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2
82회. 실력은 확실한 사람
낙양오협의 첫째인 황동엽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 미친놈이 어디에 강호행을 갖다 붙여! 그건 정파 협객들만의 신성한 통과의례인데!’
그러나 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지난해, 그러니까 오봉산채에서 풀려난 뒤에도 연설주를 제외한 낙양오협은 자주 모임을 가졌다.
대화의 주제는 당연히 복수였다.
그때마다 소극적이던 이소민이 어느 날 기막힌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날의 대화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
낙양의 다관 청사(靑舍).
구석진 자리에 삼 남 일 녀가 모여 앉아 심각한 얼굴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낙양오협의 황동엽과 오중산, 손상극, 이소민이다.
평소처럼 잘 나가던 복수 계획이 툭 끊어졌다.
이소민이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해서다.
황동엽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이제 그만 오봉십걸은 잊자고요.”
“헐! 왜?”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도적에게 인질로 잡혔다는 치욕을 잊자니?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세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논리 정연하던 이소민이 오늘따라 자꾸 얼버무리고 있다. 그러면서 답답해하는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
황동엽은 그녀가 숨기려고 하는 게 뭔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그러지 말고 이유를 말해 보거라. 우리가 남이냐?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협을 행하다 한날한시에 죽자고 다짐한 의형제가 아니냐?”
감수성을 후벼 파는 큰 오라버니의 말에 이소민은 경천동지할 비사를 실토했다.
“……할아버지의 이기어검에도 유유히 달아나더라고요. 천하십대고수라 할지라도 그를 잡지 못할 거예요. 이제 소매가 그만 잊자고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날 이후로 황동엽은 오봉십걸을 기억에서 지웠다.
그리고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지 않기를 빌었다.
다행히 가문의 관심은 녹림 따위에서 유명교로 옮겨 간 지 오래.
그렇게 흑역사는 유야무야 잊혀져 갔다.
그런데 오늘, 남양의 한 객점에서 그날의 주인공을 다시 만난 것이다.
***
소교는 기이한 눈으로 연적하와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이 어린 연적하가 마치 사문의 존장처럼 거침없이 대화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자존심 강한 세 남자의 반응이다.
세 사람 모두 당연하다는 듯 그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니, 심지어 두려운 듯 연적하와 눈도 시선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서로 아는 사이였어요?”
소교의 물음에 연적하가 답했다.
“그럼요. 지난해에 알게 된걸요.”
“어머, 아는 분들이셨군요. 황 소협, 제가 말씀드린 분이 이분이에요. 참월검객 연 대협의 아드님이신 연적하 소협이에요.”
순간 세 남자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적하에게로 향했다.
연적하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헐! 몰랐어요? 내가 설주 누나 동생이에요. 어머니는 다르지만 아버지가 같으니까. 동생이라고 할 수 있죠. 설주 누나가 창피하다고 숨긴 모양이네.”
연설주의 배다른 동생이라는 말에 세 남자는 놀랐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연씨 남매들과 조금 닮은 것도 같았다.
황동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설주의 동생 되십니까?”
“예.”
“그런데 그때는 왜 그러셨습니까?”
왜 연설주를 인질로 잡고 와룡장의 돈을 뜯어냈냐는 소리다.
“내가 연씨들과 사이가 좀 좋지 않아서요. 그나마 쫄딱 망하게 하려다가 봐준 거예요. 뭐, 결국 월화선자라는 미친 여자에게 당해서 폭삭 망했지만.”
중간에 낀 소교는 연적하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아하! 배다른 형제들과 사이가 나빴구나. 그래도 참월검객 아들이라고 월하선자에게 유감은 있나 보네.’
낙양오협도 연적하를 모르는 걸 보면 와룡장에서 꼭꼭 감추어 두었던 것 같다.
그때 셋째인 손상극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연 매의 동생이면 우리보다 한참 아래일 텐데, 말투가 좀 그렇네…….”
그러자 연적하가 바로 받아쳤다.
