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780
780회. 너는 역마(驛馬)의 기운을 타고났다
노인과 눈이 마주친 연적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미치지 않았다’는 말과 달리 노인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찢어진 옷에 봉두난발의 머리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해맑았다.
노망이라기보다 단순하게 미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연적하만이 아니었다.
심통이 노인을 한차례 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 툭 던졌다.
“미친 늙은이 같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저런 막돼먹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누구더러 미쳤대? 팔열지옥에서 질질 짜고 있어야 할 늙은이가 주제를 모르고. 쯧쯧! 그 욕심에 용케 범천 욕계에서 빠져나왔구나.”
“…….”
한순간 토지신묘는 정적에 잠겼다.
‘범천 욕계’ 소리에 놀란 연적하는 황급히 남궁연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왕들의 하늘’에서 돌아온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토지신묘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노인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남궁연도 이해가 안 가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노인의 말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심통이다.
그는 ‘왕들의 하늘’에서 진인이 되면서 죽음의 고비를 한차례 넘긴 바가 있다. 그래서 정체불명의 노인이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누, 누구십니까?”
“미친 늙은이라면서?”
“…….”
심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노인의 시선을 외면했다.
“한입들 먹으려면 오고.”
연적하와 남궁연, 심통은 노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노인은 입을 닫고 굽기에 집중했다.
한동안 노인이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연적하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뭘 굽는 거예요?”
“인생.”
“…….”
연적하는 황당한 눈으로 노인과 모닥불 속의 뭔가를 번갈아 보았다.
‘진짜 뭘 굽고 있는 거지?’
노인이 나뭇가지로 건드리는 것은 진흙에 쌓인 덩어리였다.
보통 때라면 거지닭[叫花鸡]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노인이 ‘인생’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뚫어져라 진흙 덩어리를 보던 연적하가 슬쩍 물었다.
“누구의 인생요?”
‘흐음!’ 하는 침음성과 함께 뭔가 생각하던 노인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범천 욕계의 씨앗을 품고 있는 여자와 팔열지옥에 떨어졌어야 할 늙은이와 역마(驛馬)의 기운을 타고난 호기심 많은 놈의 인생.”
순간 연적하는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긴가민가했는데 맞았다.
저건 분명히 남궁연, 심통, 그리고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범천 욕계의 씨앗’이라는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남궁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르신, 범천 욕계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게 문제가 되나요?”
“범천 욕계의 업(業)이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으니 문제가 될 수밖에.”
“어떻게 해야 완전히 끊을 수 있나요?”
“구워지는 결과를 봐야지. 내 입맛에 맞게 잘 구워졌으면 가르쳐 주고, 아니면 마는 거지.”
“잘 구워질 거예요.”
노인은 입을 꾹 다물고 나뭇가지로 진흙 덩어리를 한번 굴렸다.
이번에는 심통이 물었다.
“어르신, 그 팔열지옥…….”
“너는 현세에서 이미 죽은 놈이니 말할 자격이 없다.”
노인은 불쾌한지 인상까지 잔뜩 찌푸렸다.
억울한 심정에 심통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이번에는 연적하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연적하의 제지에 심통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노인의 안색을 살피던 연적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 역마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그거 혹시 역마살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본래 역마는 살(煞)이 아니라 신(神)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 역마살이 아니라 그냥 역마라고 해야 한다. 너는 역마의 기운을 타고 났다.”
“그래서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네가 떠나고자 할 때는 좋은 것이겠지만, 남고자 할 때는 그 반대겠지.”
“남고 싶으면 남으면 되는데 안 좋을 게 뭐예요?”
“그게 자기 뜻대로 되면 그걸 역마라고 하겠느냐?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 네가 범천 욕계에 간 것도 역 마의 운을 타고나서 그리된 것이다.”
“에이, 그럼 저 두 사람은요? 저들도 역마의 기운을 타고났어요?”
“그들은 너의 기운에 휘말린 것뿐이다.”
“…….”
노인의 말에 놀란 연적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노인은 나뭇가지로 진흙 덩어리를 끄집어냈다.
잠시 후 그는 굳어 있는 진흙 덩어리를 나뭇가지로 ‘탁탁!’ 쳐서 부서뜨렸다.
연적하 일행은 노인의 하는 행동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저 진흙 덩어리에 자신들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직감하고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노인은 바짝 마른 손가락으로 진흙 덩어리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뜯어 냈다.
이윽고 연잎에 싸인 닭이 나왔다.
‘거지닭’이다.
토지신묘에 닭고기 냄새가 가득 찼다.
군침이 돌 법도 한 상황이건만 연적하 일행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닭 다리를 쭉 뜯어 낸 노인이 눈을 감고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흐음! 하아! 냄새는 일품이로군. 맛은 어떠려나?”
닭 다리를 베어 물고 한참을 우물거리던 노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아! 정말 천상의 맛이로구나.”
그때 연적하가 얼른 물었다.
“조금 전에 맛있으면 가르쳐 준다고 했죠? 어떻게 해야 돼요?”
노인은 다리 하나를 다 뜯어 먹은 후에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이 너의 기운에 휘말렸다고 했지?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네 씨앗이 가진 ‘범천 욕계’의 업을 끊고, 죽었어야 할 늙은이의 늘어난 수명을 인정받고 싶으냐?”
“예.”
“네가 태일신(太一神)의 뜻에 따를 것을 약속하면 알려 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영기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태일신이 혹시 이 세계의 주신(主神)쯤 되는 거예요?”
