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6
86회. 기로 만물에 응하라(眞氣應物)
현월은 진무궁에 도착해서도 반신반의했다.
연적하라는 소년이 너무 어려서 천지상인과의 관계를 추측하기 어려워서다.
사백은 지난해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뒤, 태화궁에서 진무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내외적으로 진무궁의 궁주는 장문인 다음가는 자리였다.
“사백님, 현월입니다.”
“무슨 일이냐?”
천지상인은 경전에서 눈을 떼지도 않았다.
현월은 연적하라는 소년이 운도 없다고 생각했다. 천지상인은 한번 책을 잡으면 장문인이 불러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백님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
역시나 천지상인은 귓등으로 흘려 들었는지 대답이 없다.
현월은 다시 한 번 크게 말했다.
“연적하라는 소년이 찾아왔는데, 다음에 다시 오라고 할까요?”
순간 천지상인이 읽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왔다.
“손님의 이름이 연적하라고 했느냐?”
“예, 해검지에서 잠시 기다리라 했습니다.”
그러자 부랴부랴 신발을 꿰어 신은 천지상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경공술까지 사용해서 말이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놀란 현월은 멀어져 가는 사백의 뒷모습을 보며 눈만 끔뻑거렸다.
“연 소협! 어서 오시오.”
천지상인은 헤어진 연인이라도 만난 듯 연적하의 두 손을 잡고 흔들었다.
기대 이상의 환대에 연적하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동안 잘 지냈어요? 지나가던 길에 생각이 나서 들려 봤어요.”
“허허. 그동안 소식이 없어서 나를 잊은 건 아닌가 생각했소. 자자, 올라가십시다.”
“잠깐만요.”
연적하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풀었다.
“검은 왜 그러시오?”
“무당산에 오르려면 검을 맡겨야 한다고 하던데요?”
천지상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허허, 그러지 않아도 되오. 가끔씩 철없는 애송이들이 비무를 하자고 찾아오는데, 그들을 걸러 내기 위해 만든 규칙일 뿐이오. 연 소협의 검을 감히 누가 맡아 둘 수 있겠소.”
“아, 그런 거예요?”
연적하는 다시 검 집을 허리에 묶었다.
하기야 무당파처럼 유명한 문파라면 날파리들이 꼬일 만도 하다.
연적하가 슬쩍 젊은 도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현송이 뻘쭘한 얼굴로 슬그머니 시선을 외면했다.
천지상인과 연적하가 산으로 올라간 직후 현월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텅 빈 해검지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물었다.
“사제, 손님은 갔느냐?”
“예. 사백께서 직접 와서 모시고 갔습니다. 그 연적하라는 사람은 누구기에 사백이 해검지까지 내려오신 겁니까? 아주 정중하게 모셔 가던데요?”
“나도 모르겠다. 내다보지도 않고 경전을 읽으시다가, 이름을 듣고는 갑자기 서두르시더라.”
“허, 경전을 읽던 중이면 장문인이 불러도 응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러게 말이다. 누구인지 감이 안 잡히네.”
“혹시 손자가 아닐까요?”
“풋, 허튼소리. 속세의 연을 끊고 홀로 지내시는 분에게 무슨 손자.”
“그런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모르지. 우리가 모르는 높으신 분의 자손일지도.”
삼대제자인 현월과 현송은 연적하의 정체를 두고 오래도록 떠들어 댔다.
***
천지상인은 연적하를 진무궁으로 데리고 갔다.
무당파 제자도 출입이 까다로운 진무궁에 외부인을 들이는 일이지만 천지상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연적하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다.
책꽂이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장서를 둘러보던 연적하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아! 진짜 책 많네요.”
“저 무서들은 무당파의 또 다른 역사라고 할 수 있소.”
“저게 전부 무공에 대한 책이란 말인가요?”
“그렇소.”
연적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무공에 관해 저렇게 많은 책들이 있을 줄이야!
