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15
915회.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나 봐?
검존 모용삭은 모용세가가 배출한 전대의 전설적인 고수다.
검존과 검왕의 시대를 무림세가의 황금기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두 사람에게 ‘존왕(尊王)’의 별호가 붙은 것만 봐도 그 위세를 알 수 있다.
그런 ‘검존’ 앞에서 ‘남천’이 모용세가의 봉문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허!’
검존 모용삭은 갑작스레 밀려오는 격세지감과 수치심에 큰 혼란을 느꼈다.
살아가면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은거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았더라면, 검왕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어도 칼부터 뽑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냈다.
남맹의 일을 부탁받고 나온 자리에서 연적하와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다.
그는 그저 한 귀로 듣고 묵묵히 흘렸다.
연무백의 처가 무사하다고 했으니 그로 인해 사달이 날 리 없다.
잠시 잠깐 자신이 참으면 될 일이었다.
그때 돌연 연적하가 귀빈석 양편에 대치하듯 서 있는 호천맹과 남맹을 향해 손짓했다.
호천맹에서는 공손찬이, 남맹에서는 백익이 각각 무리를 이끌고 다가왔다.
연적하는 공손찬과 백익을 지목한 뒤에 다시 손을 까딱였다.
공손찬과 백익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연적하가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소개.”
그의 말속에 담긴 뜻을 바로 알아들은 공손찬이 허리를 접으며 답했다.
“호천맹 총사부의 공손찬이라 합니다.”
뒤이어 머뭇거리던 백익이 입을 열었다.
“진평상방의…….”
“거짓말하면 입을 찢어 버린다.”
연적하의 말에 백익은 눈을 질끈 감았다.
남천이 자기가 한 말을 지킨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남맹 총사부의 백익입니다.”
연적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이쪽이고 저쪽이고 총사부가 문제다.
공손찬이 경멸의 눈으로 백익을 보았다.
끝까지 진평상방 사람이라고 우기더니 아니나 다를까? 남맹 총사부 소속이란다.
공손찬과 백익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호천맹과 남맹의 조직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남맹이 호천맹을 베끼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싸움을 지휘하고 기획하는 양측 총사부가 만났으니 불꽃이 튈 만도 하다.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귓가로 연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누가 그러더라. 호천맹과 남맹이 싸우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호천맹과 남맹이 유명교주와 천외이선을 나에게 떠넘기고, 남아도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거라나.”
깜짝 놀란 공손찬과 백익은 황급히 부인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자 연적하가 두 사람을 빤히 보았다.
“아니면 뭔데? 유명교로 쳐들어가지 않고 여기서 호천맹과 남맹이 박터지게 싸우는 이유를 설명해 봐.”
백익이 차분한 어조로 변명했다.
“지난해 상월정에서 호천맹이 금와상방을 위해 남맹 무사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공손찬이 되받아쳤다.
“너희 남맹이 금와상방의 계약을 방해하다가 죽어 놓고 그 무슨 해괴한 소리냐! 그날 너희가 분탕질을 치지 않았다면 싸울 일도 없었다.”
다시 두 사람의 말싸움이 시작되려 하자 연적하가 둘을 제지했다.
“조용. 거봐. 이런 게 다 힘이 남아돌아서 그러는 거야. 호천맹과 남맹이 무림대회를 열어서 신입들을 대거 뽑았다지? 그랬으면 유명교와 싸워야지 왜 둘이 싸워?”
“…….”
그 질문에는 공손찬과 백익 모두 답하지 못했다.
연적하가 바보도 아니고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답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지그시 보던 연적하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양쪽 다 상방의 일에서 손 떼고, 싸우지 마. 오늘 이후로 호천맹과 남맹이 또 싸운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유명교 일에 나서지 않을 거야.”
“…….”
공손찬과 백익이 눈을 휘둥그렇게 치뜨고 연적하를 보았다.
지금 연적하가 유명교에서 손을 떼면 천하는 도탄에 빠지게 될 터였다.
공손찬과 백익이 급히 말했다.
“남천 대협. 저희 호천맹은 천외이선은 물론 유명교주조차도 당해 내기 어렵습니다.”
“저희 남맹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외이선은 금군도 꺾은 사람들입니다. 무림이 전부 달려들어도 그들을 어쩌지 못할 겁니다.”
만나자마자 싸우던 두 사람은 이 순간 뜻을 모았다.
호천맹과 남맹이 무림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것은 연적하가 있어서다.
그들은 유명교 문제에서 그가 빠지면 호천맹과 남맹도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적하는 만족한 얼굴로 공손찬과 백익을 보았다.
그렇게 물고 뜯더니 처음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건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의미했다.
“아, 몰라. 나는 말했어. 호천맹과 남맹이 싸우면 나는 무림의 일에 끼어들지 않을 거야. 내 도움을 받고 싶으면 맹주들에게 똑똑히 전해.”
말과 함께 연적하는 연무백 내외를 향해 걸어갔다.
연무백과는 백미주를 죽인 일로 다시 불편한 관계가 됐지만, 사람 좋은 형수의 상태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뒤에서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상방에서 손을 떼라는 말은 따를 수가 없구려. 나는 합비를 떠나기 전에 맹주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소. 진평상방과 일심상방의 불공정한 계약을 파기해 주겠노라고.”
연적하가 돌아섰다.
검존 모용삭이 무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모용세가의 봉문을 말할 때는 반응이 없더니, 상방에서 손을 떼라니 안 된단다.
“지금 내 말에 따르지 않겠다고 한 거 맞아? 아니면 내가 잘못 들었나? 심 노인, 저 노인네가 내 말에 따르지 않겠다고 한 거 맞아?”
