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25
825회. 어른들은 다 그런 줄 알았어요
청성산.
서촉관(西蜀館) 별관.
술시 정(오후 8시).
남궁연이 잠든 아기를 침상에 살그머니 내려놓고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심 노인과 상행을 가겠다고?”
“예. 마침 상단의 목적지가 개봉이라고 하더라고요. 간 김에 남연객점에도 들러 보려고요. 이 기회에 그동안 못 받은 돈도 받으면 좋잖아요.”
“그러네. 벌써 이 년이나 지났구나.”
“그 꼬장꼬장하던 노인네 아직 살아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살아 계셔야지. 남 소저 혼자서 꾸려 가기 어려울 텐데. 잘 생각했어. 이번 기회에 한번 둘러보고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상단의 일정과 맞을지 모르겠지만 남연객점에는 꼭 들러 보도록 해.”
“그럴게요.”
“사흘 후에 출발한다고 했지?”
“예. 그동안 상인들을 끌어모으겠다고 하더라고요. 심 노인과 내가 호위에 참가한다니까 이때다 싶은 거죠.”
황실에서 힘을 쓰지 못하니 도적 떼가 들끓었다.
금인상방의 입장에서 보면 안전이 보장된 이상 규모를 키우는 게 당연했다.
연적하의 맞은편으로 온 남궁연이 찻주전자를 집으며 물었다.
“차 한잔할래?”
“좋죠.”
남궁연이 빈 잔에 차를 따라 연적하의 앞으로 살짝 밀었다.
건조하던 실내를 차향이 은은하게 적셨다.
가만히 찻잔을 매만지던 남궁연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왜요?”
“내가 이제 엄마가 됐구나 생각하니 웃음이 나네. 나는 한평생 소녀로 살다가 갈 줄 알았거든.”
“나도 내가 아빠가 될 줄은 몰랐어요.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나와 달랐거든요.”
“아버님이 기억나?”
“당연하죠. 내가 창고에 들어간 게 여섯 살 때였잖아요. 그 전에 자주는 못 봤어도, 멀리서 종종 봤거든요.”
“아버님은 어땠는데?”
“딱딱한 아저씨? 어쩌다 나를 볼 때면 늘 인상을 찌푸리셨어요. 그러고 보니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네요. 나는 어른들은 다 그런 줄 알았어요. 내 주변에서 웃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신기하죠? 오봉산에서 지낼 때 어른들이 웃는 걸 처음 봤어요. 그래서 더 정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형님들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너를 보고 웃지 않은 건 아버님의 본심이 아니었을 거야. 아파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아버지가 무백 오라버니를 남궁세가로 데리고 간 뒤 바로 숙부님이 돌아가셨잖아.”
“누님. 나는요. 내가 곧 죽을 거 같으면 우리 아기에게 더 잘해 줄 거예요. 앞으로 못 보게 되는 만큼, 지금 더 잘해 줘야 되잖아요.”
“사람마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더라고. 자신의 고통만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너처럼 남겨질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나는 그런 네가 좋아.”
과거를 회상하던 연적하가 불현듯 말했다.
“참! 그거 알아요? 남연객점에서 이 년 동안 받아야 할 돈보다 상행 한번 도와주고 받는 돈이 훨씬 많다는 거?”
“훗! 얼마나 받는데 그런 말을 해?”
“왕복하는 두 달 동안 동행해 주고 은자 이백 냥을 받기로 했어요. 백 냥은 먼저 받았고, 나머지 백 냥은 두 달 뒤에 받기로 했어요. 원래 하루에 은자 세 냥을 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장 방주가 ‘한 달에 구십 냥은 모양이 안 나니까 열 냥 더 써서 백 냥을 채워 드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두 달에 은자 이백 냥이 된 거예요. 이 년 동안 남연객점에서 받을 돈이 은자 칠십 냥쯤 되는데, 두 달에 이백 냥이라니! 괜히 남연객점을 샀나 봐요.”
“대신에 남연객점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고 받는 돈이잖아. 상행을 따라다니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너야 입신의 경지에 올라서 힘든 걸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뼈가 삭는다고.”
