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51
851회. 정말 그런지 확인하고 싶어서
연적하가 운종술로 만든 구름 위.
우두커니 서서 정면을 응시하던 풍연초는 다리가 저려 오자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그림 속의 신선들처럼 꼿꼿하게 서 있고 싶었지만 지금 같은 장거리 이동에는 무리였다.
한참 동안 다리를 주무르던 풍연초가 연적하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왜요?”
“괜찮으냐?”
“다리요?”
“아니. 채연이가 복수를 끝내 달라고 했잖느냐. 그런데 너는 언법(言法)을 수련하기 때문에 말한 건 꼭 지켜야 할 테고. 이제 어쩔 셈이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 못 들어 주겠어요?”
“법력에 문제는 없고?”
“내가 오락가락한 게 아니니까 그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사실 연적하도 괜찮은지 아닌지 몰랐다.
언법을 익히고 난 뒤로 이렇게까지 자신의 말이 널리 알려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자의(自意)로 오락가락한 게 아니니까 괜찮을 것도 같았다.
게다가 살인은-비록 그것이 복수라 해도-천리(天理)를 거스르는 일이다.
‘나쁜 일도 아닌데 설마 옥황상제 님이 물고 늘어지겠어?’
꽤나 낙천적인 성격의 연적하는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다.
풍연초는 연적하가 괜찮다고 하니 이내 털어 냈다.
그 뒤로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한 식경(약 30분)쯤 지났을까?
무료한 얼굴로 바람을 맞고 있던 풍연초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이고! 구름을 타고 다니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구나.”
“왜요?”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지 않으냐. 우리가 마차를 타고 다닐 때는 그래도 사람들과 부대끼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구름 위에 있으니 고적하기만 하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도 이런데 혼자 다니면 더하지 않겠느냐?”
“그런 건 있어요. 그래서 쉴 때는 객점이나 다관에 들르곤 해요.”
“그래. 사람들에게서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해라. 그러다 인간사가 재미없다며 어느 날 갑자기 우화등 선해서 사라지지 말고.”
“큰형님. 내가 연 누님과 아기를 남겨 두고 우화등선을 하겠어요?”
“하기야 너는 제수씨와 아기를 끔찍하게 생각하니 그럴 일은 없겠구나. 구름을 며칠 타 보니 신선들이 왜 속세에서 멀어지는지 알 것도 같다.”
“왜 멀어지는데요?”
“이렇듯 구름을 타고 훌훌 날아다니다 보면 저 아래의 인간사가 덧없게 느껴질 것 같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연적하는 부인하지 않았다.
당장 자신만 해도 운종술로 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불편할 때가 많았으니까.
***
하남성.
개봉.
해거름 무렵, 연적하는 개봉에 도착했다.
그는 풍연초를 집에 데려다주고, 풍운비에게 약속한 일파장천(一派長天)을 가르쳤다.
풍운비의 검술을 지켜보던 그는 조용히 자리를 떠나 상단에서 얻어 준 객점으로 돌아갔다.
연적하가 홀로 조금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심통이 내려왔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어. 심 노인도 저녁을 안 먹은 거야?”
“저야 진즉에 먹었지요. 공자님의 기운이 느껴져서 내려와 봤습니다.”
심통은 말동무라도 해 줄 생각으로 연적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초반(炒飯, 볶음밥)에 곁들여 나온 뜨거운 계란탕을 후후 불며 먹던 연적하가 지나치듯 물었다.
“누군지 좀 알아봤어?”
“하오문을 들쑤셔 봤지만 죄다 모르겠답니다. 진짜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원.”
말끝에 입이 심심했던지 심통은 주인에게 두강주 한 병을 가져오라 했다.
주인이 술을 내오자 심통은 본격적으로 자작자음(自西自飮)에 들어갔다.
“나를 보러 온 게 아니라 술 생각이 나서 내려왔지?”
“그럴 리가요. 그나저나 갔던 일은 잘 마무리 지어졌습니까?”
