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89
89회. 짐과 보살
창해무관은 낙양의 군소문파 중 하나다.
지난해 백세상방과 거래가 끊어진 뒤로 제자가 급감하여 이젠 열 명 남짓에 불과하다. 그런데 최근 백세상방과의 관계가 개선될 즈음 문제가 터졌다.
철혈방으로 창해무관이 통째로 넘어간 것이다.
정확히는 관주인 창룡검 정소천도 모르게 창해무관의 소유권이 넘어갔다.
모두가 총관 정운봉과 철혈방이 짜고 한 짓이었다.
본래 정운봉과 정소천은 사촌지간으로 두 사람이 함께 창해무관을 운영해 왔다.
백세상방과 깨지고 가세가 기울어 갈 때 정운봉에게 철혈방이 다가갔다.
그들의 꼬임에 넘어간 정운봉은 정소천에게 잔뜩 술을 먹인 뒤, ‘무관은 물론 제자들과 거래처까지 몽땅 철혈방에 양도한다’는 계약서에 수결을 하게 했다.
나중에야 정소천은 그 모든 게 정운봉과 사악도부 좌양선의 수작임을 알았지만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유명교를 두려워한 낙양의 문파들은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았다.
정소천은 마지막으로 본가인 청풍장에 희망을 걸었다.
그의 부친 정해유는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고, 그중에는 이름난 고수도 많았다.
그래서 일대제자 정무진, 정연지와 이대제자 임효를 은밀하게 보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청풍장이 있는 구룡산(九龙山)에 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가는 길목마다 철혈방도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꼬박 하루를 쫓겨 다니다 너무 허기가 져서 반점에 들른 게 화근이었다.
정무진은 넋을 잃고 멍하니 서서 소년과 노인의 식사를 지켜보았다.
저들이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자신들은 끝이다.
그동안 길에서 마주친 철혈방도들은 망설임 없이 살수를 펼쳤다. 관주의 혈육임을 알고 삭초제근(削草除根) 하려는 것이다.
정연지가 정무진의 팔뚝을 슬쩍 건드렸다.
정무진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정연지가 속삭였다.
“저 두 사람 낭인 같지 않아요?”
정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과 입에 기름칠을 하고 게걸스럽게 먹는 모양새를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 청풍장까지 고용해요.”
“…….”
순간 정무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저들이 철혈방도 어려워하는 낭인이라면 그야말로 기사회생의 묘수였다.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정무진은 노인에게 다가갔다.
“저어, 실례 좀 하겠습니다. 노선배님, 혹시…….”
구천노도 심통이 고개를 힐끔 돌렸다.
정무진은 노인의 쭉 째진 눈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왠지 철혈방보다 더 위험한 느낌이 들었다.
“뭐냐?”
입에 남은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긴 심통이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정무진이 머뭇거리자 정연지가 불 쑥 나섰다.
“저희를 청풍장에 데려다주면 사례비로 천 냥을 드릴게요.”
한순간 심통의 눈에서 안광이 번득였다.
얼마 전에 은자 열 냥의 일당을 받고 싸웠다.
그런데 단지 데려다만 줘도 은자 천 냥이라니 귀가 번쩍 뜨였다.
“공자님, 어떻게 할까요?”
심통의 물음에 연적하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청풍장이 어디 있는지 알아?”
“모르겠습니다. 아이야, 청풍장이 어디 있느냐?”
정연지는 노인과 소년의 관계가 영 수상했지만 급히 답했다.
“멀지 않아요. 난천현(銮川基)에 있어요. 여기서 하루면 가는 거리예요.”
심통이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난천현이면 이미 지나온 곳이었다.
낙양과 반대방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연적하와 자신은 그럴 이유가 없다.
돈이 없다면 모를까?
차고 넘치는 지금 왜 그런 고생을 한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연적하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남자는 되돌아가는 거 아니야.”
심통이 바로 여자에게 말했다.
“공자님 말씀 들었느냐? 우리가 이미 지나온 길이다. 가는 방향이 같으면 모를까? 난천현으로는 가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거라.”
실망한 얼굴의 정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낙양의 창해무관은요?”
심통이 연적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자님, 낙양이랍니다. 어떻게 할까요?”
“좋아. 아주 좋아. 요즘은 먹고 숨만 쉬어도 돈이 막 굴러 들어오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흐흐. 그러게 말입니다. 산에 몇 년 있는 동안 세상이 살기 좋아진 것 같습니다.”
히죽거리던 심통이 정연지에게 말했다.
“운이 좋은 아이들이로구나. 공자님께서 승낙하셨으니 데려다주마.”
노인의 말에 정무진과 정연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사일생한 그들과 반대로 사망검 이철원의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격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철원이 수하 하나를 보며 입술을 빠르게 움찔거렸다.
‘소리 없이 진기로 말을 전한다’는 전음입밀의 수법을 펼친 것이다.
-우리는 이자들을 뒤따라갈 테니 먼저 가서 방주님께 알려라.
전음을 쓰기에 내공이 부족한 수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밖으로 빠져나갔다.
식사를 마친 후 연적하와 심통은 정무진의 권유로 마차에 올랐다.
이두 마차라 두 사람이 더 타도 끄떡없었다.
든든한 호위를 구한 탓인지 이대제자 임효는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찌그덕찌그덕 전후좌우로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정연지가 열변을 토했다.
“……그렇게 해서 철혈방이 우리 창해무관을 억지로 집어삼킨 거예요.”
정연지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그래도 연적하와 심통의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다.
정연지가 조금 답답한 얼굴로 물었다.
“천인공노할 짓 아닌가요?”
연적하는 가타부타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정연지는 심통을 바라보았다.
심통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낙양에 정파의 무관이 수십 개일 텐데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그랬느냐?”
