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14
914회. 힘이 없는 게 죄다
어지간하면 당황할 만도 한데 공손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백익에게 물었다.
“백익! 너는 진평상방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진평상방 사람이 남맹의 검시보고서를 왜 가지고 다니지? 그러고도 끝까지 진평상방 사람이라고 거짓말을 할 텐가?”
그러나 백익은 공손찬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자기가 할 말을 했다.
“그날 상월정에서 호천맹은 남맹의 고수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리고 진평상방과 일심상방을 겁박해 엉터리 계약서에 수결하게 했다! 그러고도 호천맹이 정파를 대표하는 단체라고 할 수 있느냐!”
공손찬은 살기 어린 눈으로 백익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내어 주기도 처음인 것 같다.
백익의 말대로라면 금와상방은 물론 호천맹도 악한 집단이었다.
그런데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날 호천맹은 남맹의 고수들을 죽였고, 금와상방에 유리한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실로 대단한 언변이군.’
그는 자신이 말싸움에서 백익에게 졌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강호에서는 힘이 곧 법이다.
공손찬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남맹의 주장은 잘 들었다. 힘으로 호천맹의 상대가 안 되니 설화인(況活人, 전문 이야기꾼)이라도 초빙한 모양이지? 어떤가? 상월정의 복수를 위해 합비에서 달려온 모양인데, 하루 종일 입만 놀릴 건가? 아니면 칼로 할 텐가?”
그러자 백익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대화로 시비를 가리는 게 아니라 칼로 끝을 보자 이건가? 호천맹도 많이 타락했구나! 칼을 원한다니 칼로 답해 주어야겠군.”
백익의 손이 올라갔다.
하객들 속에서 백여 명의 무인들이 걸어 나왔다.
형형한 안광과 절도 있는 움직임, 한눈에 봐도 평범한 무인들이 아니다.
뒤이어 다시 백여 명의 고수들이 담장을 훌훌 넘어와 그들과 합류했다.
순간 공손찬은 흠칫 놀랐다.
저 정도 숫자면 분탕질이 아니라 거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과하군.”
자신이 남맹의 분탕질에 대비해 데리고 온 호천맹 무인은 일백.
오십여 명의 금와상방 호위들이 거든다 해도 열세였다.
백익이 조롱하듯 말했다.
“호천맹이 상월정에서 한 짓을 생각해라.”
말과 함께 그가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것이 신호였던 듯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남맹의 고수들이 귀빈석으로 달려갔다.
깜짝 놀란 하객들이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는 호천맹 산하의 무인들도 적지 않았다.
호천맹의 하객들 중 일부는 달아났지만 일부는 귀빈석 쪽으로 이동했다.
공손찬의 호천맹 무사들과 금와상방의 호위들이 귀빈석 앞을 막아섰다.
곧이어 귀빈석을 지키고 있던 호천맹 측과 귀빈석으로 돌진하던 남맹이 맹렬하게 격돌했다.
차차창! 채챙-!
호천맹의 무인들은 잘 막아 냈으나 금와상방의 호위들이 문제였다.
호천맹에 비해 호위들의 무위는 편차가 심하다.
무위가 약한 호위가 쓰러지면서 단단하던 대열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남맹 고수들은 약한 부위를 집중적으로 공략했고, 마침내 귀빈석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말았다.
상방이든, 무림 방파의 싸움이든, 결말은 비슷하다.
최고 결정권자인 방주가 사로잡히면 모든 싸움이 끝나는 식이다.
남맹 고수들의 목표도 당연히 신속하게 금와상방 방주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구본웅 방주가 사로잡히면 호천맹도 마음대로 날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맹 고수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득달같이 귀빈석으로 내달렸다.
남맹 고수들이 달려오자 구본웅 방주는 황급히 연무백의 뒤로 몸을 숨겼다.
칠파일문의 귀빈들이 아닌 연무백을 선택한 것이다.
소림사의 무문대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연무백을 힐끔 보았다.
위기의 순간 구본웅 방주가 연무백에게 더 의지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무백이 귀빈석에 나타난 순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막상 그 광경을 보니 입맛이 썼다.
무문대사는 다른 칠파일문의 귀빈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표정 역시 좋지는 않았다.
연무백도 칠파일문 귀빈들의 마땅치 않아 하는 얼굴을 보았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구본웅 방주가 그런 걸 어쩌란 말인가.
그는 양이화에게 뒤로 물러나 있으라 말한 뒤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이윽고 남맹 고수들 중에 일부가 칠파일문 귀빈석을 덮쳤다.
칠파일문의 장로들은 여유 있게 남맹 고수들을 상대했다.
아무리 남맹의 고수가 일류급이라 해도 칠파일문 장로를 상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손찬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어릴 때다.
전각 지붕 위에서 관망하던 세 사람이 귀빈석 앞으로 표표히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칠파일문 장로들에게 몰아쳐 갔다.
놀랍게도 칠파일문 장로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세 불청객 중에 한 사람을 알아본 무문대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헉! 검존?”
검왕이 떠오르기 전에 한 세대를 풍미하던 검의 고수가 검존 모용삭이다.
칠파일문의 장로들을 몰아세우던 모용삭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눈썰미가 좋은 중이구나. 스승이 누구냐?”
“공백 대사님이십니다.”
“공백의 얼굴을 봐서 용서해 줄 테니 물러나라.”
머뭇거리던 무문대사는 끝내 두 손을 늘어트리고 뒤로 물러났다.
검왕보다 앞선 시대의 고수인 검존은 칠파일문의 장로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다른 칠파일문의 귀빈들 역시 검존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고 뒷걸음질 쳤다.
