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01
701회. 구전범천입신비(九轉梵天入神碑)
마천의 군단장인 악투스 발라지크가 분노한 이유는 단순했다.
마신이 두 번이나 사라진 이유를 알지 못해서다.
처음에는 개전(開戰) 초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광명진천과 그를 추종하는 군주들이 종문을 보호하겠다고 나선 상황.
삼족(三足)처럼 받치고 있는 마천의 세 군세 중에 하나라도 무너지면 이번 원정 역시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설상가상으로 저항의 원점이라 할 수 있는 광명진천의 군대가 이틀 거리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마신이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증발하듯 사라진 것이다.
스스로를 마신의 충복이라 떠벌리며 살아온 악투스 발라지크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중차대한 전쟁을 앞두고 마신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충복이라니?
다른 마족들이 이런 사실을 알면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려 들 게 분명했다.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으나 휘하에 있는 마족들의 눈빛도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마신님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전까지 아무것도 처먹지 마라! 내 명을 어기는 놈은 사지를 찢어 마물의 먹이로 내어 줄 것이다!”
만찬 자리에 있던 마족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껏 주눅이 든 모습이지만 속은 달랐다.
마족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그들의 군단장인 악투스 발라지크를 저주했다.
전쟁터에서 아무것도 먹지 말라니?
그건 지휘관으로서 해서는 안 될 미친 짓이었다.
아무리 마족의 체력이 뛰어나도 생명체인 이상 먹어야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이 바짝 오른 악투스 발라지크에게 직언을 할 마족은 없었다.
만찬장에 있던 마족들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자기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본래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마족들은 식사 중이던 마귀들의 식탁을 걷어찼고, 마귀들은 마물의 먹이를 발로 짓밟았다.
악투스 발라지크로 촉발된 금식령은 마족부터 마귀, 마물들까지 바싹 독이 오르도록 만들었다.
***
완산주.
광주성.
범천산.
하늘에서 범천산 정상으로 한 소녀가 뚝 떨어져 내렸다.
‘삼천의 신’이자 마천의 지배자로 알려진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였다.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한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멈춰 선 곳에는 거대한 석비가 있었다.
석비에 새겨진 글자는 ‘구전범천입신비(九轉梵天入神碑)’.
누가 세웠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꽤나 오래전에 만들었는지 석비 모서리와 음각된 글자는 거지반 마모되어 있었다.
한참 동안 석비를 응시하던 메디나 이사엘라의 입에서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아!”
범천산에는 구전범천과 관계된 전설이 있다.
‘삼천의 신’인 구전범천은 이곳에서 큰 용을 죽이고 신좌에 올랐다.
그래서 이름도 범천산이다.
하지만 ‘범천산’과 ‘구전범천입신비’가 전부였다.
기껏 구전범천의 흔적을 따라 이곳까지 왔건만 전설 이상의 것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구전범천입신비’가 왜 완산주에 있느냐는 것이다.
이래서야 마치 인간이 득도하여 신이 된 것을 기념하는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녀는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다시 읽어 보았다.
‘입신비’라는 글귀가 예사롭지 않다.
‘설마 구전범천이 인간이었을까? 그럴 리가!’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불경스러운 망상을 떨쳐 냈다.
삼천의 신들은 서로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다.
오랜 세월 신좌를 두고 다투다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다.
예컨대 광명진천은 선민의식 강한 천족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대의(大義)로 포장한다.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모두를 악이라 말한다.
물론 광명진천도 마족인 자신에 대한 나름의 평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전범천을 떠올리면,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다.
자신과 광명진천이 신좌에 오르기 전에도 구전범천은 신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삼천의 신’에 그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상대적으로 그의 활동이 저조해서다.
자신과 광명진천이 왕성하게 활동하여 이름을 떨칠 동안 그는 잠잠했다.
이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불분명할 정도.
이 세계의 종족들은 그런 그와 자신과 광명진천을 한데 묶어 ‘삼천의 신’이라 칭했다.
구전범천이 살아 있다면 배꼽 잡을 일인지도 모른다.
우두커니 서 있던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가 비석을 보며 중얼거렸다.
“구전범천, 내가 당신과 대화를 나눌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 찾아다녀도 나타나 주지 않는 거겠죠?”
그녀는 이 세계를 감옥으로 인식한 뒤로 구전범천을 찾아다녔다.
이 세계에서 오직 그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라면 이 세계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 거라 믿었다.
하지만 마계와 천계는 물론 구주까지 뒤지고 다녔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
모든 걸 포기할 즈음 ‘구주의 성물이 파괴됐다’는 소리를 들었다.
순간 그녀는 이 세계의 근본 질서가 무너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구주를 침공한 것은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편으로 왠지 구전범천이 그 일에 관계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구주에 오자마자 또다시 구전범천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다.
사벌주에서 연적하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 만남으로 구전범천이 이 모든 변화의 근원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자연히 관심도 천문에서 구전범천으로 옮겨 갔다.
연적하를 살려 둔 것도 그래서다.
이 세계에서 구전범천과 관련된 존재는 연적하와 그의 사람들 뿐이니까.
쓸쓸한 눈으로 석단에 세워진 비석을 보던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가 돌아섰다.
이제는 동산현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에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나왔으니 발칵 뒤집혔으리라.
부드럽게 날아오른 그녀는 이내 번개처럼 동쪽으로 사라졌다.
***
영천주.
서리성 동산현.
해시 초(오후 9시).