“심 노인이 뼈가 삭는다고 하던데 누님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네요?”
“그보다 더한 것도 알아.”
“뭔데요?”
“뭘까나.”
남궁연은 궁금증만 불러일으키고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 모습에 혼자 달아오른 연적하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남궁연에게 다가갔다.
“어? 왜?”
“이제 가면 두 달이나 누님을 보잖아요.”
“그렇다고 갑자기?”
연적하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아기에게만 누님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요.”
“자, 잠깐만. 나 아직 씻지도 못했어.”
“괜찮아요. 내가 더 더러우니까.”
연적하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자 남궁연도 못이기는 척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
사흘 후.
사천성 성도.
금인상방.
이른 아침.
금인상방의 앞마당은 성도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가득했다.
상인들은 모처럼 만의 대규모 상행에 대한 기대로 한껏 들뜬 얼굴이었다.
출발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상인들은 상단 호위대를 힐끔거렸다.
남천 연적하와 구천노도 심통을 찾고 있는 것이다.
행수들에 둘러싸여 있던 장양 방주가 손짓으로 서기를 불러들였다.
“예, 방주님.”
황규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남천 대협은 어떻게 됐는가? 시간이 다 됐는데 왜 보이질 않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상방 안팎으로 사람들을 풀어놓았습니다. 남천 대협이 나타나면 바로 알리라고 했습니다.”
대행수 등원용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방주님. 설마 돈만 받아먹고 안 오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자 장양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남천 대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가. 그는 자기가 한 말은 반드시 지키기로 유명하네. 그래서 그의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 한다고들 하지. 빈말이 없거든. 게다가 남천 대협에게 건넨 돈은 은자 백 냥에 불과하네. 그 돈 때문에 명성에 흠이 될 일을 하겠는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녹림 출신이라……. 저는 영 미덥지가 않습니다.”
“녹림 출신이지만 무당파의 제자에 남궁세가의 사위이기도 하지. 무당파와 남궁세가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먹고 튀지는 않을 걸세.”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양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그러기를 바랄 뿐 내심 그도 연적하에 대해 반신반의한 상태였다.
녹림도들에게 신의란 똥만도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등원용이 마당에서 오락가락하는 삼백여 명의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어! 남천 대협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 금인상방의 신용도 크게 떨어질 텐데…….”
일단 성도의 상인들에게 허언을 한 셈이니 상인으로서 최악의 사고다.
대규모 상단은 축소될 테고, 금인상방이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돈 잃고 신뢰도 잃게 되는 셈이니 그야말로 새해 벽두부터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때 목을 길게 빼고 대문만 바라보던 황규가 호들갑을 떨었다.
“왔습니다! 왔어요! 남천 대협과 구천노도 님이 왔습니다.”
그 말에 장양과 등원용은 서로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윽고 장양은 종종걸음으로 연적하를 마중 나갔다.
“남천 대협. 시간 맞춰 잘 오셨군요. 이쪽은 금인상방의 대행수 등원용이라 합니다.”
장양이 자신의 옆에 뻘쭘하게 서 있는 등원용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등원용은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협. 등원용이라 합니다.”
“아 네. 연적합니다. 시간 맞춰 온다고 온 건데, 늦은 건 아니죠?”
연적하가 장양에게 시선을 돌렸다.
장양이 다소 과장된 동작으로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이구! 아닙니다. 딱 맞춰 오셨습니다. 일찍 와 봐야 추운 데 기다리기만 할 뿐이지요. 장부와 물품의 대조가 조금 전에 끝났으니 이제 출발하면 됩니다.”
“그런데 상인들이 생각보다 많네요?”
연적하는 상행의 규모에 혀를 내둘렀다.
대문 앞에서 짐마차 오십여 대를 봤는데, 마당에도 상인과 짐꾼 삼백여 명이 있었다.
여기에 호위대 오십 명을 합치면 사람만 삼백오십여 명이다.
‘지금까지 본 상단 중에 가장 크려나?’