칠파일문의 장로들이 빠져나간 귀빈석에 연무백만 홀로 남았다.
구본웅 방주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검존과 두 명의 고수들이 멈칫했다.
아직 한 사람이 구본웅 방주의 앞을 지키고 있어서다.
검존은 몹시 불쾌했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물었다.
“너는 누구기에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느냐?”
연무백이 떨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후배는 연가무관의 관주인 연무백이라 합니다.”
“연무백? 너는 설마……. 와룡장의 그 연무백이냐?”
“예.”
“검왕의 얼굴을 봐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겠다. 비켜라.”
“후배는 구 방주님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내가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제지하겠다는 거냐?”
“후배가 어찌…….”
“너 같은 후배를 둔 적 없다. 사지를 온전히 보존하고 싶으면 물러나라.”
모용삭은 차갑게 연무백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연무백은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검까지 중단으로 들어 올렸다.
연무백의 검끝이 자신을 겨누자 모용삭의 눈에 살기가 차올랐다.
칠파일문의 장로들도 양보하고 물러나는데 애송이가 칼을 겨누다니?
그는 즉시 살기를 일으켜 연무백의 전신을 옥죄었다.
“크윽!”
의형살인(意形殺人)에 직격당한 연무백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연무백은 의형살인에 쓰러지지 않았다.
연적하에게 백자구결을 배운 뒤로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새파란 애송이의 건재한 모습을 본 모용삭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놈! 물러나라 했다!”
모용삭이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내력이 담긴 그의 외침에 구본웅 방주와 양이화가 그만 픽 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모용삭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구본웅 방주와 함께 쓰러진 여자를 구본웅의 첩실로 생각한 그는 연무백을 회유했다.
“물러나라. 내 앞에서 물러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다. 네가 버티면 구 방주와 그의 가족이 다칠 뿐이다.”
중단을 겨누고 있던 연무백의 검이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서둘러 납검한 뒤에 양이화에게 달려가 그녀를 보듬어 안았다.
구본웅 방주에게 걸어가던 모용삭이 그 광경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한순간 소름이 돋았다.
‘구 방주가 아니라 연무백의 여자였단 말인가?’
모용삭과 동행한 두 사람 역시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절대강자인 검존이 멈추자, 세상도 따라서 정지했다.
멀리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양가장 사람들이 귀빈석으로 달려갔다.
모용삭은 양가장 사람들을 막지 않았다.
착잡한 눈으로 양가장 사람들을 보던 모용삭이 다시 움직이려 할 때다.
휘이이잉-.
머리 위에서 서늘한 바람이 내려와 금와상방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움직이려던 모용삭이 멈칫했다.
‘응? 위에서 아래로 불어오는 바람도 있던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렸던 모용삭은, 구름 위에 오연하게 선 청년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헉! 남천?’
검존의 기괴한 행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뒤이어 이곳저곳에서 ‘남천’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구름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호천맹과 남맹 고수들은 차마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구천노도 심통은 구름에서 내려오자마자 바로 양이화에게 달려갔다.
재빨리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그가 연적하에게 말했다.
“공자님, 양 부인은 무사합니다.”
그제야 굳어 있던 연적하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의 표정은-똥이라도 씹은 것처럼-좋지 않았다.
“누구야? 누가 형수님을 다치게 했어?”
호천맹 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검존을 향했다.
모용삭이 등 떠밀리듯 앞으로 나섰다.
“노부는 남맹에서 온 모용삭이라 하오. 검왕의 부탁으로…….”
“긴 얘기는 듣고 싶지 않고, 노인장. 어느 개 후레자식이 우리 형수님을 다치게 했는지 알아요?”
치밀어 오르는 노기로 모용삭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전대의 고수로 검존이라 불리는 자신에게 ‘노인장’으로도 부족해 ‘개후레자식’이라니?
‘이자가……. 다 알고서 하는 말이겠지?’
남천쯤 되는 고수라면 백 리 밖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욕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힘이 없는 게 죄다.
“그건……. 노부의 실책이외다. 고의는 아니었소. 연무백에게 비키라고 소리쳤는데, 맹세코 양 부인이 다칠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오.”
모용삭은 개 후레자식 소리를 들었음에도 변명에 급급했다.
이미 검왕 남궁벽에게 남천이라는 천외천의 고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탓이다.
연적하가 삐딱한 시선으로 모용삭을 보며 물었다.
“내가 천지맹에 있을 때 못 본 얼굴인데 누구셔?”
모용삭은 정중하게 읍을 하며 자기 소개를 했다.
“노부는 오래전 검존이라 불리던 모용삭이외다.”
“모용세가 사람이셔?”
“그렇소. 검왕의 부탁으로…….”
“아, 그런 쓸데없는 말까지 할 건 없고. 왜 왔어요?”
“남맹의 총사부에서…….”
“쓰읍! 왜 왔냐고요!”
연적하는 모용삭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올 때마다 말을 막았다.
별수 없이 모용삭은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남맹의 복수를 도우려고 왔소이다.”
연적하가 모용삭의 좌우편에 선 초로의 노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둘도 모용세가 분들이시고?”
“그렇소.”
연적하가 모용삭과 그의 일행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석경장의 가족들 외에 좋아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는데, 그분이 저기 쓰러져 계신 우리 형수님이셔. 형수님이 이 일로 자그마한 후유증이라도 생기면, 그날로 모용세가는 봉문입니다. 두 번 말 안 해요.”
모용삭이 황망한 눈으로 연적하를 보았다.
고작 그만한 일로 무림세가의 일원인 모용세가를 봉문시키겠다니?
‘말도 안 된다!’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왔지만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