“듣던 대로 무례한 녀석이군. 태일신의 뜻에 따를 결심이 서면 청성산에서 태일초(太一醮)를 드리거라. 그럼 네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말을 마친 노인은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뒤로 스르륵 넘어졌다.
깜짝 놀란 연적하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방금까지 닭 다리를 먹으며 떠들던 노인은 어느새 깊게 잠들어 있었다.
연적하가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응? 잠들었네? 어떻게 된 거지?”
노인을 응시하던 남궁연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 노인이 잠깐 접신(接神)을 당한 것 같아.”
“접신요?”
“태일신의 뜻에 따르라고 한 걸 보면 태일신이 보낸 신이었을 거야.”
“태일신은 뭔데요?”
“동방에 천지인(天地人)을 주재하는 삼신(三神)이 있어. 그들을 각각 천일신, 지일신, 태일신이라고 불러. 천일신이 만물을 창조한다면, 지일 신은 기르고, 태일신은 다스리지. 동방에서는 천신들 중에 태일신이 가장 존귀하다고 믿어.”
“그럼 옥황상제와 비교하면 누가 더 높아요?”
“지역에 따라 사람들이 믿는 지고의 신이 다르니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네. 어쩌면 같은 신을 각기 다르게 부르는 걸 수도 있고.”
“음! 그렇구나. 누님 생각은 어때요? 내가 태일초를 지내야 할까요?”
“제사를 지낸다는 건, 그 신을 믿고 따르겠다는 약속과도 같아.”
“그때부터 태일신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거죠?”
“그런 셈이지.”
“하지만 내가 믿는 건 구천현녀(九天玄女)인데요?”
“아, 그렇구나.”
무엇이 즐거운지 남궁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 남궁연을 보던 연적하가 물었다.
“그런데 누님. 왜 구천현녀는 말이 없을까요? 알지도 못하는 동방의 태일신까지 나를 원하는데?”
“어쩌면 구천현녀는 망설이고 있는지도 몰라.”
“뭘 망설여요?”
“노인이 너를 두고 한 말을 기억해?”
“누님과 심 노인이 내 기운에 휘말렸다는 거요?”
“그 전에 한 말.”
“그 전이면, 아! 역마의 기운을 타고났다는 거요?”
“그래, 지고의 자리에 오른 신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아. 태일신의 말은 모두 사실일 거야.”
“그게 어때서요?”
“역마는 한곳에 뿌리내리지 못해.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 너는 석경 장을 떠나게 될 거야.”
“안 떠나면 되죠.”
그러자 남궁연이 애잔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태일신이 한 말을 떠올려 봐.”
“무슨 말요……. 아!”
뒤늦게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네 씨앗이 가진 ‘범천 욕계’의 업을 끊고, 죽었어야 할 늙은이의 늘어난 수명을 인정받고 싶으냐?
노인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아기가 가진 범천 욕계의 업을 끊고, 심통의 늘어난 수명을 인정받고 싶으면 태일신의 뜻에 따르라고.
태을신의 뜻은 자신의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내가 석경장을 떠나야 한다고요?”
“역마가 네 운명이라면 그렇게 될 거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순간 연적하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와! 신(神)은 무슨! 살(煞)이 맞구만. 싫어도 해야 한다면 ‘역마’가 아니라 ‘역마살’이잖아요. 그런데 구천현녀는 왜 망설여요? 세상에 역마살을 타고난 사람이 나 하나만도 아닐 텐데.”
“그러게. 왜 그럴까.”
남궁연이 씁쓰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뒤늦게 심통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어, 공자님. 공자님이 청성산에서 태일초를 드리면 제가 팔열지옥에 끌려가지 않는 겁니까?”
“지금까지 무슨 얘기 들었어? 진인이 되면서 늘어난 수명을 인정해 주겠다잖아.”
“헉! 그 말은 태일신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죽는다는 겁니까?”
“태일신이든 누구든 늘어난 수명에 대한 보증이 필요한 거겠지. 하여간 운도 좋아. 회광반조에 들었던 늙은 이의 수명이 늘어날 줄 누가 알았어?”
“그래서 제가 반로환동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반로환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청성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래?”
“하지만 공자님은 청성산에서 제사를 지낼 거잖습니까?”
심통이 연적하를 빤히 보았다.
연적하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위인이었다.
“청성산으로는 갈 거야.”
“정말 남궁세가로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심통이 연적하의 눈치를 살폈다.
막상 청성산으로 간다니 이번에는 배가 산처럼 부른 남궁연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청성산이 먼저야. 그렇죠? 누님?”
연적하가 동의를 구하듯 남궁연을 보았다.
아기가 범천 욕계의 업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다면 그걸 해결하는 게 우선인 까닭이다.
남궁연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청성파에 요청해서 객방을 얻어야겠어.”
그녀는 아예 아기를 청성파에서 낳을 생각이었다.
청성파가 낯설지만 객잔이나 길거리에서 출산하는 것보다 그편이 나았다.
정의맹과 천지맹 시절의 인연이 있으니 매몰차게 굴지는 않을 터였다.
기절한 노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가 만든 거지닭이 한쪽에서 식어갔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마차를 모느라 쉬지 못한 심통이 먼저 잠들었다.
뒤이어 여행에 지친 남궁연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연적하는 이제 빨갛게 불씨만 남은 모닥불을 멍하니 응시했다.
아기를 낳으면 석경장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하게 살려고 했는데 역마라니.
‘태일신과 구천현녀 중에 하나를 따라야 한다면 당연히 구천현녀지.’
그는 희미한 불씨를 보며 기도했다.
부디 남궁연과 아기의 곁에서 오래오래 행복한 삶을 살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