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04
904회. 그 결심이 오래가기를 바란다
다섯 시진(10시간) 전.
남맹 호법당.
호법당 당주인 불오검(不惡劍) 모용백이 마주 앉은 여자, 진설하를 보았다.
남궁세가 소가주의 정인이지만 호법당과는 무관한 일.
‘아니, 우리 소희를 마다하고 남궁천이 고른 여자이니 무관하지는 않은 건가.’
몇 년 전 모용문(모용세가 가주)에게 남궁천과 자신의 딸 모용소희의 중신을 부탁한 적 있다.
하지만 남궁세가가 정중하게 거절함으로 그 일은 흐지부지 끝났다.
나중에야 남궁천에게 여자가 있음을 알았다.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는 진설하다.
그는 묘한 감정을 누르고 담담하게 물었다.
“간단하게 몇 가지만 확인하면 되니까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예.”
“질문에 앞서 ‘내가 왜 이 자리에 불려 왔을까?’ 의아하게 생각하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호천맹과 남맹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다. 호천맹과 남맹 모두 중양절의 무림대회를 통해 진짜 무림의 종주가 누구인지 보여 주려 한다. 남맹은 지금도 무림의 방파를 두고 호천맹과 치열하게 물밑 싸움을 벌이고 있다. 물론 아직은 ‘도검’ 대신 ‘차’나 ‘술’을 마시면서 싸우고 있지.”
‘아직은’이라는 말에 진설하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건 장차 ‘칼부림이 날 수도 있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너도 알겠지만 남맹의 가장 큰 적은 유명교나 녹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오히려 남맹에 도움을 주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위기가 닥쳐오면 사람들은 남맹으로 몰려오게 되어 있으니까.”
“…….”
기묘한 논리지만 틀린 말은 아닌지라 진설하는 숨죽이고 듣기만 했다.
“남맹의 적은 호천맹이다. 물론 호천맹의 존립에 가장 큰 걸림돌도 우리 남맹이고. 마교나 유명교처럼 강적을 만나면 잠시 합력할 수도 있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 무림대회를 두고 벌이는 암투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불필요한 이야기가 길어지는 듯하자 진설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그런데 왜 그런 말씀을 저에게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자신의 설명에 딴지를 걸자 모용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호법당을 뭐로 생각했기에 저렇게 태평한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잡아먹힌다[兎死狗烹]. 남맹과 호천맹의 관계가 그렇다.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둘 중 하나는 잡아먹히게 되어 있다.”
진설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남맹과 호천맹은 정파의 세력이니 함께 강호의 안녕을 위해 노력할 수 있지 않나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나. 너는 한 지역에 거대한 상방 두 개가 성업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남맹과 호천맹은 경쟁하는 관계고, 그 경쟁에서 밀려나면 도태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모용백이 진설하의 말을 끊었다.
“네 말대로라면 인접한 정파의 방파들은 서로 싸우지 않겠구나? 그러나 남맹과 호천맹의 업무 중에 구 할이 방파들의 분쟁을 중재하는 것이다. 너도 호천맹과 남맹에 있었으니 눈으로 보았을 것 아니냐?”
“…….”
진설하는 침묵으로 동의했다.
안타깝지만 호법당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유명교가 사라지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남맹과 호천맹 산하 방파들의 이익 다툼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무림의 방파들은 자기들 편에서 싸워 주는 맹을 선택하겠지. 너는 십대상방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방파들이 피를 흘렸는지 아느냐? 십대상방을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녹림이 아니라 다른 상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경쟁자들을 잡아먹고 십대상방으로 우뚝 섰다. 남맹과 호천맹 역시 마찬가지다. 사냥개가 되어 솥단지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진설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군소 문파의 제자인 그녀는 무림세가에서 교육받은 모용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본래는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묻고 끝내려 했다. 그런데 너는 호법당주인 나에게 ‘호천맹과 함께하라’는 말을 했다. 호천맹의 간자로 의심되어 호법당에 불려온 네가, 호법당주에게 그런 불온한 소리를 한 것이다. 나는 네가 정말 남맹의 사람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깜짝 놀란 진설하가 펄쩍 뛰었다.
“네? 간자요? 제가 왜 남맹에 왔는지 모르세요? 호천맹에서 찾아온 지인을 만난 게 호법당에 불려 올 정도로 중한 죄인가요?”
“너와 남궁세가 소가주의 혼인 이야기가 있어서 더 철저하게 검증하려는 것이다. 호천맹의 간자가 무림세가에 파고들면 안 되니까.”
“나는 간자 따위가 아니에요. 그럴 이유도 없고요.”
“스스로에게 떳떳하다면 호법당의 조사에 협조해라. 그러면 된다. 호법당 또한 너의 상황을 고려해 열 일 제쳐 두고 신속하게 마무리 지을 터이니.”
그때부터 모용백의 집요한 질문이 이어졌다.
모용백을 시작으로 호법당 소속의 무인들이 돌아가며 그녀의 과거사를 들추었다.
호법당의 무인들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장장 다섯 시진에 걸친 혹독한 조사로 진설하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자신이 호천맹 출신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남맹에 기반이 없어서 그런 건지 모르지만, 호법당은 자신을 철저하게 외인 취급했다.
남맹의 이면을 경험한 그녀에게 남맹은 항거하기 어려운 괴물과도 같았다.
***
그리고 현재.
“오라버니. 우리도 남맹을 나가면 안 돼요?”
갑작스러운 진설하의 말에 다가오던 청운검 남궁천이 멈칫했다.