과거 남궁세가로 갈 때 동행했던 백화상방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연적하가 놀라자 장양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희 금인상방의 사람들이 팔 할이고, 나머지 이 할은 협력하는 상인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엄청나네요.”
등원용이 눈치껏 대화에 끼어들었다.
“금인상방은 십대상방에 들어가는 큰 상방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상방들과는 규모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연적하가 장양과 등원용에게 십대상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호위대 대주 태산검 하후찬이었다.
사흘 전 연적하, 심통과 인사를 나누었던 그는 두 사람에게 묵례해 보인 후 말했다.
“방주님, 출발 시간이 됐습니다. 어찌할까요?”
“그럼 출발하게.”
장양이 허락하자 하후찬은 서둘러 호위대로 돌아갔다.
곧이어 마당에 모여 있던 상인과 짐꾼들이 질서 정연하게 대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연적하와 심통은 다른 호위대들처럼 말을 타지 않고 짐마차를 얻어탔다.
호위대 대주인 하후찬은 연적하와 심통이 따로 움직였지만 뭐라 하지 않았다.
그리고 휴식 시간이나 식사 시간이 되면 사람을 보내 연적하와 심통을 살뜰하게 챙겼다.
짐마차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끄덕이던 연적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아! 생각났다. 전에 십두마병들을 잡으러 다닐 때도 이랬는데.”
고개를 갸웃하던 심통은 이어지는 말이 없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이랬다는 겁니까?”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마차만 타고 가니까 지겹더라고.”
“지겨워도 꾹 참으십쇼. 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러시면 안 됩니다.”
“누가 뭐래? 그냥 지겨워서 그러는 거지.”
“아이고 공자님. 첫날부터 그렇게 지겨우면 남은 두 달 동안 어쩌시려고요?”
“어쩌긴 뭘 어째? 내가 뭐 달아나 기라도 한대?”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마차의 속도가 떨어지더니 마침내 멈춰 섰다.
이윽고 선두에 있던 하후찬이 말을 몰고 달려왔다.
“남천 대협. 송구한데 첫날부터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가면 마을이 있기는 한데 너무 작아 저희를 수용하지 못합니다. 마을에서 흩어지느니 힘들더라도 노숙이 나을 것 같습니다.”
연적하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무래도 괜찮아요.”
사실 한서불침인 두 사람에게 노숙은 조금 불편할 뿐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마차를 한데 모아 쉴 자리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하후찬이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심통이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어쩐지 아까부터 눈치를 보더라니. 결국 첫날부터 노숙이네. 공자님, 어째 느낌이 싸합니다. 제대로 고생을 할 것 같은데요?”
“고생은 무슨. 구주(九州)의 겨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추운 것도 아니야.”
“하긴 구주가 좀 춥긴 추웠죠? 한서불침인 저도 바깥에 오래 있으면 살거죽이 빳빳하게 굳었으니까요. 그래도 공자님은 괜찮으셨지요?”
“아냐. 나도 밖에 오래 있으면 살이 얼얼하더라고. 눈은 또 얼마나 내리던지.”
연적하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구주는 다시 생각해도 사람이 살 곳이 못 됐다.
그런 혹독한 세상이 왜 현세보다 상위 세계라는 건지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이 떠드는 동안에 짐마차들은 세 대, 혹은 네 대씩 뭉쳐 바람을 막았다.
연적하와 심통은 느지막이 마차에서 내려왔다.
때마침 하후찬이 보낸 일꾼들이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연적하는 일꾼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런 뒤 공간 창고인 ‘마하담’에서 천막을 꺼내 치고, 안에다가 나무 깔판과 두툼한 이불을 깔았다.
마부들은 연적하가 허공에서 살림 도구를 계속 꺼내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저씨들, 추우면 들어와요.”
연적하의 초대를 받아 천막에 들어간 마부들은 신기한 눈으로 천막 안을 살폈다.
거대한 천막도 놀랍지만, 바닥에 깔린 나무와 두툼한 이불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든 걸 허공에서 꺼낸 연적하를 신선처럼 여기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감히 연적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의 먼발치에서 하룻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