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58
858회. 그래서 제가 죽입니까?
연적하가 막 천산마룡 진궁의 제의를 받아들이려 할 때다.
강호에서 닳고 닳은 심통이 두 사람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천마대 대주인 당신의 생각은 잘 들었소. 그런데 마교 교주가 당신의 말대로 하겠소? 마교는 ‘한 방울의 피를 흘리면 한 바가지의 피로 갚는다’고 하던데, 마교 교주가 그냥 넘어가 주겠냐 이 말이오?”
“…….”
심통의 지적에 진궁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마교 교주가 생사불괴문과 세 개의 대를 보낸 것도 복수를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들은 모르겠지만 교주인 천자마 단제산은 생사불괴문 출신이다.
생사불괴문의 문주 불사신마 단극진과는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
교주가 그의 죽음을 알고도 가만히 있으려 할까?
“교주님은 생각이 깊으신 분이오. 내가 남천 대협의 무위를 증언하면 교주님도 받아들이실 게요.”
진궁은 모든 것이 자신의 입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마교의 자존심이 드높지만 교주 역시 승산 없는 일에 뛰어들 사람은 아니니까.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이런 일은 상대를 믿고 가야지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일이 틀어져 마교 교주가 복수를 한답시고 나대면 그때 손을 써도 된다.
진궁의 제안을 따른다고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없는 것이다.
단지 천산에 찾아가느냐, 강호에서 기다리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무엇보다 전의를 상실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진궁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살인은-최소한 지금까지는-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물론 당한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진궁을 보던 연적하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봐.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구사일생한 진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다 고작 살아남은 일에 기뻐하는 자신을 보며 흠칫 놀랐다.
천마대 대주가 시정잡배들과도 같은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자학을 했음에도 모멸감이나 수치심 따위의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연적하가 심통에게 턱짓을 했다.
“심 노인. 풀어 줘.”
“예.”
심통이 진궁에게 다가가 그에게 했던 점혈을 풀어 주었다.
진궁이 고개를 들어 심통을 보자 심통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에게 진궁은 굶주린 늑대와도 같았기에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 것이다.
“진 씨.”
진궁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호칭임을 알지 못했다.
마교에 입교한 이래 그를 ‘진 씨’라고 부른 사람이 없어서다.
마교의 지존인 교주조차도 그를 ‘진궁’이나 ‘진 대주’라고 불렀다.
“진 씨. 안 들려?”
연적하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진궁은 ‘진 씨’가 자신을 뜻한다는 걸 알았다.
“예.”
그는 눈을 내리깔고 공손히 답했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비루한 상황에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몸이 알아서 수그렸다.
생각과 육체가 따로 놀자 영혼이 허공을 부유하는 느낌이다.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진궁에게 연적하가 말했다.
“가서 마교 교주를 잘 설득해 봐. 나도 유구한 역사의 종파를 내 손으로 없애고 싶지 않으니까. 역사가 좀 있는 거 맞지?”
“예. 천 년이 넘습니다.”
“뭐? 천 년밖에 안 돼? 얼마 안 됐네?”
연적하가 떨떠름한 얼굴로 진궁을 보았다.
수십만 년 된 종문을 경험해서 그런지 천 년은 길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진궁은 ‘얼마 안 됐다’는 말에 기가 막혔지만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강호에서는 강자의 말이 곧 법이요 진리인 까닭이다.
“여하튼 명맥이라도 유지하고 싶으면 천산에 꼭꼭 숨어 있으라고 해. 괜히 강호에서 얼쩡대다가 내 눈에 띄면 좋은 꼴 못 볼 테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예.”
“가 봐. 다시 만나지 말자고. 전에 노도경하고도 그렇게 헤어졌는데……. 쯧!”
노도경을 떠올린 연적하가 혀를 찼다.
그냥 천산에서 잘 살지 왜 죽을 자리를 찾아 나오는지 모르겠다.
진궁은 머리를 꾸벅 숙여 보인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윽고 심통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마교 교주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진궁을 그냥 쳐 죽이지 그러셨습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가만히 있는 사람을 죽이는 건 진짜 못 할 짓이야.”
“가만히 있다뇨? 그놈들이 먼저 공자님을 죽이기 위해 찾아왔구먼.”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면 싸울 의지가 없는 사람은 죽이는 거 아니야.”
“마교는 이미 공자님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내가 아직 아니면 아닌 거야.”
“뭐, 공자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거겠지요. 여하튼 마교 놈들은 이대로 끝내지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했잖아. 그들을 위해 기회를 준 게 아니야. 나를 위해서 그런 거지. 사람을 죽인다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잖아.”
“…….”
심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상대가 악인이라 해도 죽이면 찜찜하다.
‘나를 위해 기회를 주었다’는 연적하의 말이 새삼 마음에 와 닿았다.
***
다음 날 정오.
금인상방의 상단은 마침내 천년고도(千年古都)라 불리는 서안에 진입했다.
개봉으로 갈 때와 달리 성도로 돌아가는 상단은 눈에 띄게 여유로웠다.
무엇보다 정체불명의 도적들에 대한 걱정을 덜어 낸 탓이다.
연적하가 조양봉에서 마교도를 몰살한 뒤로 정체불명의 도적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금인상방의 상단을 통해 정체불명의 도적들이 마교였으며, 그들이 조양봉에서 연적하에게 떼죽음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호사가(好事家)들은 남천 연적하를 천하십대고수의 으뜸이라 말하기 시작했다.