“어.”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내 표정이 어때서?”
“어째 똥 누고 뒤를 닦지 않은 얼굴이신데요?”
“에이! 식사하는데 더럽게.”
툴툴거리던 연적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핑곗김에 두강주를 한 잔 따랐다.
“캬! 단맛은 좋은데 너무 독하다.”
연적하는 두강주를 채 반도 마시지 않고 탁자 옆으로 치웠다.
“왜요? 입에 안 맞으십니까?”
“너무 독해.”
말과 함께 연적하는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때 주인이 시키지도 않은 돼지고기볶음 한 접시를 가지고 왔다.
연적하가 ‘이게 뭐냐?’는 얼굴로 빤히 보자 주인이 굽실거리며 말했다.
“안주로 드시라고 급히 만들어 봤습니다.”
“안 시켰는데요?”
“어이쿠! 돈은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두 분을 위해 만들어 온 것이니 그냥 드십시오. 두강주에는 기름진 안주가 잘 어울립니다.”
그제야 연적하의 표정이 풀어졌다.
“뭘 이런 걸다. 심 노인. 공짜라잖아. 잘 먹겠다고 인사드려.”
“잘 먹으마.”
심통이 마지못해 인사하자 주인은 굽실거리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돼지고기와 두강주를 번갈아 먹던 심통이 연적하에게 말했다.
“공자님도 안주와 함께 드셔 보십쇼. 풍미가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됐어. 나는 독한 건 질색이야.”
“공자님은 아직 남자가 되려면 멀었습니다. 독할수록 좋은 게 술인데, 독한 게 싫으시다니. 쯧쯧!”
심통이 혀까지 차자 연적하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심 노인. 술도 결국은 음식이야. 내 입에 맛있다고 다른 사람도 맛있어야 한다는 건, 무식한 소리라고. 술장사까지 한 사람 생각이 왜 그렇게 막혔어?”
“공자님. 술은 음식이 아닙니다. 술은 술입니다. 독할수록 좋은 것도 맞고요. 공자님도 술을 오래도록 즐기다 보면 제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술은 술입니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두강주도 밥이 쉴까 봐 꾹꾹 뭉쳐서 뽕나무 구멍에 넣어 뒀다가 만들어진 거라면서?”
“그야 그렇습니다만……. 술은 술입니다. 이 고귀한 술을 어떻게 음식 따위에 비교를 하십니까?”
“쯧쯧! 그 나이 먹고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며칠 굶어 봐야 진짜 고귀한 게 뭔지 알지. 굶어 볼래?”
연적하의 진지한 얼굴을 본 심통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디 술 따위를 음식에 대겠습니까? 실은 저도 술을 반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주(飯酒)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다급해진 그는 아무 말이나 가져다 붙였다.
그렇게 심통의 술에 대한 예찬은 시작하자마자 끝이 났다.
식사를 마친 연적하는 정말 두강주가 입맛에 맞지 않는지 술 대신 차를 마셨다.
빈 찻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연적하가 불쑥 말했다.
“내가 철산이 죽인 놈을 죽였잖아. 채연이에게 그 말을 해 줬더니……. 이제 복수를 끝내 줬으면 좋겠대.”
“그놈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요?”
“어. 애 낳을 때가 되니까 생각이 많아지나 봐. 다른 사람까지 다 죽이면 아빠 없는 애들만 늘어난다나?”
“왜 그랬는지는 알겠는데……. 그런 자세로는 상방 호위로 일하기 어려울 텐데요.”
“지금은 철산이가 죽어서 제정신이 아닐 거야. 시간이 지나고, 당장 눈 앞으로 칼이 날아오면 살기 위해서라도 싸우겠지.”
“그래서 공자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만두려고. 원수도 갚았는데 채연이가 바라는 대로 해 줘야지.”
“언법에 지장은 없겠습니까?”
“풍 형님도 그렇고, 다들 그것부터 물어보네. 나도 의동생을 잃은 사람인데.”