“흐흐흐.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젓가락 들기가 싫은 모양입니다.”
모용삭은 자신을 조롱하는 심통에게 고개를 돌렸다.
과거 구밀복검 심양각이라 불리던 도적 따위가 자신의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하다니?
“세상이 많이도 변했군. 심양각, 젓가락 들기가 싫어진 건 혹 네가 아니냐?”
말과 함께 모용삭이 손가락을 튕겼다.
쐐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한 줄기 지풍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바위를 부순다’는 모용세가의 쇄석지(碎石指)다.
심통은 슬쩍 한 걸음 비켜섬으로 소림사의 탄지신통에 비견된다는 모용세가의 절기를 피했다.
순간 모용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흠! 심통의 무위가 뛰어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쇄석지를 저렇듯 가볍게 피하다니!’
쇄석지의 무서운 점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쇄석지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피했다면 최소한 절세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소리다.
“제법이구나.”
칭찬과 함께 모용삭은 검을 뽑아 들고 심통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흥! 내 앞에서 나를 개무시하고 딴짓을 해? 아주 죽여 달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래?”
연적하의 냉소에 모용삭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심통의 조롱에 욱해서 그와 대화 중이었음을 깜빡했다.
모용삭은 연적하를 향해 돌아섰다.
“남천. 너의 무위가 입신지경이라는 말은 들었다. 그러니 위아래 없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거겠지? 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 믿는다. 네가 그토록 방자하게 행동할 자격이 있는지 보여 봐라.”
모용삭은 아까부터 속에 담아 두었던 감정을 여과 없이 내비쳤다.
어차피 언적하가 상방에서 손을 떼라고 할 때부터 그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다.
‘오호?’
반감 가득한 그의 도발에 도리어 연적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용삭의 도발이 신선하게 느껴진 탓이다.
자신이 누군지를 알면 슬슬 피해 다니는 사람들만 만나다 모용삭을 보니 기특하기까지 했다.
“노인장이 내 일검을 받아 내면 오늘의 무례를 용서해 줄게. 살고 싶으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야 할 거야. 준비되면 말해.”
“나는 이미 그렇게 행동할 자격이 있는지 보이라고 말했다.”
“마음은 나이를 먹지 않나 봐? 벽에 똥칠할 나이 같은데 아주 패기가 넘치시네.”
말과 함께 연적하가 허공에서 천둔검을 꺼냈다.
그 간단한 한 수에 모용삭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검을 꺼내다니?
검왕에게 어느 정도 들은 바 있으나 그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눈속임이 아니라 실제라고?’
심지어 눈앞에서 그 검은 수십 개로 늘어났다.
의형검기도 아니고, 검이 저렇게 늘어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하나만 본체고 나머지는 허상일 게다.’
그게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된다.
‘검공에 술법을 섞었나 보군.’
그렇게 결론 내린 모용삭은 검신에 전신의 내력을 밀어 넣었다.
술법을 파훼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대의 법력보다 강한 내력으로 찍어 누르면 된다.
술사가 무림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우우웅-.
묵직한 검명과 함께 모용삭의 검신이 백광에 휩싸였다.
뒤이어 검 끝에서 백광이 한 자(약 30 센치미터)나 길게 늘어났다.
검강(劍罡)이었다.
대견하다는 눈으로 모용삭을 보던 연적하가 검결지를 까딱였다.
순간 이십여 개의 천둔검이 모용삭을 향해 쏜살처럼 날아갔다.
쐐애애액-!
대기를 찢는 파공음에 모용삭은 서둘러 모용세가의 건곤무극검을 펼쳤다.
일견 태극(太極)의 형상과도 같은, 검고 하얀 빛의 검강이 천천히 꼬리를 물며 정면으로 날아갔다.
곧이어 허공 한 지점에서 ‘건곤(乾坤)의 검강’과 ‘천둔검’들이 마주쳤다.
쿠쿠쿠쿵-!
지축을 울리는 폭발음과 함께 사방으로 경력이 휘몰아쳤다.
‘건곤의 검강’에 천둔검들이 갈려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게 보였다.
모용삭을 따라다니던 혼천검 모용수와 일월검 모용완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그들은 검존이 단 한 번만이라도 남천을 몰아세우기를 바랐다.
그런 바람이 통한 걸까?
검존의 건곤검강에 남천의 검형이 맥을 못 쓰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내 전황을 살피던 두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꽈르릉!’ 하는 폭발음과 함께 건곤의 검강이 박살 난 것이다.
“크윽!”
건곤무극검이 박살 나면서 되돌아온 반탄력에 모용삭의 상체가 휘청거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직 부서지지 않은 십여 개의 검이 빠르게 모용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대경실색한 모용삭은 반사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수련한 건곤검을 사용했다.
모용세가에게 건곤검은 무당파의 태극검이라 할 수 있다.
입문할 때부터 익히는 건곤검은 모용세가 검법의 뿌리와도 같았다.
쾅! 콰앙-!
엉겁결에 두 개의 검형을 쳐 냈지만 모용삭의 얼굴은 어두웠다.
아직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검형이 많았는데, 건곤무극검이 깨질 때 내상을 입었는지 내력의 수발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일이로군!’
저 검형 하나하나가 진짜일 줄은 몰랐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지금 당장 저걸 막아 낼 방법이 없었다.
그의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갈 때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모용수와 모용완이 그의 좌우편으로 달려가 섰다.
모용삭은 그들을 물리치지 않았다.
서로를 의지하고 선 세 사람을 향해 십여 개의 검형이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