 함께 연적하가 장난스럽게 강변의 자갈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이윽고 귀에 거슬리는 파열음과 함께 그의 손아귀에서 거친 돌가루가 흘러내렸다.
까드드득- 부스스-.
흠칫 놀란 홍이범에게 연적하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홍 형은 이 근방에 산다고 했잖아. 나는 여기가 초행길이라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몰라. 이 지역 주민이 홍 형밖에 없으면 어떻게 해야 돼? 홍 형이라도 손님 대접을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내 말이 틀렸어?”
“생각해 보니 연 형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홍이범은 바로 말을 올렸다.
강변의 자갈을 움켜쥐어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존중받아 마땅했다.
홍이범은 강변에 불을 피운 뒤 빈집에서 가져온 솥단지를 올렸다.
그리고 쌀, 마른 육포, 말린 야채를 털어 넣은 뒤 열과 성을 다해 저었다.
그의 옆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남대천을 보던 연적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홍 형은 언제 그 일을 시작한 거야?”
“삼 년 전부터 했습니다.”
“삼 년 전이면 몇 살?”
“스물둘이었습니다.”
“어구, 늦었네? 내가 열여섯에 시작했으니 대선배네. 대선배야.”
홍이범이 의아한 눈으로 연적하를 힐끔거렸다.
대선배라는데, 자신이 아는 한 열여섯에 치안대(治安隊)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적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목숨 걸고 강을 건너갔는데, 소득은 있었나? 빼앗지 않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연적하는 아예 녹림의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
“없었습니다. 본래는 구룡포까지 가려 했는데, 강 언저리만 돌아다니 다가왔습니다.”
“허탕을 쳤다고? 이거 왜 이래? 그럼 머리에 지고 온 봇짐은 뭔데?”
“아, 봇짐 속에는 괴물을 그린 종이가 들어 있습니다.”
“괴물을 그렸다고?”
“예, 그게 저의 일이니까요.”
“일이라고? 화공(畫工)이야? 아니 무슨 화공이 목숨 걸고 그림을 그려?”
말과 함께 연적하가 홍이범의 봇짐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삼 장(약 9미터)여 밖에 있던 봇짐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홍 형, 착실하게 봤는데 못쓰겠네. 거짓말이면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준다.”
연적하는 구시렁거리며 봇짐을 풀어헤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
봇짐 속에 든 것은 붓과 먹통, 그리고 종이 뭉치가 전부였다.
종이에는 각양각색의 마물이 제법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자신의 기대에 엇나가다니 왠지 실망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홍이범에 대해 가졌던 호감이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종이 뭉치를 봇짐에 넣고 뒤쪽으로 던졌다.
연적하의 눈치를 보던 홍이범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는 청산성의 치안대에 속해 있습니다. 마귀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러…….”
“궁금하지 않아.”
“아, 예…….”
한참 동안 차가운 얼굴로 남대천을 응시하던 연적하가 문득 물었다.
“강 저편에서 열두 살쯤 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있어?”
“없습니다.”
홍이범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괴물들로 가득한 곳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무슨 수로 살아남는단 말인가.
“홍 형은 어떻게 생각해?”
“예?”
홍이범이 죽을 젓다 말고 멍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마신이 저곳에 있을 것 같아?”
“모르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죽이나 눌어붙지 않게 잘 저어.”
“예, 예.”
메누아를 생각하던 연적하의 뇌리로 불현듯 서윤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네.”
피난 중인 열두 살의 여자아이에게 선단 주머니를 안겨 주다니.
연적하는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툭툭 때리며 자책했다.
그리고 메누아를 연상케 하는 서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