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55
855회. 채주님! 안 됩니다!
갑자기 상단 행렬이 멈추자 노규 행수가 와룡검객 연무백과 금린대주 구명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금린대주 구명현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혈제 종리목의 생사번(生死幡)이 나타났습니다.”
“혈제요?”
노규의 얼굴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하남성에서 혈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영하(颍河)에 있는 적룡채가 하남 삼악으로 불리게 된 것도 채주인 혈제의 악독함 때문이다.
그의 손에 몰살당한 상단이 한두 개가 아니다.
최초 혈제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던가.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안 될까요?”
노규의 말에 구명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지금까지 생사번 앞에서 도망친 상단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혈제가 제안을 해 올 겁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통과고, 거부하면 죽는 거죠.”
“…….”
노규가 황망한 눈으로 연무백을 보았다.
그가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연무백뿐이었다.
연무백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솔직히 혈제는 자신의 능력을 한참 초월한 상대라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상단이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기만 하자 상인과 짐꾼 들이 술렁거렸다.
그때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펄럭-.
바람에 늘어져 있던 깃발이 활짝 펼쳐지며 ‘생사(生死)’라는 글자가 드러났다.
술렁거림이 차츰 사라졌다.
상인과 짐꾼 들에게 ‘생사번’은 저승사자와도 같으니 당연하다.
연무백이 구명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금린대주, 어쩔 거요?”
그가 호위대의 대주이니 상방을 대표로 혈제와 담판을 지어야 했다.
하지만 구명현에게는 감히 혈제와 말을 섞을 담력이 없었다.
“내가 나서야 함이 마땅하나 어깨의 부상으로 자칫 혈제에게 만만하게 보일 수 있으니……. 고문께서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그는 어깨의 부상을 핑계로 연무백에게 떠넘겼다.
연무백이 눈을 찌푸렸다.
어차피 칼부림할 게 아닌데 어깨 부상을 핑계로 빠지는 그가 못마땅했다.
무엇보다 핑계가 어깨의 부상인 게 마음에 걸렸다.
이래서야 자신의 행동이 상단에 나쁜 영향을 미친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남궁세가에서 십 년을 보낸 연무백은 그런식의 책임 떠넘기기를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구 대주. 분명하게 말하시오. 혈제와 대화를 하지 못하겠다는 게 어깨의 부상 때문이오? 아니면 혈제와 대화할 자신이 없어서요?”
노골적인 연무백의 지적에 구명현은 딴청을 부리기만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연무백은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딱 보니 구명현은 뭐든 잘못된 일은 자신의 잘못으로 떠넘길 분위기다.
이런 건 초장에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덤터기를 쓰게 될 수도 있다.
연무백이 차갑게 말했다.
“구명현. 상행 도중에 호위대 대주인 네가 고문인 나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이 벌어졌다. 그 결과 너는 어깨에 부상을 입었지. 그것은 고문에게 먼저 시비를 건 네놈의 잘못이냐? 아니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네놈에게 부상을 입힌 나의 잘못이냐?”
혈제를 앞에 두고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노규가 급히 나섰다.
“고문님, 진정하시지요. 잘잘못은 나중에 가리시고 지금은 혈제와 대화부터…….”
노규는 구명현이 방주의 아들인지라 은근슬쩍 넘기려 했다.
그러나 작정하고 시작한 연무백은 물러서지 않았다.
“잘잘못을 나중에 가리다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행수님도 그게 누구 잘못인지 모릅니까? 방주의 아들은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겁니까?”
“그게 아니라……. 일의 우선순위를 생각했으면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지금은 혈제를 만나는 게 우선이 아닙니까?”
“그 혈제를 만나는 일이 마치 나 때문에 틀어진 것처럼 말하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행수님도 말해 보십쇼. 구명현의 부상이 내 잘못입니까? 아니면 그가 주제를 모르고 나대다가 다친 겁니까?”
“…….”