서안에서 하루가 지나도록 등원용 대행수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대행수와 상인들은-마지막 상행을 앞두고-대대적으로 물건을 매 매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바람에 연적하와 심통은 객점에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날 저녁.
저녁 식사 중인 연적하와 심통의 자리로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마교의 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심통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뭐냐?”
삼십 대로 보이는 사내가 허리를 꺾으며 말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소인은 오봉산채의 식구인 전풍이라 합니다!”
오봉산채라는 말에 심통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못 보던 얼굴인데?”
“제가 작년에 입산을 해서 모르실 겁니다.”
“그런데? 하남성에 있어야 할 사람이 섬서성까지 무슨 일이냐?”
“마 채주님이 보내서 낙양에 갔다가, 이곳까지 오게 됐습니다.”
“마형도가 왜?”
“남천 대협께 전하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전풍이 연적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그를 힐끔거렸다.
그러자 연적하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전 형제. 먼 길을 온 것 같은데 일단 앉아요.”
“제가 어찌 감히……. 괜찮습니다.”
전풍이 손사래를 쳤다.
천하에 위맹이 쟁쟁한 구천노도 심통과 남천 연적하와의 합석이라니?
안면이 있다면 모를까?
이제 갓 녹림도가 된 전풍에게 두 사람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연적하는 더 권하지 않고 물었다.
“싫으면 말고요. 그런데 셋째 형님이 무슨 말을 전하라고 했어요?”
“와룡검객 연무백이 적룡채에 잡혀갔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적룡채가 무백 형을 잡아갔다고요?”
연적하가 자연스럽게 연무백을 형이라 부르자 전풍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다른 녹림도와 달리 오봉산채의 도적들은 연적하의 가정사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연 대협과 배다른 형제들의 관계가 나쁘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네…….’
이렇게 되면 적룡채의 채주만 똥을 밟은 셈이 된다.
그는 황급히 설명을 이어 갔다.
“예, 금와상방의 상단에서 연무백……을 호위로 고용했다고 합니다.”
전풍은 연무백의 호칭을 뭐로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연적하가 ‘형님’으로 모시는 사람의 이름을 그냥 불러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단이 영하(颍河) 인근을 지나던 중에 적룡채를 만났고, 결국 잡혀간 것이지요.”
“무백 형님이 누군지 알고도 잡아갔다는 거예요?”
“혈제는 본래 싸움이 일어나면 다 죽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연무백……이 태상호법님의 혈육이라 그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알고도 잡아갔다?”
연적하의 얼굴에서 냉기가 풀풀 날렸다.
연무백과 자신의 관계를 알고도 잡아간 것은 자신을 무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통도 그렇게 생각했던지 대뜸 혈제를 욕했다.
“아니! 혈제 그놈이 미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자님의 형제를 잡아가다니?”
연무백을 위해서가 아니다.
상대가 연적하의 원수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연적하와 눈곱만큼의 관계만 있어도 건드려서는 안 됐다.
전풍은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눈치만 봤다.
씩씩거리며 뜨거운 콧김을 내뿜던 연적하가 전풍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 형제.”
“예!”
“수고스럽겠지만 심부름을 좀 해 줘야겠네요.”
“말씀만 하십쇼. 목숨 걸고 완수하겠습니다.”
전풍이 씩씩하게 답했다.
연적하는 그런 전풍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전 형제, 나는 처음 본 사람에게 목숨 걸 일은 부탁하지 않아요.”
“아, 저의 각오가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혈제가 상방 사람들도 잡아갔나요?”
“생존자들을 싹 다 잡아 적룡채로 끌고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혈제에게 전해요. 당장 상방 사람들을 풀어 주고, 무백 형님과 함께 나를 찾아오라고.”
“존명!”
“가 봐요.”
“예!”
전풍은 연적하에게 머리를 조아린 후에 급히 객점을 떠났다.
연적하는 혈제를 떠올려 보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본래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도둑들에게 관심이 없어서다.
“심 노인.”
“예.”
“혈제를 알아?”
“제가 빌빌거리고 다닐 때 먼발치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야?”
“피만 보면 눈깔이 돌아가는 미친놈이었습니다. 그가 익힌 취혈만겁 공의 부작용이라고도 하고, 그냥 살인을 좋아해서 그런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취혈만겁공?”
“사람의 정혈(精血)에서 기운을 끌어오는 공법입니다.”
“마공이네?”
“그런 셈이지요.”
“무림공적이야?”
“예. 무림공적이 된 지 꽤 되지만 워낙 무위가 뛰어나 칠파일문에서도 그를 피해 다닙니다. 그러고 보면 무림공적이라는 것만큼 유명무실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 이치가 원래 그런 거야. 잔챙이들만 죽어 나가지 대어들은 깊은 물에서 유유자적하게 살아간다고. 그래서, 심 노인이 볼 때 그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야?”
심통이 연적하를 힐끔 보았다.
혈제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제가 죽일까요?”
“뭐래? 공자님 말씀 몰라?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했어.”
“공자가 그런 말도 했습니까? 의외로 괜찮은 놈이었네요? 그래서 제가 죽입니까?”
심통은 연적하가 거절하지 않았음을 떠올리고 집요하게 물었다.
“심 노인. 그런 건 정해 두는 게 아니야.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건 물이 흐르듯 해야 하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