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11
711회. 천문(天門)은 복(福)이 아니라 화(禍)다.
한산주.
삼채성 옥천항.
사시 정(오후 10시) 무렵, 어두운 항구에 거대한 목선 세 척이 들어왔다.
이윽고 정박한 배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사천포에서 초조하게 배를 기다리던 종문의 진인, 노조, 방사들이다.
옥천항에 첫발을 내딛는 종문 고수들의 표정은 밝았다.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상종, 천지종, 천뢰종 노조들이 각자의 종문 고수들을 인솔해 사라졌다.
심통도 들것 채로 천뢰종의 진인들과 함께 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옥청 노조, 명선 노조, 검학 노조, 적공 노조가 연적하 대종사의 앞에 나란히 서서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대종사님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아무 때라도 불러 주십시오. 불원천리하고 달려가겠습니다.”
“강녕하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노조들의 정중한 인사에 연적하가 멋쩍은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가요.”
대종사가 쑥스러워하자 노조들은 뭐라 더 말하지 못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노조들이 사라진 직후 곡분조 노조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대종사님.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왜 안 오나 했어.”
곡분조 노조는 짧게 묵례를 한 후에 앞장서 걸어갔다.
두어 걸음 뒤에서 묵묵히 그를 따르던 연적하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우리가 어제 사천포에 도착한 걸 알았을 텐데, 배가 많이 늦었더라고?”
“배들이 대부분 천중협으로 가서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천중협?”
“백리하는 상류와 하류 모두가 접전 지역이 아닙니까? 백리하를 오가는 배의 선주들이 천중협에서 무량하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무량하를 통해 사벌주로 피하겠다는 거죠.”
“천중협에서 백리하와 무량하가 만나나?”
“모르셨습니까? 천중협은 구주 최고의 신비라 불리는 곳인데…….”
곡분조 노조가 대종사를 힐끔 돌아보았다.
천중협은 강폭이 백 리나 되는 백리하와 무량하가 교차하는 곳이다.
그런 만큼 강폭이 넓고 수심도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었다.
어디 넓고 깊기만 할까.
그 중심부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그곳에서 생겨난 와류가 모든 걸 빨아들였다.
그래서 천중협의 물길을 모르는 뱃사람은 아예 진입 자체를 꺼렸다.
“모를 수도 있지. 왜? 내가 몰라서 무슨 문제 있어?”
연적하가 시비조로 나가자 곡분조 노조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산주에서 자라지 않으셨다면 모르실 수도 있지요.”
천중협은 구주에서도 유명한 곳이지만, 더러 모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곡분조 노조는 연적하가 또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까 봐 걸음을 빨리했다.
한참을 걷던 곡분조 노조는 제법 화려한 전각으로 쏙 들어갔다.
뒤따라가던 연적하가 슬쩍 전각에 붙은 간판을 확인했다.
영빈관.
어째 거리며 전각이 낯설지 않다 싶었는데 얼마 전에 묵었던 곳이다.
곡분조 노조는 영빈관의 별채 앞에서 연적하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대종사님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곡 노조의 숙소는 어디야?”
“저는 삼환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삼환각? 아! 지난번에 광명진천님이 쓰던 곳? 물론 거기 시설이 제일 좋겠지?”
“다른 존자님들께서 광명진천님은 ‘삼천의 신’ 이시라 모시는 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곡분조 노조는 다른 사람을 핑계로 빠져나가려 했다.
“광명진천님이 삼환각을 쓰는 건 괜찮아. 그런데 곡 노조는 왜 삼환각이야?”
“저, 저는, 광명진천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
“광명진천님이 가면 따라갈 기세일세?”
“그럴 리가요. 저는 다만 천수각의 각주로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할 뿐입니다.”
“농담이야. 뭘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래? 설마 내가 일 잘하는 곡 노조를 천지종에서 내보내겠어? 안 그래?”