“진 매. 그게 무슨 소리야? 남맹을 나가다니? 남궁세가가 남맹의 중심인데, 우리가 어떻게 나가? 왜? 호법당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남궁천이 의아한 눈으로 진설하를 보았다.
그녀가 호법당으로 불려 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주변에 알아보니 호천맹 시절의 동료들이 찾아와서 조사를 받는다고 했다.
그는 남맹의 분위기를 알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조사가 다섯 시진이나 계속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설하는 남맹 소속의 무인이고, 자신과 혼인할 여자인 까닭이다.
나중에 조사가 길어지고 있음을 알고 펄펄 뛰었지만 호법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애태우며 기다리다 이제 겨우 만났는데, 남맹에서 나가면 안 되냐니?
남궁천의 반문에 진설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기사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그에게는 그보다 황당한 소리도 없을 터였다.
“나를 호천맹의 간자 취급을 하더라고요. 내가 남맹에서 보낸 세월이 얼만데. 내가 이방인이었다는 걸 지금까지 나만 모르고 있었나 봐요.”
“어느 미친놈이 그런 소리를 해? 진 매에게 간자라고 한 놈이 누구야?”
화가 난 남궁천의 언성이 높아졌다.
늦은 밤 고요하던 남맹에 남궁천의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하지만 진설하는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다섯 시진 동안 간자 취급받은 건 사실이었고, 내일이면 남맹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두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호법당의 당주님 이하 전부가 다 그런 소리를 했어요.”
“모용 숙부님이 그랬다고?”
“네.”
“아니 왜? 진 매가 어떤 사람인지 모용 숙부는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나도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해서 나를 몰아붙이더라고요.”
“미치겠네.”
남궁천이 답답한지 제 가슴을 두드렸다.
올해 진설하와 혼례 치를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는데 웬 날벼락인지 모르겠다.
“저도 미치겠어요. 다섯 시진 동안이나 그런 소리를 들었더니.”
“호법당 사람들 안 되겠네!”
“어쩌시게요?”
진설하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개 단원에 불과한 그가 호법당의 행동을 나무랄 수 있을까?
씩씩거리던 남궁천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어쩌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항의하는 거지.”
“하아! 됐네요. 마교가 물러가면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진 매, 조금만 참아. 혼인을 하면 더 이상 함부로 하지 못할 거야.”
“오라버니. 남맹쯤 되면 가문 배경이 없더라도 존중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여기가 사파도 아니고, 내가 오라버니와 혼인해야 남맹 사람 대우를 받는다는 게 말이나 돼요?”
“생각해 보니 그러네. 내가 아버지에게 진 매가 당한 부당한 일을 말씀드릴게.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야.”
“알았어요. 남맹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어요.”
진설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진정시켰다.
연적하 내외처럼 당장 남맹을 박차고 나갈 게 아니라면 그래야 했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남궁천은 부친을 찾아가 어제 진설하에게 일어난 일을 말했다.
그러자 검왕 남궁벽은 남궁세가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 받은 대접에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것은 진설하뿐 아니라 남궁세가의 명예와도 관계된 일인 까닭이다.
“내 호법당 당주에게 한마디 할 터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말거라. 진설하에게도 그리 전하고.”
“모용 숙부님은 물론이고 호법당의 다른 세가 사람들도 똑같이 그랬답니다. 진 매가 저와 혼인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 텐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면 너도 어른이 됐다는 뜻이다.”
“제가 모르는 이유가 있습니까?”
남궁천이 황당한 눈으로 부친을 보았다.
자신은 남궁세가는 물론 오대세가와 남맹의 일까지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뭘 모른다는 것일까?
“모용백과 사대세가 사람들이 혹독하게 군 이유를 알고 싶으냐?”
“알려 주십시오. 알아야겠습니다.”
“호법당주인 모용백은 몇 년 전 그의 딸과 너의 혼사를 추진한 적이 있다. 나는 너에게 이미 다른 여자가 있음을 알고 거절했지. 그런 모용백이니 진설하에게 호의를 베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세가들은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답이 보일 게다. 그들 역시 진설하가 상처 입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진설하가 남맹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빈자리를 노리겠다는 게지. 모용세가에서 시작한 일이니 설사 잘못되더라도 모용백에게 책임을 물으면 될 테고.”
“다른 세가들이 진 매가 남맹에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란다고요?”
“그래야 그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 아니냐. 남맹이 커지면 커질수록 네 옆에 누가 서느냐가 중요해진다. 무림세가들 외에 누가 감히 그 자리를 노리겠느냐?”
“저는 진 매를 보내지 않을 겁니다.”
“그 결심이 오래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진설하가 남맹을 떠나고 싶어 한다면, 어쩔 것이냐?”
“저는…….”
남궁천은 부친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지난밤 진설하가 그런 말을 할 때는 홧김에 한 소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호법당과 다른 무림세가들이 집요하게 진설하를 노린다면?
진설하가 그걸 견뎌 낼 수 있을까?
어쩌면 진짜 남맹을 떠나겠다고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남맹을 떠난다는 것은 즉, 자신의 곁을 떠나겠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궁천에게 남궁벽이 말했다.
“그러니 네가 아직 청운검의 별호를 벗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
머뭇거리던 남궁천은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정처 없이 터덜터덜 걷던 그는 돌연 남궁세가의 담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반 시진(1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간 그가 멈춰 선 곳은 석경장의 정문이었다.
문앞에서 한참을 오락가락 맴돌던 남궁천은 긴 한숨과 함께 돌아섰다.
그가 막 걸음을 떼려 할 때 뒤에서 연적하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형님.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