“앉으시오. 권수는 많지만 연 소협의 무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외다.”
무당파의 제자가 들으면 기함을 할 소리다.
진무궁의 무공서 중 한 권이라도 세상에 나가면 혈겁이 불 터였다.
천지상인이 손수 연적하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소협의 의형제분들은 잘 계시오?”
“둘만 남고 죄다 산을 내려갔어요. 먹고살기 위해 산에 오른 분들이었거든요.”
“그랬구려. 참으로 잘된 일이외다. 오봉산의 호걸들이 다른 녹림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소. 그래도 쉽지 않은 결정들을 내리셨구려.”
“한 달이 지나도 산으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잘 적응들 한 것 같아요.”
“허허. 오봉십걸들이 녹림을 떠났다니. 정녕 무림의 홍복이구려.”
천지상인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연적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의형제들과의 의리로 녹림에 남아 있었다. 의형제들이 녹림을 떠난다면 그도 조금씩 녹림과 거리를 둘 게 분명했다.
연적하는 빙글빙글 웃으며 차를 마셨다.
천지상인의 바람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였다.
“소협과 같은 분이 그냥 왔을 리는 없고, 빈도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오?”
“실은…….”
연적하는 최근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사실 그런 질문은 사제 간에나 가능한 것인데 연적하는 알지 못했다.
천지상인은 웃으며 연적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확실히 이 소년 고수는 하늘에서 속세로 뚝 떨어진 존재 같다.
세상의 얄팍한 이치에서 동떨어진 걸 보면.
“……바람도 쐴 겸, 도사 할아버지의 조언도 좀 받아 볼까 해서 와 봤어요.”
연적하의 말이 끝나자 천지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그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기본이 부족하다. 그와 같은 천외천의 고수가 이기어검에서 꽉 막힌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니…….’
이기어검이란 마음으로 기를 다스리는 것.
마음의 그림으로 검기를 좌우하는 그의 능력이라면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비전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천하에 다시없는 비밀 같지만 알고 보면 단순하다.
그 단순한 비밀을 문파에서는 갈고 닦아서 비밀리에 가르친다.
그리고 문외불출(門外不出).
‘이제 어쩐다.’
천지상인은 잠시 그와의 인연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을 죽이러 간 사람에게 오히려 상승의 검리를 전해 주었다.
그것이야말로 대도(大道).
대도에 어찌 사문이 있을 수 있으랴.
본래 대도에는 문이 없지 않던가[大道無門].
문득 천지상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반개한 눈으로 코끝을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눈이 이르는 곳에는 마음이 이르고, 마음이 이르는 곳에는 기가 이른다. 기는 마음이 변화하여 생긴 것으로, 마음이 움직이면 기 또한 움직인다.”
본래 이기어검이란 검도의 끝에 있는 경지다.
천지상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뛰어난 검공, 천둔검법의 구결을 풀어 놓았다. 지금의 연적하를 바른길로 이끌어 줄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사문의 허락 없이 문파의 비전을 전수할 수는 없기에, 연적하가 알아듣기를 바라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올라가고[昇] 내려가고[降] 떨어지고[離] 합쳐지는[合] 모든 것은 마음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며, 마음은 곧 기다. 그리하여 기로 만물에 응하여 점차 검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眞氣應物 漸入御劍].”
연적하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천지상인은 생각에 잠겨 있는 연적하를 남겨 두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는 진무궁 앞 돌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하늘은 더 높고, 산도 푸르른 것 같다.
다 버린 것도 같고, 가진 것도 같은 기이한 기분에 그가 ‘허허’ 웃을 때다.
장문인 태허 진인이 다가왔다.
“어린 손님이 왔다던데 왜 밖에 나와 있소?”
“그의 청정(淸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비켜 주었습니다.”
청정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천지상인의 음성이 범상치 않았다.
