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33
733회. 죽기 위해 태어난 천족은 없다.
팔월 여드레.
삼채성.
옥천항.
태풍이 지나가고 닷새째 되던 날.
한동안 고요하던 옥천항에 임박한 위험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땡! 땡! 땡! 땡! 땡-!
항구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근심 어린 눈으로 백리하를 보았다.
며칠 잠잠하더니 마신의 선단(船團)이 다시 사천포를 떠난 모양이다.
이윽고 천족과 종문의 고수들이 선착장으로 모여들었다.
지난 일차 수상전 때와 달리 비장한 얼굴들이다.
단 한 번의 출정에 천족이 천여 명이나 사망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번에는 배까지 줄어들었으니 사망 위험은 몇 배나 늘어난 셈.
승선을 준비하는 천족과 종문 고수들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서른세 척의 배가 항구를 떠났다.
배가 출항하자 옥천항에 남아 있던 인간들도 하나 둘 피난을 떠났다.
마신의 선단을 서른세 척의 배로 막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옥천항에 남아 있던 천족과 종문 고수들은 떠나는 인간을 막지 않았다.
반 시진(1시간) 만에 옥천항은 유령도시가 됐다.
객점 주인들은 천족과 종문 고수들의 눈치를 보느라 문을 열어 둔 채 피난길에 올랐지만, 식당, 주루, 상점 등의 주인들은 널빤지로 출입구를 봉쇄하고 떠났다.
그 바람에 남아 있던 천족과 종문 고수들은 건량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대장선.
뱃머리에 우뚝 선 연적하가 좌우편을 쓰윽 훑어보았다.
서른세 척의 배가 눈에 들어왔다.
새까맣게 몰려왔던 마신의 선단을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마신의 배는 몇 척이래요?”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던 은발의 미녀 부관 블레이즈가 바로 답했다.
“백이십 척이라고 합니다.”
“우리보다 네 배나 많네요?”
“그렇습니다.”
“이번 수상전 다음은 육지겠죠?”
“그럴 겁니다.”
“총참모는 진법을 잘 모르나 봐요? 내 말 맞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블레이즈가 연적하를 빤히 보았다.
그녀는 대답에 앞서 연적하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왜냐고요? 그러니까 이런 극단적인 수상전을 고집하죠. 우리 누님이 이 전쟁의 지휘를 맡았으면 육지에서 발라 버렸을 텐데.”
“누님이라고 하심은 혹, 천지종의 빙설화 제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빙설화 제군이 불귀곡에서 태상종과 무극종을 제압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규모나 무력 면에서 마신의 군세는 종문보다 월등하게 뛰어납니다. 빙설화 제군이 아무리 진법에 능하다 해도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는 극복하지 못합니다.”
“천족의 군대보다 마신의 군세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거예요?”
“험, 그런 게 아니라 종문보다 마신의 군세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뜻으로 드린 말씀입니다.”
“천족의 군대와 마신의 군세를 놓고 말해야지, 여기서 왜 종문이 나와요.”
연적하가 날카롭게 파고들자 블레이즈는 반박하지 못했다.
머쓱한 얼굴로 서 있던 블레이즈가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뭐지? 무위만 뛰어난 바보인 줄 알았는데 제법 머리를 쓰네?’
빙설화 제군을 깎아내리기 위해 종문과 마신의 군세를 비교했는데, 넘어가질 않았다.
그의 말이 맞다.
천족 군대에 비하면 마신의 군세가 압도적으로 강한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더 많은 수의 천족이 동원됐을 것이다.
물론 천계의 예상보다 마신의 군세가 강해서 밀리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녀는 즉시 말을 돌렸다.
“참, 총참모가 진법을 잘 모르냐고 물으셨지요? 이 세계의 피조물들 중 총참모보다 진법에 뛰어난 존재는 없을 겁니다.”
블레이즈의 말에 연적하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블레이즈의 눈에 조금 거슬렸나 보다.
그녀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이 떠올라서요.”
“…….”
블레이즈는 눈을 찌푸렸다.
또 빙설화 제군을 생각하는 모양이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그녀는 ‘누가 뛰어나냐?’ 말싸움밖에 안 될 것 같아 참았다.
연적하는 블레이즈가 반응하지 않자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게 진법에 뛰어나다면 육지에서 싸우는 게 낫지 않아요?”
“총참모에게 계획이 있을 겁니다.”
“그 계획이 뭔데요?”
“저는 뱀의 머리를 쳐서 무찌른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연적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블레이즈가 말한 뱀의 머리란 마신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걸 꼭 백리하에서 해야 하나요?”
“총참모가 백리하를 선택했다면 그게 최선이라 그랬을 겁니다.”
“이런 제길.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네요?”
연적하가 툴툴거리자 블레이즈가 설명하듯 말했다.
“대종사님은 항상 머리 쓰는 일은 머리 좋은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죠.”
“총참모는 천족들 사이에서 지혜의 여신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납니다. 믿고 맡기셔도 됩니다.”
“답 안 나오는 수상전에 천족과 사람을 때려 박으니 믿음이 가질 않아서요.”
“그래도 총참모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겁니다.”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거네요?”
“다른 일도 그렇지만 특히 전쟁은 결과가 중요하니까요. 육상전을 한다고 해서 수상전보다 희생자가 덜 나온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누가 지휘를 하느냐에 달려 있겠죠.”
“대종사님은 빙설화 제군에 대한 믿음이 크시네요?”