“찾아가 사정도 해 보았지요. 그런데 철혈방이 두려워서 아무도 나서지 않더라고요.”
“의천문도 가 보았느냐?”
“정의맹은 유명교와 관계된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유명하잖아요.”
유명교라는 말에 연적하가 관심을 보였다.
“철혈방이 유명교예요?”
“네. 지난해에 새로 방주가 된 사악도부가 유명교도래요. 십두마병이라나?”
“십두마병요?”
“네, 열 명의 마귀를 참한 군사라는 뜻이래요. 그래서 그런지 굉장한 고수예요. 전에는 하남이흉으로 불렸다던데, 지금은 하남일악이라고 해요. 이젠 구밀복검과 비교도 안 되는 고수라서요. 물론 자기들끼리는 하남일웅이라고 하지만요.”
듣고 있던 심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흥! 모르긴 몰라도 구밀복검이 더 강할 것이다.”
“아니에요. 이전의 사악도부가 아니라니까요. 유명교의 은총을 받아서 절세의 고수가 되었대요. 다들 쉬쉬하는데, ‘십두마병들은 칠파이문의 장문인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자가 유명교의 초능을 받았다. 해도, 본신 무공은, 구밀복검만 못할 것이다.”
심통은 ‘본신 무공’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들이 사람의 몸뚱이를 유지하고 있는 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초능을 받은 대력귀도 쳐 죽인 전력이 있지 않던가!
물론 죽은 뒤에 되살아난 괴물은 연적하가 처리했지만 말이다.
“아닌데…….”
정연지는 애매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반박하지도 않았다. 철혈방조차 안중에 두지 않는 노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노선배님의 별호는 어떻게 되시나요?”
“구천노도다.”
정연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천까지는 굉장해 보이는데, 노도는 그냥 ‘늙은 칼’이라는 뜻이다. 별호만으로는 대단한 건지 별 볼 일 없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소협에게도 별호가 있나요?”
“없어요.”
연적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오봉십걸은 열 명의 의형제를 두고 하는 말이니 자신의 별호라 할 수 없었다.
“아, 그러시구나.”
정연지는 더 묻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소년은 별호가 따라다닐 나이가 아니었다. 별호를 물어본 건 노인이 소년의 종처럼 굴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정연지의 관심은 이내 노인에게로 향했다.
구천노도라는 노인은 창해무관을 살릴 수 있을까?
자신들이 청풍장에 가려고 한 것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두 분의 존성대명도 모르고 있었네요.”
두 분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눈은 노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노부의 이름은 심통이다.”
“나는 연…….”
“아! 심 노선배님이셨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사문이 어떻게 되세요?”
마음이 급한 정연지가 끼어드는 바람에 연적하의 대답은 묻혀 버렸다.
심통이 웃음을 참으며 친절하게 답했다.
“와룡장의 사 공자님에게 배웠다.”
배다른 형제를 포함하면 연적하가 넷째이니 사 공자라 할 수 있었다.
대화에서 소외된 연적하는 입술을 삐죽이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낙양의 와룡장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다.”
“어머! 와룡장의 제자이신 줄 몰랐네요.”
정연지의 안색이 급속히 밝아졌다.
와룡장이라면 정파의 무가다.
멸문당한 뒤로 와룡장의 제자들이 천하를 떠돌아다닌다더니 여기서 만날 줄이야!
‘하늘이 도왔다. 와룡장과 유명교는 원수지간이니 창해무관을 도와줄지도…….’
희망에 찬 정연지는 심통에게 철혈방의 패악질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다음 날.
마차가 낙양의 성문을 삼백 보쯤 앞에 두었을 때다.
이십여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관도 양편에서 튀어나와 마차를 막아섰다.
깜짝 놀란 임효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들이 앞발을 높이 들고 멈춰 섰다.
푸르륵. 푸륵.
두 마리 말이 거친 콧소리와 함께 불쾌하다는 듯 머리를 좌우로 비틀었다.
잠시 후 마차 안에서 삼 남 일 녀가 나왔다.
정무진과 정연지는 막아선 무인들을 확인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십두마병의 초능이 신경 쓰인 연적하가 심통에게 물었다.
“방주라는 자가 왔어?”
“아니요. 부하들만 잔뜩 보낸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시들한 표정으로 서 있던 연적하는 가까운 그늘을 찾아 들어갔다. 사실 십두마병이 왔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심통을 도울 일도 없었다.
정무진과 정연지, 임효도 우물쭈물 연적하 주위로 모였다.
연적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무진 일행은 철혈방이 나타났음에도 남의 일 구경하듯 하고 있다.
천 냥으로 칼받이를 고용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과연 매검(賣劍)이라는 건가. 정말 돈으로 못 하는 게 없구나. 먹고, 자고, 싸움도 시키고…….”
솔직히 정무진 일행이 완전히 뒤로 빠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게 바로 천 냥이 가진 힘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웃기게도 마음이 홀가분했다.
정무진 일행은 인정이나 의리가 아닌, 돈으로 사람을 부리는 걸 보여 주었다.
돈 받은 만큼만 행동하면 된다는 소리다.
연적하는 시야가 확 트인 곳을 골라 엉덩이를 붙였다.
정연지가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소협, 심 노선배님을 돕지 않아도 되겠어요?”
연적하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나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댔다.
그리고 속으로 ‘이 셋은 배달해야 하는 짐일 뿐이다’라고 중얼거렸다.
“심 노인! 괜히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끝내. 삭신이 찌뿌드드한 게 비가 올 것 같아.”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정연지는 벌떡 일어나 임효 곁으로 이동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삭신이 어쩌고’ 해 대니 기가 막혀 할 말이 없다.
‘저런 놈을 지극정성으로 모시다니 심 노선배가 보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