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54
854회. 생사의 깃발[生死播]
다음 날 아침.
연적하는 느지막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사시 말(오전 11시)에 등원용 대행수가 찾아왔다.
연적하는 출행일이 정해졌으려니 생각했지만, 등원용은 함께 차를 마시는 내내 상단의 일에 대해서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차를 다 마시고 등원용이 돌아가자 연적하는 황당한 얼굴로 심통을 보았다.
“대행수는 왜 온 거지?”
“공자님에게 눈도장을 받으려고 왔겠지요.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이런 제길. 나는 출행일을 알려 주려고 온 줄 알았는데.”
“개봉에서 열흘간 머무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딱 부러지게 날짜를 정한 건 아니잖아.”
“아마 열흘이 맞을 겁니다. 다들 그러려니 하고 있던데요 뭘.”
“하아! 앞으로도 닷새나 더 객점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니. 그렇게 몰아치더니 쉴 때는 너무 쉬네.”
“그런 낙이라도 있어야죠.”
“낙은 무슨. 시간만 아깝지. 남연객점에 가서 수금이나 해야겠다.”
연적하가 일어나자 심통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심 노인도 가게?”
“이젠 따로 할 일도 없잖습니까?”
“그러든가.”
연적하는 반대하지 않았다.
도적의 정체가 마교라는 걸 알게 된 지금 더 이상 심통이 따로 움직일 일은 없었다.
***
화상촌.
남연객점.
경신술로 달려간 두 사람은 일다경(약 20분)도 안돼 화상촌 초입에 도달했다.
화상촌은 유입된 사람이 많은지 그 사이에 점포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연적하가 중얼거렸다.
“못 보던 가게가 많이 늘었는데? 이런 촌구석에 무슨 일이래?”
오봉산의 아랫마을만 해도 몇 년간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빈집이 늘면 늘지 새 건물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화상촌에 들어서니 과거 한적하던 때와 달리 제법 번화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외진 곳에 갑자기 무슨 개발 바람인지 모르겠습니다.”
노회한 심통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단지 점포만 늘어난 게 아니라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중 절반은 상인으로 보였다. 연적하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객점도 잘 되겠네.”
심통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이 많으면 자연히 객점의 손님도 늘어날 테니 좋은 일이었다.
조금 걷자 남연객점이 눈에 들어왔다.
정오 무렵인데 벌써부터 객점은 드나드는 손님들로 분주해 보였다.
연적하와 심통이 안으로 들어가자 상도가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공자님! 어서 오십쇼!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변성기를 지났는지 제법 굵직해진 목소리에 연적하는 괜히 웃음이 났다.
“남 소저는?”
“방 청소를 하고 계십니다. 곧 내려오실 겁니다.”
“남 어르신이 안 보이네? 또 마실 가셨냐?”
그러자 계산대에 있던 상일운이 나와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남 어르신은 재작년 가을에 돌아가셨습니다. 인의표국을 통해 공자님께 편지를 보냈는데 아무도 없다고 다시 가져오더군요.”
“아…….”
연적하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필 구주에 있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니 안타까웠다.
심통만큼 정정하던 남초결이 그렇게 갑자기 갈 줄이야…….
때마침 이 층에서 내려오던 남수경이 연적하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연 공자.”
“할아버지 소식은 들었어. 내가 먼 곳에 가 있느라 연락을 못 받았네? 알았으면 바로 달려왔을 텐데…….”
“연 공자가 실종됐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할아버지는 어쩌다 갑자기 그렇게 된 거야?”
“재작년 여름부터 몸이 좀 안 좋았어요. 의원은 노환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려니 했는데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더니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가 연 공자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할아버지를 떠올리던 남수경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남초결은 죽기 직전까지 손녀 걱정을 했다.
그가 죽음을 직감한 그때까지도 남수경에게 이렇다 할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연적하는 남수경과 함께 남초결의 무덤을 찾아갔다.
남초결의 무덤은 연적하가 자주 가던 자살바위 뒤편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연적하는 남초결의 무덤에 술 대신 남초결이 애용하던 차를 한잔 올렸다.
가깝게 지내던 사람의 죽음 앞에 연적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이철산의 시체를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참 멍하니 서 있던 연적하는 남수경에게 애도의 뜻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남수경은 그의 뜻을 알고 머리를 숙여 화답했다.
“늦게라도 와 줘서 고마워요. 할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
남수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인연이란 참 묘하다.
연적하가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면 이렇듯 그와 가까이 지내지 못했을 터였다.
“객점은 계속 운영할 생각이야?”
“네. 연 공자 덕분에 운영하는 데 어려움은 없어요.”
“내가?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삼보방과 천화방이 음으로 양으로 객점 운영을 도와주고 있어요.”
“아! 삼보방…….”
고개를 주억거리던 연적하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녹담평이 삼보방이었지? 그놈은 요즘 어때?”
“착해졌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소문 믿지 말고 조심해.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라.”
“훗! 그는 객점 주변에 오지도 않아요.”
“그럼 다행이고. 그나저나 마을이 엄청나게 발전했더라? 객점에도 도움이 되지?”
“그럼요. 그런데 장사가 잘되니까 경쟁자가 생길 것 같아요.”
“경쟁자? 누가 화상촌에 객점이라도 세운데?”
“만덕상방이라고 알아요?”
“들어 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알잖아. 나 그런 쪽으로 관심 없는 거.”
“풋! 예전에 할아버지가 객점을 그쪽에 팔려고 했었어요.”
“객점을 팔려고 했다고? 언제?”
연적하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남수경을 보았다.
그래도 절반의 소유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너무 놀라지 마세요. 연 공자가 사기 당해서 주인 행세를 하기 훨씬 전의 일이니까.”
“아하!”