경험 많은 태허 진인이 그걸 스쳐 지날 리가 없다.
“설마 ‘진실한 도’에 들어가는 청정을 말씀하는 건 아니겠지요?”
‘진실한 도’란 무당파의 비전을 의미한다.
손님을 진무궁에 홀로 남겨 두고 나와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허허. 천지에는 주인이 없지 않습니까.”
태허 진인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말은 맞다.
천하만물이 도이니, 그것에는 주인이 있을 리가 없다.
진무궁을 힐끔 올려다보던 태허 진인이 침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님에게는 무엇을 대접하셨소?”
“천둔검법의 구결을 한번 들려주었습니다.”
“…….”
천둔검법이라는 말에 긴장하고 있던 태허 진인의 얼굴이 슬그머니 풀어졌다.
천둔검법은 전설의 검선 여동빈이 화룡 진인이라는 신선에게 배운 검법이다.
이후 그것은 여동빈의 제자들에 의해 무당파와 화산파, 전진파에 전해졌다.
그 뒤로 천둔검법은 비전 아닌 비전이 되었다.
이 천둔검법에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다.
많은 도사들이 천둔검법을 익히려고 했지만 누구도 대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무당파는 태극검, 화산파는 매화검, 전진파는 무극검으로 유명할까.
그런 이유로 태허 진인은 따로 문규를 거론하지 않았다.
“알아서 잘 판단하셨겠지요. 그런데 어떤 손님이기에 진무궁주가 천둔검법의 요체를 전했는지 궁금하구려. 나이가 어리다고 들었는데.”
“혹시 지난해에 장문인께서 제게 맡겼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아, 만수상방? 설마?”
태허 진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지난해 천지상인에게 부탁한 것은 오봉산채의 토벌밖에 없다.
“예, 오봉십걸의 연 소협입니다.”
“연적하!”
태허 진인은 그에 관한 이야기가 충격적이어서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무려 천지상인을 패퇴시킨 녹림의 도적인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허허허.”
녹림의 도적이 무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무당파에 발을 디뎠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진무궁에서 천둔검결까지 얻었다. 강호의 동도들이 알면 뒤집어질 일이다.
허탈하게 웃던 태허 진인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흐음, 아직 그의 나이가 어리니 상인께서 잘 이끌어 주시구려.”
태허 진인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천지상인은 한 배분 아래 사람이지만 불편한 잔소리를 해도 될 정도로 친하지 않았다.
“장문인,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연 소협은 분명히 도가 계열의 무공을 익혔습니다. 사마외도의 길을 걸어갈 사람이 아닙니다.”
“알겠소. 그에 관해서는 상인의 판단을 전적으로 믿으리다. 그럼, 이만.”
천지상인은 감사의 뜻으로 태허 진인에게 머리를 숙였다.
장문인이 문규를 내세워 따지고 들면 꽤나 골치 아픈데 그러지 않아서다.
한 시진쯤 지나자 연적하가 밖으로 나왔다.
“도사 할아버지, 왜 나와 있어요?”
“허허. 바람이 좋아서 그랬소. 그나저나 이제 궁금증은 풀렸소?”
“예, 기가 마음이 변해서 생긴 거라는 건 몰랐네요. 그걸 알게 되니까 다 해결되더라고요.”
“푸하하핫!”
가만히 듣고 있던 천지상인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 어린 기인은 정말 의외의 곳에 구멍이 있다. 명문의 제자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저렇게 허술한데 무슨 수로 고수가 되었을까?
한참 웃던 천지상인은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그 구결에 막히는 것은 없었소?”
설마, 아니겠지.
여동빈 이후로 천둔검법을 익힌 자가 없는데 어찌 구결만으로 그걸 터득할까.
본래 검법에서 구결이 피라면, 형태는 뼈다.
핵심인 뼈가 빠진 상태에서 구결만 가지고 검법을 익히는 사람은 없다. 초식을 벗어난 경지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