“누님이야말로 최고 중에 최고죠. 우주에서 누님을 능가할 존재는 없어요.”
조금 전 블레이즈는 ‘이 세계의 피조물 중에 총참모보다 뛰어난 진법가가 없다’고 했다.
‘우주에서 누님을 능가할 존재가 없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블레이즈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빙설화 제군에 대한 대종사님의 신뢰가 얼마나 큰지 알 것 같습니다.”
그녀는 덕담을 건네는 척하면서 모든 걸 대종사 개인의 감정으로 돌렸다.
연적하는 그런 것까지 간파할 정도로 세심한 사람이 아닌지라 웃으며 넘어갔다.
두 사람의 줄다리기는 수평선 끝에 마신의 선단(船團)이 나타나서야 끝났다.
마신의 선단을 응시하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태풍의 피해가 크다고 들었는데 배는 늘어났네.”
“철선이 세 척이나 피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말에 연적하가 마신의 선단을 찬찬히 살폈다.
과연! 대충 만든 목선들 사이에 철선 세 척이 우람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삼백여 장(약 900미터) 거리까지 다가온 철선에 검은 깃발이 올라갔다.
깃발에는 거대한 두 개의 뿔을 가진 미녀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걸 확인한 블레이즈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마침내 마신이 나설 모양입니다.”
연적하가 철선에 휘날리고 있는 검은 깃발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깃발에 그려진 것은 확실히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의 초상이었다.
마신의 깃발을 건 철선이 당당하게 선두로 나섰다.
그 뒤로 백열아홉 척의 배가 갈매기 날개처럼 두 줄로 길게 늘어섰
지난번의 일자형(一字形)과는 다른 모양새다.
연적하가 천족 사령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사령선의 돛대에 붉은 깃발 두 개가 나란히 올라왔다.
“저건 무슨 뜻이죠?”
연적하가 사령선을 가리키자 블레이즈가 답했다.
“쐐기형 진형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우측의 배들이 대장선 뒤로 빠졌다.
아군 배들의 전개를 가만히 지켜보던 연적하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상당히 노골적이네요?”
“대종사님에 대한 기대로 생각해 주십시오.”
마신의 철선과 맞닥뜨리게 되었음에도 블레이즈는 담담했다.
마신의 철선에는 마신만 타고 있는 게 아니다.
저 철선에는 그녀의 충복들인 고위급 마족들이 바글바글할 터였다.
“그런데 괜찮아요? 내가 마신과 싸울 동안 저 철선의 마족들이 난입할 텐데.”
대장선이라고 특별히 뛰어난 천족들로 채워져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지켜본 바에 따르면 특별한 천족은 저 블레이즈가 전부였다.
실제 강한 천족들은 대부분 사령선에 집중되어 있다.
대장선의 무력은 다른 배들과 비교해 크게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블레이즈가 조금은 놀란 얼굴로 연적하를 보았다.
천족들은 그 고귀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그들에게 가장 큰 영광은 싸우다 죽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전장에서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지시받은 대로 행동한다.
천족의 방식으로 살던 블레이즈는 대종사의 말에 기분이 묘했다.
“저를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예. 철선에 마신만 타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다른 배들도 그렇고.”
“대종사님이 마신만 처치해 주신다며 저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뇨? 이왕이면 살아남아야죠.”
“‘이왕이면’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 소원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니까요. 대종사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전쟁터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니? 무슨 그런 개 같은 소원이 다 있어요?”
‘개 같은 소원’이라는 말에 살짝 달아올랐던 블레이즈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역시 아무리 무위가 뛰어나도 태생적인 인간의 열등함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영광의 극치를 개 같은 소원이라고 폄하하다니!
이 전쟁의 성패를 쥐고 있는 대종사만 아니었어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게다.
“대종사님, 표현에 주의해 주십시오. 전쟁터에서 죽는 것은 우리 천족 최고의 영광입니다. 인간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게 전쟁터에서 죽는 거예요. 내가 왜 마신과 싸우려는 줄 알아요? 그런 불쌍한 죽음을 막아 보려고 그러는 거예요. 당신은 왜 마족과 전쟁을 해요? 장렬하게 죽으려고?”
블레이즈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왜 마족과의 전쟁에 목숨을 거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는 ‘마족이 있으니 싸운다’였다.
그리고 마족과의 전쟁에서 죽는 것은 천족에게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대종사는 다른 말을 했다.
‘전쟁터에서의 죽음이 불쌍하고, 그런 죽음을 막기 위해 싸운다고?’
천족의 사생관(死生觀)보다-아주 조금-더 괜찮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걱정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블레이즈는 그것으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답답했지만 천족의 사생관을 앞세워 대종사와 말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종족의 차이에서 나온 소리를 한두 마디 말로 바꿀 수는 없을 터였다.
연적하가 다가오는 철선을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이 전쟁에서 죽지 않기를 바라요. 죽기 위해 태어난 천족은 없을 테니까.”
“…….”
블레이즈는 ‘죽기 위해 태어난 천족은 없다’는 말에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천족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말이었지만, 듣는 순간 심장이 저릿했다.
그녀는 슬쩍 대종사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인간인 그를 지혜롭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실제로 곁에서 지켜본 그는 눈에 띄게 총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저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말을 잘하는지 모르겠다.
연적하의 눈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철선의 뱃머리에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때마침 연적하를 발견한 마신 메디나 이사엘라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드디어 때가 도래했다.
‘연적하.’
머릿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이자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왔다.
그녀는 급히 마음을 가다듬은 뒤 뱃머리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