“아참, 깜빡 잊고 있었는데 말 잘했어요. 내가 연씨들에게 원한이 좀 있는데, 의형제인 여러분들에게 연대책임을 물어도 되는 거죠?”
깜짝 놀란 황동엽에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공은 공이고 사는 삽니다. 연 매가 비록 저희들의 동생이지만, 잘못한 일이 있다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저희는 연 매를 대신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은? 사양하지 않아도 되는데.”
연적하가 손상극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에 가슴이 철렁한 손상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큰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죠. 저도 가족들 문제에 타인이 왈가왈부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내 앞에서 연 매가 어쩌고 동생이 어쩌고 한 거예요?”
연적하의 음성이 살짝 높아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긴장한 손상극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괜히 연설주를 내세워 형님 행세하려다가 큰일이 나게 생겼다. 여기서 저 소마두가 분탕질을 치면 청운관은 망하고 말 거다.
‘아, 내가 저 극악한 놈에게 왜 그런 소리를 했을까!’
그까짓 형님 대우가 뭐라고.
탄식하던 손상극은 결국 머리를 숙였다.
“연 소협,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알면 됐어요. 다음부터 조심해요. 내 앞에서 연씨들 얘기는 꺼내지도 마요.”
“예.”
세 남자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소교는 네 남자들의 대화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낙양오협이 한참 동생뻘인 연적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연적하라는 사람의 무위가 그렇게 뛰어난가?
하지만 아무리 봐도 연적하는 또래의 청년보다 허약해 보였다.
대화가 정리되자 연적하는 조금은 경박한 걸음걸이로 창가에 가서 앉았다. 식사 때가 다가오자 사람들이 눈치껏 비워 둔 가장 좋은 자리였다.
어색한 침묵 끝에 황동엽이 입을 열었다.
“소 소저, 연 소협이 돕기로 한 이상 잘 해결될 겁니다. 실력은 확실한 사람이니까.”
실력 말고 뭔가가 있다는 소리다.
소교는 그가 하지 않은 말이 궁금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낙양오협의 엉망이 된 기분을 생각하면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였다.
***
낙양의 세 개 문파가 모이고 사흘쯤 지났을까?
느지막이 아침을 먹은 뒤 방에서 쉬고 있던 연적하와 심통에게 소교가 직접 찾아왔다. 그건 전적으로 낙양오협의 효과였다.
“두 분, 오래 기다리셨죠? 오늘 정오에 남양상방으로 갈 거예요.”
심통이 물었다.
“아이야. 남양상방에 유명교 사람들이 왔느냐?”
“그게……. 방주가 낯선 사람 하나를 지극정성으로 받들고 있다고 해요. 어쩌면 그가 유명교에서 나온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헐. 어느 놈인지 지지리 복도 없구나.”
심통의 말에 소교는 은근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소식에 부친은 물론 세 개 문파의 문주들도 근심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칼받이로 나서야 할 낭인은 농담까지 할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려요.”
소교는 다시 한 번 당부를 한 뒤에서 나갔다.
‘허세가 심하다’ 싶다가도 낙양오협의 반응을 행각하면 그게 아닌 것도 같다.
‘곧 알게 되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강호에서는 강자가 살아남는다.
무인들이 연무장에서 피땀을 흘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왕이면 저 두 사람이 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저 두 사람과 청운관을 위해서 말이다.
***
양일객점 앞에 여든 명의 무인이 모였다.
청운관의 제자 서른과 세 개 문파의 고수 서른, 낭인이 스물이다.
청운관의 관주 무산권 소우진과 세 개 문파의 문주들이 앞장서 걸어갔다.
소우진과 문주들은 남양상방의 총단을 오십 보쯤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손님은 물론 거리에 있던 장사꾼들까지 가판을 접고 멀찍이 물러났다.
지나가던 몇몇 관병들도 흉흉한 무림인들의 기세에 놀라 황급히 돌아갔다. 그들은 해가 떨어진 뒤에야 남양상방 쪽으로 나와 볼 것이다.