노규는 연무백의 추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그게 구명현의 잘못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무런 뒷배가 없는 연무백과 달리 구명현은 방주의 아들이다.
뒤에서라면 모를까?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야 했다.
연무백은 노규가 답하지 않자 다시 구명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구명현. 호위대 대주인 네놈이 끝내 어깨 부상을 핑계로 나서지 않겠다면, 혀를 잘라 버리겠다. 혀가 없으면 혈제와 대화를 못 할 테니 그때는 내가 나서는 게 맞겠지. 어떻게 할 테냐? 혀를 잘라 주랴? 아니면 혈제와 협상할 자신이 없어 어깨 핑계를 댔다는 걸 인정하겠느냐?”
노규는 깜짝 놀랐지만 살기등등한 연무백의 눈빛을 보고 감히 나서지 못했다.
‘아뿔사! 와룡검객이 누군지를 잊고 있었구나!’
그는 고문 이전에 강호를 풍미한 무림의 고수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상방 사람들만 상대하다가 그 사실을 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건 노규만이 아니다.
구명현은 ‘혀를 자르겠다’는 말에 기함했다.
방주의 아들인 자신의 어깨에 구멍을 낸 사람이니 그러고도 남았다.
머뭇거리던 구명현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혈제를 상대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연무백이 사나운 눈으로 구명현을 보았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정이 빠졌으니 절반의 고백이지만 더 타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노규와 구명현을 한차례 쓸어 보던 연무백은 ‘흥!’ 하고 냉소를 친 후에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낙양 금와상방의 상단이며, 저는 호위대의 고문인 연무백이라 합니다. 생사번의 주인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정면 좌우측의 숲에서 도적들이 와글와글 몰려 나왔다.
무려 오십여 명에 이르는 숫자 앞에서 스무 명의 호위대가 바짝 억어 붙었다.
만약 상대가 일반 도적 떼라면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는 하남삼악의 하나인 적룡채.
금와상방의 호위 스무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도적들 속에서 사십 대로 보이는 거한이 팔자걸음으로 다가왔다.
“이놈의 자식들! 살다 살다 너희들처럼 굼뜬 상단도 처음 본다. 나는 적룡채의 부채주인 무적패도 님이시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가지고 있는 물건을 다 내려 두고 물러나라. 손바닥 만한 꾸러미 하나라도 챙긴 놈은 죽는다. 알겠느냐?”
연무백이 곤혹스러운 눈으로 무적패도를 보았다.
받아들일 만한 제안을 해야 할 텐데 ‘물건을 다 내려 두라’니 기가 막혔다.
“부채주님. 저희도 먹고살 정도는 남겨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건을 다 가져가시면 저희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닙니다. 저희더러 죽으라는 말씀은 거두어 주시지요.”
그러자 무적패도는 군소리 없이 뒤로 돌아 산적들에게 돌아갔다.
잠시 기다리던 연무백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상대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 어떻게 할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규가 속삭이듯 물었다.
“고문님, 적룡채가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연무백은 솔직하게 답했다.
적룡채와 처음 마주쳤기에 저들의 반응이 어떨지 알 수가 없었다.
구명현이 좌우로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어떻게 나오긴요? 몰라서 묻습니까? 처음 제안을 거부하면 다 죽인다고 들었습니다. 곧 물밀듯 몰아쳐 올 겁니다. 퇴로가 아직 막히지 않았으니 달아납시다.”
“물건을 포기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상단의 책임자인 노규가 황당한 눈으로 구명현을 보았다.
그래도 상단의 호위를 책임진 사람이 저렇듯 무책임할 줄이야!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힌 구명현은 대꾸하지 않고 호위대로 고개를 돌렸다.
“적룡채의 제안을 거절하면 모두 죽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퇴로가 아직 열려 있으니 달아나면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할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라.”
