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22
922회. 누굴 호구로 알고!
동정호를 끼고 반 시진(1시간)쯤 걷던 유자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협, 이대로라면 내일쯤에나 도착할 것 같은데……. 마차라도 이용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멀어?”
“동정호 맞은편에 군자산이라고 있습니다. 그 초입에 산월신당이 있는 데 여기서 백 리(약 40킬로미터)는 더 가야 됩니다.”
“와아 더럽게 머네.”
연적하의 입에서 걸죽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째 호수가 바다처럼 넓어 보이더라니! 맞은편으로 돌아가는 데 하룻길이란다.
운종술로 가면 금방이지만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지 않으려면 마차를 구해야 했다.
“그럼 마차로 가자고.”
결국 연적하와 유자양은 가까운 마방(馬房)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차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마방에서 동정호 유람객들을 위해 말과 마차를 넉넉하게 준비한 까닭이다.
연적하와 마차를 타고 가던 유자양이 무료함을 참지 못해 물었다.
“그런데 대협께서는 산월신당에 왜 가십니까?”
“구경.”
“독무 때문에 보이는 게 없을 텐데요?”
“독무를 보러 가는 거야.”
“혹시, 독공을 연마하셨습니까?”
“아니.”
“…….”
유자양이 고개를 갸웃했다.
독공을 연마한 것도 아니면서 왜 독무를 구경하러 간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 형은 왜 애들을 보살펴 줬어?”
“예?”
“아까 거리에서 나를 털어먹으려던 아이들, 유 형이 돌봐 주고 있다면서?”
“아, 저도 그 아이들처럼 거리를 떠돌아다녔습니다. 옛 생각도 나고 해서 몇 번 도와줬습니다.”
“그래?”
연적하가 유자양을 힐끔 보았다.
길 안내라는 핑계로 그를 잡아 둔 것은 겉보기와 다른 그의 행동 때문이다.
남맹과 호천맹의 위선에 질려 있던 그에게 유자양의 선행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나 정사지간 출신에, 외모와 하는 말은 딱 소도둑인데, 고아들을 돌보다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의 언행은 오랜만에 연적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무리 봐도 소도둑인데…….’
유자양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악하방은 무슨 일을 해?”
연적하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유자양도 딱히 궁금하지 않은 듯 얼른 악하방에 대해 설명했다.
“악양루 앞에 있는 파릉 동쪽의 기루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오홍.”
연적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루 관리라니, 과연 그건 정사지간의 문파에서나 할 법한 일이었다.
“관리할 게 뭐가 있는데?”
“술과 기녀지요.”
“술은 알겠는데, 기녀를 어떻게 관리한다는 거야?”
유자양은 대답에 앞서 청년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얼굴만 봐서는 그 속을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자신을 향한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조금 안심이랄까.
“기녀들이 가끔 사고를 친다거나 하면 그걸 수습하는 겁니다.”
“사고?”
연적하가 궁금해하자 유자양은 별 수 없이 몇 가지 사례를 들었다.
“술에 취한 손님의 돈을 슬쩍한다거나, 손님과 눈이 맞아 달아난다거나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그럴 때 기녀가 훔친 재물을 회수해 돌려준다거나……. 달아난 기녀를 잡아 오는 거지요.”
가만히 듣고 있던 연적하가 눈을 찌푸렸다.
훔친 돈을 회수해 돌려주는 거야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달아난 기녀를 잡아 온다’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달아난 기녀를 잡아 와? 왜?”
“기루에서 거금을 주고 산 기녀니까요. 달아나면 기루 주인만 손해를 보지 않습니까? 그러니 달아난 기녀들을 누군가 잡아 와야 하지요. 그 일을 저희 악하방에서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루에서 기녀를 산다고?”
“예, 재주가 뛰어나고 얼굴이 반반할수록 부르는 게 값입니다. 천화각의 금향은 기루 주인이 은자 삼천 냥을 주고 샀으니까요.”
“누가 기녀를 팔아?”
“부모가 팔기도 하고, 맡아서 키우던 친척이 팔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스스로 팔기도 합니다.”
“스스로 판다고?”
“급전이 필요하면 뭐라도 팔아야지요. 얼굴이 반반한 여자들은 자기를 팝니다.”
“그럼 평생 기루에서 일을 해야 되고?”
“간혹 돈을 모아 기루 주인에게 배상하고 나가는 기녀도 있습니다만……. 그런 기녀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느니 모은 돈을 가지고 야반도주를 하지요. 기루를 나가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기루가 싫어서 달아난 여자들을 잡아서 돌려보낸다?”
“예, 그게 결국은 기루 주인의 돈이니까요.”
“내가 들어 보니 술 관리보다 여자를 잡으러 다니는 일이 더 많겠네.”
술이야 한번 주가(酒家)와 거래를 트면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계속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 술보다는 여자 문제가 더 많을 터였다.
“맞습니다. 한번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기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아나거든요.”
“야.”
유 형이라던 연적하의 호칭이 변했다.
유자양은 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예.”
“너 괜찮은 놈인 줄 알았더니 개잡놈이구나.”
“송구합니다. 제가 한 말 중에 대협의 심기를 거슬린 게 있다면 용서해 주십쇼.”
“사람답게 살아 보겠다고 달아난 여자를,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고? 에라 이 쌍놈아.”
“그게……. 떠날 거면 빚은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랬던 것뿐입니다.”
“빚? 기루 주인도 기녀를 사서 벌 만큼 벌었을 거 아냐? 그러니까 기녀를 계속 사들이는 거지. 기녀로 돈을 벌었으면 상대방 입장도 생각해 줘야지. 늙어 죽을 때까지 부려먹을 거야?”