“그 뒤로 몇 번 더 할아버지에게 찾아왔는데, 공동 주인이있다는 걸 알고 포기했어요. 남연객점 인수가 어렵자 아예 새로 짓기로 했대요.”
“화상촌에 객점 두 개는 좀 많은 거 아냐?”
“많죠. 그런데 앞으로 마을이 더 커질 테니 괜찮다고 밀어붙인다 하더라고요.”
“야아! 남들 잘되는 꼴을 못 보겠다는 거네?”
“화상촌이 더 커지면 문제가 없기는 한데……. 그때까지는 경쟁이 치열해질 것 같아요.”
“마을이 콩나물처럼 쑥쑥 크는 것도 아니고 너무하네.”
“그래도 우리 객점에 적대적이지 않은 게 어디에요. 만약 그들이 독하게 나오면 우리는 망할지도 몰라요.”
“우리가 망하면 그들도 망해.”
“그들이 망한다고요?”
“어, 내가 가서 부숴 버릴 거니까. 남의 밥그릇을 깨면 자기 밥그릇도 깨지는 게 당연한 거야.”
“하하하! 장 행수님을 만나게 되면 연 공자의 이야기를 꼭 전해 줄게요.”
“객점이 하나 더 생기면 당분간 운영은 어려워지겠네?”
“그럴 거예요. 연 공자에게 돈을 많이 벌어 줘야 하는데, 미안해서 어쩌죠?”
“괜찮아. 사실 남 어르신에게 내 지분을 도로 넘길까 생각하고 왔는데, 어렵겠지?”
만덕상방의 객점과 경쟁할 걸 생각하면 남수경에게 자금이 넉넉해야 했다.
“어려워져도 연 공자 몫은 부족하지 않게 챙겨 줄 테니 그런 말씀 마세요.”
남수경이 펄쩍 뛰었다.
그녀는 연적하와의 동업 관계를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연적하인 까닭이다.
연적하 역시 그녀의 마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 대신 분배는 공평하게 해. 나도 함께 짐을 나눠야지. 장사 안 된다고 네 몫만 줄이면 내가 악덕 전주(錢主) 같잖아. 난 그런 거 딱 질색이야.”
“알았어요. 지분 문제는 어느 정도 운영이 안정되면 그때 다시 의논하기로 해요.”
그녀도 연적하가 끝까지 객점 지분을 가지고 있기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연객점과 석경장의 거리가 너무 멀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그에게 수익금을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운영이 안정되면’이라고 했지만, 실은 ‘마음이 안정되면’이 맞는 표현이다.
연적하도 그런 생각을 했던가 보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불쑥 물었다.
“혼인은 안 해?”
“나는 혼인을 도피처로 삼고 싶지 않아요.”
“누가 그러래? 혼인을 해 보니까 좋아서 하는 말이지. 같이 늙어 갈 사람 하나쯤 옆에 있는 것도 괜찮잖아?”
“연 공자 같은 사람이 있다면야 나도 사양하지 않죠. 그런데 내 주변에는 녹담평 같은 남자투성이라. 생각하고 싶지도 않네요.”
“나 같은 사람이 흔한 줄 알아? 그러다 할머니 된다. 나하고 녹담평의 중간쯤에서 잘 찾아봐.”
“풋! 그런 사람이 있으면 고려해 볼게요.”
“그렇다고 대충 아무나 데리고 살 생각은 하지 말고. 괜히 이상한 놈 만나면 인생 피곤해진다.”
“생각해 줘서 고맙네요. 그런데 내가 대충 아무나 데리고 살 사람 같아요?”
“아니, 노파심에서 해 본 소리지. 가자.”
갑자기 돌아선 연적하가 객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연적하는 남연객점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남연객점은 그가 와룡장에서 도망친 뒤 처음으로 소유한 ‘자기 집’이다.
그런 만큼-개봉의 객점들에 비하면 작고 허름했지만-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는 방에서 뒹굴뒹굴 시간을 보내며 그간 쌓였던 육체와 정신의 피로를 풀었다.
상단이 개봉에 도착한 지 여드레 되는 날.
연적하와 심통은 등원용이 애타게 찾기 전에 개봉의 객점으로 돌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연적하와 심통이 돌아온 이후로 등원용은 아침 저녁으로 객점을 방문했다.
말로는 ‘인사차 왔다’고 했지만 실은 연적하가 다른 곳으로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개봉에 도착한 지 열흘 후, 객점 앞으로 상단 행렬이 모여들었다.
이제 성도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연적하는 자신이 타고 온 짐마차를 찾자마자 짐 위로 훌쩍 몸을 날렸다.
그가 자리 잡는 걸 확인한 호위대주 태산검 하후찬이 손을 까딱였다.
오십 대가 넘는 짐마차와 수백 명의 상인과 짐꾼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녹림에 소속된 산채와 수채의 숫자는 칠십이 개나 된다.
그중에는 오봉산채처럼 점잖은 곳도 있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했다.
특히나 하남성에는 하남삼악으로 불리는 산채가 있는데 적룡채, 향산 산채, 학산산채가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사악하기로 으뜸가는 곳은 적룡채다.
특히나 적룡채의 채주인 혈제 종리목은 인육을 먹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녹림의 청녹색 깃발에 생사(生死)라는 글자를 수놓아 다녔다.
펄럭. 펄럭.
관도에 박혀 있는 깃발을 확인한 금린대 부대주 오계중이 허겁지겁 호위대로 돌아갔다.
뭘 봤는지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한쪽 어깨를 헝겊으로 칭칭 동여맨 금린대주 구명현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오계중. 웬 호들갑이냐?”
“크, 큰일 났습니다. 새, 생사번(生死幡)입니다.”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구명현의 상체가 휘청했다.
생사번은 악명이 자자한 혈제 종리목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