평소라면 마물들이 곯아떨어졌을 시간이건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먹지 못한 마물들은 발정 난 야수처럼 눈이 벌겋게 되어 동산현을 헤집고 다녔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라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서로 물어뜯고 싸웠다.
싸움이 격해져서 목숨을 잃는 마물까지 나왔다.
마물의 시체는 으슥한 곳에서 분해되어 누군가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연적하는 기척을 숨기고-해가 지기 전에 점찍어 둔-마족을 찾아갔다.
소리 없이 담을 넘어가니 객청 마루에 대자로 누워 자는 마족이 보였다.
마족에게 다가간 연적하는 마족 특유의 누린내에 인상을 찌푸렸다.
냄새도 그렇지만 얼굴이 영 눈에 거슬린다.
마족은 얼핏 보면 사람을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다.
체형이나 이목구비는 사람과 비슷한 것 같지만, 호랑이 가죽 같은 피부를 보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간다.
알록달록한 무늬만 없을 뿐 이건 누가 봐도 짐승의 거죽이다.
이런 피부는 칼로 베어도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다.
연적하는 마족의 목을 지그시 밟았다.
“컥!”
답답한 기침과 함께 마족이 눈을 떴다.
인간과 눈이 마주친 에볼라는 놀라지 않고 오히려 실실 웃었다.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마족인 자신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에볼라가 재밌다는 듯 인간을 올려다보았다.
칼질을 하지 않고 잠에서 깨운 걸 보니 다른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인간들이란! 저들은 경험하지 않으면 죽기 전까지 알지 못한다.
마족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원하는 게 있느냐?”
“말을 잘하는 걸 보니 너 마족이구나. 맞지?”
연적하는 마족을 세밀하게 살폈다.
상위의 마귀 중에도 마족을 닮은 것들이 있으니 외모만으로 단정 짓기 어려웠다.
한편 저녁을 굶고 일찌감치 잠들었던 에볼라는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모든 마족이 인간을 먹는 건 아니지만, 어떤 마족에게 인간은 말하는 고기와 같았다.
용맹한 에볼라는 후자에 속한 마족이었다.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쓰읍, 맞다.”
순간 연적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진짜 마족이라니 자신의 안목이 점점 좋아지는 느낌이다.
“그래, 마족아. 나는 원래 살생을 좋아하지 않아. 내 질문에 순순히 답하면 그냥 갈게. 알아들었어?”
“알겠다.”
에볼라는 사지에 힘을 풀고 느긋하게 먹이를 감상했다.
무기를 들었어도 무섭지 않은데 맨손의 인간 앞에서 긴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너희 두목이 군단장 악투스 발라지크 맞냐?”
“맞다.”
“너희가 이곳에 온 지 여러 날이 지났다며? 그런데 왜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는 거야?”
“알고 싶은 건 그게 전부냐?”
“어, 어때? 간단하지?”
대답 대신 에볼라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놀이는 끝났다.
단지 숨을 깊게 들이마신 것 하나만으로도 사지에 기운이 뻗쳤다.
에볼라가 오른손으로 인간의 발목을 잡았다.
너무 힘을 주면 연약한 인간의 발목이 끊어질 것이므로 힘 조절이 필요하다.
그는 단숨에 인간의 발목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너무 힘이 약했나?’
손아귀에 힘을 더 보탰다.
그래도 인간의 발은 요지부동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혼신의 힘을 다해 뜯어내려 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마치 산 하나가 누르고 있는 느낌이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목을 밟고 있는 인간은 먹이가 아니라 포식자였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에볼라의 귓가로 인간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 하냐? 대답하지 않고. 그리고 내 발은 왜 자꾸 주물러 대?”
“…….”
수치심에 에볼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연적하가 허리를 숙여 자꾸 꼼지락거리는 마족과 눈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왜 천뢰종 종산으로 가다 말고 이곳에 처박혀 있는 거야?”
그의 서늘한 눈빛에 에볼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인간의 눈동자에 밤하늘의 별이 담겨 있었다.
‘헉!’
단순한 종문 제자로 알았는데 신좌(神坐)에 발을 걸친 인간이었다니!
에볼라는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을 꿀꺽 삼켰다.
자기 침인데도 사과 한 알을 통째로 삼킨 것처럼 목이 뻐근했다.
“그게 저어 그러니까…….”
상대의 권능에 압도당한 마족 용사 에볼라는 자연스럽게 태세를 바꿨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연적하가 원하는 대답이 술술 흘러나왔다.
“……마신님의 충복인 군단장님도 마신님의 행방을 몰라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그래서 마신님을 찾기 전까지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주절주절 쏟아 내던 에볼라는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인간이 묻지 않은 것까지 말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신이 또 사라졌다고? 그럼 전에도 사라진 적이 있다는 소리야?”
“구주에 진입하고 며칠 안 되어서 갑자기 사라지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라면……. 흠.”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던 연적하는 소리 없이 탄성을 흘렸다.
사벌주에서 메누아를 만난 때였다.
“마신이 왜 혼자 돌아다니는지 알아?”
“말씀드렸다시피 그걸 몰라서 군단장님도 화가 많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전혀 몰라? 눈곱만큼도?”
“예, 모릅…….”
에볼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누군가 끼어들었다.
“내가 가르쳐 줄까?”
마족 용사 에볼라와 연적하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마당으로 돌아갔다.
세 개의 달빛이 만들어 낸 짙은 나무 그늘 아래에 자그마한 소녀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