“그게 늙고 병들어서 손님이 끊기면 기루 밖으로 내보내기도 합니다.”
“에라 이 개만도 못한 놈아. 그건 내다 버리는 거지. 에이! 쌍놈의 세상.”
유자양에 대한 실망은 분노로 이어졌고 급기야 연적하는 세상을 욕했다.
유자양은 유자양 대로 유난을 떠는 청년이 못마땅했다.
빚을 지고 달아난 기녀를 잡아들이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저 난리인지 모르겠다.
‘아니 씨펄. 관부에서도 눈감아 주는 일을 제가 뭐라고 지랄이래?’
그럼 기루 주인의 돈은 돈이 아니고 똥이란 말인가?
‘기루 주인에게 빚을 지고 야반도주한 년이 죽일 년이지. 암.’
거기까지 생각한 유자양이 지나가듯 말했다.
“대협은 좋은 집안에서 자라신 모양입니다?”
“왜?”
“돈 걱정 없이 지내셨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다’는 소리를 그렇게 돌려서 한 것이다.
“돈 걱정 없이 지냈지.”
십 년이나 창고에 갇혀서 지냈는데 돈 걱정할 일이 있을 리가 있나.
“부럽습니다요.”
“흐흐흣!”
연적하의 입에서 뒤틀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손바닥만 한 창고에서 십 년을 보낸 자신이 부럽단다.
문득 연적하가 그를 불렀다.
“야.”
“예?”
“너 길거리에서 자랐다고 했지?”
“예.”
“돈 없는 서러움을 알 법한 놈이 기녀들한테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고 하냐?”
“…….”
청년의 지적에 유자양은 입을 다물었다.
대꾸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괜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청년 고수의 화를 사고 싶지 않았다.
‘내 더러워서 고수 된다. 씨펄.’
유자양이 속으로 결의를 새롭게 다지고 있을 때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이윽고 마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리님들. 군자산에 도착했습니다.”
연적하가 턱짓하자 유자양은 서둘러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뒤따라 내린 연적하가 요란스럽게 앓는 소리를 냈다.
“으아아! 뼈마디가 쑤신다 쑤셔!”
유자양은 묵묵히 청년을 지켜보았다.
목적지까지 청년을 데리고 왔으니 자기가 할 일은 끝난 셈이다.
그런데 청년은 노을에 물든 주변을 바라보기만 할 뿐 이래라저래라 말이 없었다.
청년의 뒤에 멀뚱멀뚱 서 있던 유자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협. 이쪽 길을 따라 조금만 가시면 산월신당의 표지판이 보일 겁니다.”
“앞장서.”
유자양이 눈을 찡그렸다.
이거야말로 입안에까지 밥을 떠먹여 달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씨펄! 누군 할 일이 없는 사람인 줄 아나.’
유자양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면서 앞장섰다.
처음으로 군자산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마부가 부러웠다.
산 쪽으로 몇 걸음 가지 않아 ‘산월신당’이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산월신당’ 표지판 옆에 ‘출입금지’라고 적힌 표지판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유자양이 표지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독무에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고 적혀 있으니 조심하십쇼.”
‘더 안 들어가겠다’는 뜻을 에둘러 표한 것이다.
하지만 연적하는 계속 턱짓을 보냈다.
‘하아! 씨벌 놈이 기녀를 잡으러 다닌다는 말에 화가 난 모양이로구나.’
유자양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감히 거부하지 못했다.
하필 세상 물정 모르고 착한 척하는 놈에게 물렸으니 이것도 업보라면 업보다.
그는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산월신당 방향으로 걸어갔다.
조금 걷자 삼 장(약 10미터)쯤 앞에 녹색 운무가 나타났다.
독무(毒霧)였다.
아직 거리가 제법 남았음에도 머리가 띵할 정도로 독성이 진했다.
‘때려 죽여도 더는 못 간다.’
유자양이 멈춰 섰다.
연적하는 그런 유자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독무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바짝 접근해 독무를 살폈다.
사람이 감정에 사로잡히면 한순간 이성을 상실할 때가 있다.
뒤에서 청년을 지켜보던 유자양의 눈에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청년이 고수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저 독무는 독으로 유명한 당가와 백독문조차 포기한 극독이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자기보다 어린 놈에게 ‘개잡놈’, ‘쌍놈’, ‘개만도 못한 놈’ 소리를 들었다.
혈기가 치솟은 그는 숨을 멈추고 소리 없이 청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청년이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그의 등을 힘껏 떠밀었다.
청년이 녹색 운무 속으로 들어갔다.
운무가 어찌나 짙었던지 청년의 몸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윽고 재빨리 돌아선 유자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 달렸다.
금방이라도 운무에서 청년이 튀어나와 자신의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았다.
하지만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는 절독이다.
저 멀리 마차가 보일 때까지 청년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확인할 것도 없는 즉사다.
얼떨결에 독무를 들이마시고 뻗은 게 틀림없다.
“씨벌 놈이! 누굴 호구로 알고!”
그제야 안심한 유자양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마차로 걸어갔다.
마부가 의아한 얼굴로 유자양을 보았다.
분명히 두 사람이 산월신당으로 갔는데 한 사람만 헐레벌떡 뛰어와 욕을 한다?
산월신당에서 뭔가 사달이 난 게 틀림없다.
가슴이 뛰었지만 마부는 유자양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험난한 세상에서 천수(天壽)를 누리려면 때로 보고도 못 본 척해야만 한다.
지금이 그때였다.
유자양이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그 사람은 다른 데로 갔소. 그만 돌아갑시다.”
“예, 예.”
마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채찍을 휘둘렀다.
붉은 노을을 받으며 마부와 유자양이 탄 마차는 군자산에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