융통성 있는 대주의 말에 스무 명의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우물쭈물하다가 적룡채에 죽는 것보다 달아나는 게 백번 나은 선택이라 믿었다.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구명현이 상인들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이제 곧 적룡채가 모두를 죽이려 할 것이오! 각자도생(各自圖生)하시오!”
한순간 상단이 발칵 뒤집혔다.
숨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상인과 짐꾼 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황당한 눈으로 보던 노규도 뒤늦게 그 대열에 동참했다.
그러나 연무백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달아나는 상단의 후미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녹림에서 유명한 산채나 수채의 숫자는 아무리 적어도 백 명이 넘는 그건 앞을 막아선 오십여 명의 도적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와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열려 있던 퇴로가 한순간 막혔다.
상단의 후미를 막아선 숫자는 한눈에 봐도 일백이 넘었다.
이윽고 퇴로를 봉쇄한 도적들이 파도처럼 상인과 짐꾼, 호위 들을 덮쳤다.
도적들은 마부와 짐꾼, 상인, 호위 들을 도륙하며 전진했다.
“아악!”
“살려 주십쇼! 악!”
“크악!”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 속에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지켜보던 연무백이 칼을 뽑았다.
결과야 뻔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적에게 목을 내어 줄 수는 없었다.
혈제 종리목은 굶주린 사자처럼 상단에 뛰어들어 살육을 벌였다.
그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호위 하나의 목이 날아갔다.
다른 도적들과 달리 그는 그 난전 중에도 꼭 참수(斬首)를 했다.
그리고 잘린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온몸으로 받으며 킬킬거렸다.
풀을 베듯 종횡무진으로 머리를 자르던 그가 멈칫했다.
아까부터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달아나는 한 놈이 눈에 거슬렸다.
한쪽 어깨에 천을 칭칭 동여맨 젊은 놈이었다.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그냥 두면 포위를 뚫고 달아날 게 분명했다.
혈제는 지금 막 자신과 눈이 마주친 상인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너는 잠시 기다려라.”
말을 마친 그는 유령처럼 사라졌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바짝 얼어 있던 노규는 그 자리에 풀썩 앉았다.
옆에서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가는 구명현의 앞으로 혈제가 깃털처럼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구명현은 다급한 마음에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검을 내질렀다.
현천팔극검의 일 초식 천궁섬이다.
그러나 혈제는 가볍게 구명현의 검을 튕겨 냈다.
채앵-.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구명현의 목을 베었다.
‘서걱’ 하는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구명현의 머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촤아아아-.
뿜어져 나오는 피를 온몸으로 받던 혈제가 다시 상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망연자실한 얼굴로 올려다보는-상인의 목을 거침없이 베었다.
하지만 때마침 불쑥 끼어든 검 한 자루가 그의 검을 가볍게 쳐 냈다.
챙-!
튕겨 났던 혈제의 검이 자연스럽게 중간에 난입한 호위를 향했다.
차차차차창-!
두 개의 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차례나 맞부딪쳤다가 떨어졌다.
혈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자신의 혈우만겁공을 받아 내는 호위라니!
‘재밌는 놈이군.’
지금쯤 자신의 마기에 기혈이 뒤틀려 나가떨어져야 정상이다.
그런데 상대는 헐떡거리기만 할 뿐 눈빛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하지만 살육에 취한 혈제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혈제의 눈이 백안(白眼)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벼락처럼 검을 휘둘렀다.
쩡-!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호위, 연무백의 검신이 뚝 부러졌다.
혈제의 검이 기세를 몰아 무방비하게 드러난 연무백의 목을 베어 갔다.
죽음을 직감한 연무백의 눈이 부릅떠졌다.
절체절명의 순간 대도(大刀)가 끼어들어 혈제의 검을 막았다.
채앵-!
곧이어 적룡채의 부채주 무적패도 마초가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채주님! 안 됩니다!”
그제야 혈제의 백안이 스르륵 풀리며 핏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이놈! 무슨 짓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