심통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그에게 오봉십걸은 혈육보다 가까운 사람들이니 상실감과 분노가 하늘을 찌를 터였다.
“그렇네요. 공자님은 그 정도로 만족하십니까?”
“만족하려고.”
의미심장한 대답에 심통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 각자가 선택한 차와 술을 마셨다.
문득 연적하가 찻잔을 내려놓고 객점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심통도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잠겨져 있는 객점 문을 누군가 거칠게 두드렸다.
쿵! 쿵! 쿵-!
주방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주인이 종종걸음으로 나와서 문을 열었다.
곧이어 각종 병기를 소지한 남녀 무인 열두 명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연적하와 눈이 마주치자 일제히 읍을 하며 인사를 올렸다.
“태상호법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연적하가 애매한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오밤중에 들이닥친 무인들은 파천마군 석무해의 제자인 ‘십이마군’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묻기 전에 마지막으로 석무해가 들어왔다.
“총채주님?”
석무해를 본 연적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무해가 들어오자 십이마군들은 밖으로 나가 객점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심통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연적하의 뒤에 시립(侍立)하듯 조용히 섰다.
석무해가 그런 심통을 슬쩍 쳐다보았다.
저건 그가 이제는 녹림이 아니라 석경장 사람임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해는 됐지만 한편으로 같잖은 생각에 심통을 향해 살기를 방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의형살인의 기운에 심통이 덜덜 떨 줄로 알았건만 심통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이 년 전까지만 해도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던 그가 담담히 자신을 보고 있다?
석무해는 당장 검을 뽑아 심통의 경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지금은 심통이 아니라 연적하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제법이군.”
그는 심통에게 한마디 하고 연적하의 앞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만 앉지? 태상호법은 총채주의 아래가 아닌데 뭘 그렇게 예를 차리나?”
“아, 예.”
연적하가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녹림 총채주 파천마군 석무해는 과거 그가 알고 있던 사람중에 최고 고수였다.
이 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석무해가 조금 전까지 심통이 사용하던 잔에 한가득 술을 따르며 말했다.
“청성산에서의 일은 전해 들었다. 지난 이 년간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게 지내던 사람이, 그런 식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네가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동안 폐관 수련이라도 한 것이냐?”
“폐관 수련은 아니고요. 멀리 좀 다녀왔어요.”
“그것이 어딘지 나도 좀 가 보고 싶구나. 나도 그곳에 다녀오면 고금제일인 소리를 들으려나?”
석무해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연적하는-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그의 눈빛에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총채주님은 안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운 좋게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다시 돌아올 수는 없거든요.”
“하지만 너는 돌아오지 않았느냐?”
“그곳에 안배되어 있던 단 한 번의 기회를 내가 썼으니까요.”
“아하!”
석무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도 연적하와 남궁연이 유명교주의 술법에 당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연적하가 확인하듯 물었다.
“혹시 유명교주를 만났어요?”
“유명교주가 오랑캐를 물리치고 구국의 영웅이 되어 돌아왔을 때 만났다.”
“유명교주가 뭐래요?”
“유명교의 술법으로 너와 남궁연을 범천욕계왕재천(梵天欲界王在天)이라는 곳으로 보냈다고 하더구나. 죽이지는 않았지만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던가. 그 마녀가 너와 남궁연이 돌아왔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혹 너를 찾아오지는 않았느냐?”
“전혀요. 나도 그게 이상해요. 왜 이렇게 감감무소식인지. 유명교주의 근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혹시 뭐 들은 거 있어요?”
“나도 그날 이후로 유명교주를 만나지 않았다. 황궁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은 게 마지막이다. 너는 유명교주에게 복수라도 할 생각이냐?”
“별로요.”
연적하는 시큰둥한 얼굴로 답했다.
유명교주가 사악한 짓을 많이 했지만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어요?”
“사람들이 말하기를 ‘남천 연적하가 천하십대고수에 비견된다’고 하더구나. ‘정말 그런지 확인하고 싶어서’라면 답이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