남양상방에 도착하자 소우진과 세 개 문파의 문주들은 뒤로 물러났다.
묵묵히 따라가던 스무 명의 낭인이 앞으로 나섰다.
칼받이들의 역할은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니 제 위치로 찾아간 것이다.
부친의 옆에 서 있던 소교는 낭인들 쪽을 기웃거렸다.
그런 소교를 보던 소우진이 말했다.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고집을 피우더니 왜 그리 안절부절이냐?”
“와룡장의 구천검 말이에요. 소문처럼 그렇게 형편없는 검공인가요?”
“참월검객의 말로가 비참해서 폄하하는 분위기이지만 솔직히 모르겠다. 그들과 검을 섞어 본 적이 없어서.”
옆에 있던 신임 팔선문주 황장익이 한마디 거들었다.
“노부가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괜찮은 검공이었소. 소문처럼 형편없었다면 남궁세가에서 연무백을 십 년이나 데리고 있었겠소.”
“이제 궁금증이 풀렸느냐?”
부친의 물음에 소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남양상방의 정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안쪽에서 오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숫자로는 열세지만 남양상방 무사들은 한눈에 봐도 기세등등했다.
언제 끌어모았는지 이십여 명이나 되는 낭인들이 전면으로 나섰다.
자신감 넘치는 상대의 모습에 소우진은 마음이 무거웠다.
믿는 게 있지 않고서야 저럴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양상방의 방주 임원영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소 관주!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물면 어찌 되는지 아느냐! 잡아먹힌다. 네가 감히 나에게 맞섰으니, 죽을 준비는 되었겠지!”
참다못해 청운관의 제자 하나가 맞받아쳤다.
“네놈이 개다! 낙양의 문파들이 불의를 보다 못해 나섰으니 죽을 준비나 해라!”
이번에는 남양상방 경천대 대주 소군평이 나섰다.
“에라 이 미친놈아! 주인이 일꾼을 바꾸겠다는데 무슨 불의를 찾고 지랄이냐! 서 관주! 정녕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제자들을 죽이려 하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백배사죄하고 물러가시오!”
그러자 청운관 출신의 풍운대 대주 왕인걸이 끼어들었다.
“소 대주!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소. 홍방을 앞세워 우리 풍운대를 모욕하고 내쫓은 게 의로운 일이오? 당신도 양심이 있으면 그런 소리 하지 맙시다!”
소군평이 뭐라고 변명하려 할 때다.
방주 임원영의 곁에 조용히 서 있던 오십 대 남자가 한마디 했다.
“그만.”
그러자 소군평은 찍소리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내가 느긋하게 말했다.
“본좌는 여주 교당의 호법 대력귀 님이시다. 감히 유명교 제자를 핍박하다니, 죽지 못해 환장했구나. 소관주와 세 개 문파의 문주들은 당장 한쪽 팔을 끊어 사죄하라. 거역하면 모두 죽는다.”
여주 교당은 은하장이 있는 곳이다.
대력귀는 십두마병으로 은하장의 장주 척산경을 따르는 사대신장 중에 하나였다.
소우진과 세 명의 문주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은하장의 호법이 왔을 줄이야!
소우진과 세 문주들이 머뭇거리자 대력귀가 내력을 실어 호통쳤다.
“냉큼 팔을 바치지 못할까!”
대력귀의 말에 내부가 찌르르 울리자 소우진의 얼굴이 검게 물들어 갔다.
자신의 무위로는 감히 그에게 맞설 수 없었다.
주저하던 팔선문주 황장익이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았다.
“소 관주, 팔을……. 자릅시다. 제자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지 않소.”
대연문과 칠양문의 신임 문주들도 넋이 나간 얼굴이다.
유명교에 문주를 잃고 복수심에 달려왔다가 괜히 팔만 날리게 생겼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싸우자고 할 수도 없고, 팔을 자를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