곡분조 노조는 눈알을 굴렸다.
농담이라고는 하는데 왠지 느낌이 쎄하다.
마신을 물리치고 나면 천지종으로 돌아갈 텐데, 그때 손을 보겠다는 것일까?
“아이고, 눈알 빠지겠네. 그만 가 봐. 광명진천님이 기다리실 텐데.”
“예? 예…….”
곡분조 노조는 허둥지둥 연적하의 앞에서 물러났다.
아닌 게 아니라 광명진천이 자신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
옥천항.
삼환각.
연적하와 헤어진 곡분조 노조는 한달음에 삼환각으로 돌아갔다.
늦은 밤이었지만 광명진천은 객청에서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곡분조 노조가 허리를 꺾었다.
“사천포에 있던 종문 사람들이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광명진천은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 시큰둥한 얼굴이다.
그러나 곡분조 노조는 광명진천의 그런 태도에 속지 않았다.
무릇 신경전이라는 건 어느 한쪽에서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손바닥도 부딪쳐야 소리가 나는 법.
이해할 수 없지만 광명진천과 대종사 사이에는 묘한 긴장이 있다.
대종사는 젊은 혈기로 그걸 고스란히 드러내고, 광명진천은 감추고 있을 뿐이다.
“대종사님께서 오늘 저녁 사천포로 밀려드는 마물을 홀로 막아 주셨다고 합니다. 그 일로 종문 제자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대종사에 대한 좋은 소리를 듣자마자 광명진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부지불식중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저 찡그린 표정이야말로 오늘날 광명진천과 대종사의 관계였다.
금세 본래의 신색을 회복한 광명진천이 물었다.
“천리구(千里鳩)는 모두 왔느냐?”
대종사에 대한 말을 기대하고 있던 곡분조 노조는 잠시 멈칫했다.
“결과는?”
“모두가 광명진천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회신을 보냈습니다.”
“대종사도 알고 있느냐?”
“아직 대종사님에게는 알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 잘됐군. 아침 식사 후에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그때 알려 주거라.”
“예.”
곡분조 노조는 광명진천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존자와 제군 들 앞에서 결과를 듣게 되면 대종사의 자존심이 꽤나 상할 게다.
광명진천이 입을 다물자 곡분조 노조는 슬슬 마무리하고 갈 준비를 했다.
그런 그를 향해 광명진천이 지나가듯 말했다.
“심통 진인의 상태는 어떠하냐?”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참 안됐군. 자주 들여다보고 차도가 있으면 나에게 알리도록 해라.”
“예.”
곡분조 노조가 대답하자마자 광명진천이 가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그의 축객령에 곡분조 노조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물러났다.
***
웅천주.
센라성.
혈주종 종산 퉁룽챈녹의 천역(天域).
정오 무렵.
거대한 두 개의 돌기둥, 천문(天門) 주위에 삼십여 명의 난쟁이들이 둘러섰다.
마족 오로보스가 천문을 옮겨 가기 위해 끌고 온 브로크들이다.
브로크의 우두머리 드베르그가 한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난쟁이 하나가 제 몸통만 한 항아리를 낑낑대며 들고 나왔다.
항아리 속에 가득 채워진 것은 붉은 피였다.
그의 걸음에 맞춰 항아리가 흔들렸는데 그때마다 밖으로 핏물이 튀었다.
난쟁이는 천문 앞에 항아리를 내려놓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드베르그가 들고 있던 망치로 바닥을 ‘쾅!’ 하고 내리찍었다.
그 위협적인 행동에 난쟁이는 마지 못해 바가지로 항아리의 피를 펐다.
그리고 천문에 피를 뿌렸다.
촥! 촤아-!
천문이 붉은 피로 얼룩졌다.
난쟁이는 천문의 하단부를 빙 돌아가며 빠짐없이 피를 뿌렸다.
청명하던 하늘에 꾸물꾸물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이내 어두워졌다.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에 난쟁이들은 불안한 얼굴로 눈알을 굴렸다.
떨고 있는 브로크들에게 드베르그가 말했다.
“웅천주에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니 겁먹을 것 없다. 축성(祝聖)이 깨졌는지 확인해 봐라.”
드베르그의 말에 난쟁이 하나가 돌 기둥으로 다가가 망치를 휘둘렀다.
쾅! 쾅! 콰앙-!
몇 차례 망치질을 하던 난쟁이가 드베르그를 향해 돌아섰다.
“어떠냐?”
난쟁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망치로 힘껏 내리쳤음에도 여전히 돌가루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드베르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젠장! 마천에서 가장 더러운 마물인 구더기흑저의 피로도 축성이 깨지지 않는다고?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지?”
그는 피로 물든 돌기둥을 노려보았다.
브로크들의 전승에 창조신이 부정하다고 콕 찍은 생명체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구더기흑저다.
온몸에 구더기가 끓는 검은 돼지, 구더기흑저는 마물들조차 먹기를 꺼려 할 정도다.
또한 구더기흑저의 피는 만병의 근원이기도 하다.
더럽고 추하고 부정한 것의 대명사로 쓰이는 구더기흑저의 피로도 축성이 깨지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다.
망연하게 서 있는 드베르그의 뒤로 마족 오로보스가 나타났다.
“오늘이 약속한 마지막 날인데 여유가 있어 보이는군. 축성을 깼느냐?”
화들짝 놀란 드베르그가 급히 돌아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오로보스 님, 온갖 부정한 짓을 다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깰 수가 없었습니다.”
“부정한 짓?”
“예, 본래 축성은 ‘세상에서 구별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반대로 더럽혀지면 힘을 잃고 말지요.”
“부정한 짓으로 구별된 것을 깨뜨릴 수 있다?”
“예, 축성된 물건을 공들여 관리하는 것도 더럽혀지는 걸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천문을 더럽히면 축성도 풀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무슨 짓을 해도 축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저희 종족의 가르침대로 다 해 보았지만 축성을 풀 수가 없었습니다.”
잡아먹을 듯 드베르그를 노려보던 오로보스가 말했다.
“천문은 너희 난쟁이들이 아니라 구주의 인간에게 내려진 것이다.”
“그 말씀은?”
“인간을 제물로 바쳐 보라는 소리다.”
“이, 인간을요?”
아인종인 드베르그가 말까지 더듬었다.
마물의 피를 쓰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특히나 자신들은 마족보다 인간에 가깝다.
그런데 어떻게 비슷한 종족인 인간을 제물로 쓸 수 있단 말인가!
망설이는 드베르그에게 오로보스가 스산한 어조로 말했다.
“왜? 아인종이라서 내키지 않느냐? 네가 죽인 구더기흑저는 우리 마족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는 허락했거늘, 너는 상대가 인간이라 못 하겠느냐?”
“…….”
드베르그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마물과 마족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니 오로보스의 말은 억지였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 그 차이를 지적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인간에 앞서 자신이 먼저 제물로 드려질 터였다.
“아, 아닙니다. 그래도 축성이 풀리지 않으면 어쩌나를 생각했을 뿐입니다.”
“크크! 닥치지 않은 일로 시간 낭비할 것 없다. 인간을 보내 주마.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예, 예.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드베르그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였다.
제물이 될 인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은 브로크들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마족 오로보스가 떠나가자 망치를 든 난쟁이들이 드베르그 주변으로 모였다.
드베르그가 맥빠진 음성으로 말했다.
“들었겠지? 마족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라.”
난쟁이들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자 드베르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문 위로 몰려들었던 시커먼 먹구름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하아!”
드베르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창조신은 왜 천문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게 축성까지 한 것일까?
‘어차피 구주의 인간에게 천문은 그림의 떡에 불과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구주의 인간에게 천문은 복(福)이 아니라 화(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