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923
923회. 너도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냐?
조금 전.
그러니까 유자양에게 등이 떠밀리기 직전까지 연적하는 ‘낙월독정의 해약을 먹고 갈 것인가? 그냥 들어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물론 고민의 이유는 생각보다 독무가 위험한 것 같지 않아서다.
과거 녹림의 십두마병들을 정리하러 다닐 때 경험한 ‘뇌신의 독’은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그런데 ‘범천욕계왕재천’을 다녀온 지금은 왠지 그때만큼의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원영지체’를 이루어서 그런 건지, 혹은 신맥에 깃든 ‘구천검령’을 믿고 간이 커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싹한 게 없었다.
그런데도 그 맛없어 보이는 낙월독정의 해약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망설일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자양에게 ‘위험하니 가까이 오지 마라’는 경고의 말을 해 주려는데, 그가 등을 확 떠밀었다.
‘이 미친놈이?’
미처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모든 게 끝났다.
그러나 다행히 독무는 그의 영기를 침범하지 못했다.
여전히 한 자(약 30센티) 앞에서 일렁이는 독무를 보며 연적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치 호신강기처럼 영기가 독무를 밀어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이제 보니 피독(避毒)은 ‘원영지체’나 ‘구천검령’이 아닌 영기 자체의 공능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유자양이 떠올랐다.
자욱한 독무 속에서 연적하는-황당한 얼굴로-헛웃음을 흘렸다.
‘푸흐훗!’
유자양이-기루 주인의 입장에서-돈에 팔려 온 기녀를 함부로 욕할 때는, 멀쩡한 사람도 악독하게 만들어 버리는 세상을 욕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게 아니다.
세상이 그를 독하게 만든 게 아니라 본래 악한 놈이었다.
무슨 변덕으로 거리의 아이들을 돌봐 주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나쁜놈이다.
아니, 나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순간의 감정으로 누군가를 독무로 밀어 넣을 정도로 악독한 놈이다.
고개를 젓던 연적하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등 한번 내주고 놈의 밑바닥을 확인했으니 남는 장사다.
지금은 유자양의 악독함을 곱씹는 것보다 뇌신의 처리가 더 급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한 그는 독무 속을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뇌신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익숙한 마기를 따라가니 귀에 거슬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화아악-. 화아악-.
뇌신이 독을 방출하는 소리였다.
연적하가 다가가자 귀에 거슬리는 숨소리도 멎었다.
짙은 독무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연적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뇌신이라 불리는 인면사(人面能)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휘잉-.
대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독무 속에서 거대한 꼬리가 튀어나왔다.
연적하는 즉시 천둔검을 꺼내 꼬리를 후려쳤다.
카앙-!
암벽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캬아아아-!”
꽤나 아픈지 인면사가 비명을 지르며 꼬리를 거두어들였다.
독무로 앞이 보이지 않자 연적하는 풍천소축(風天小畜)을 펼치려다 멈칫했다.
검풍으로 독무를 신당에서 밀어내면 사람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어쩐다.’
잠시 생각하던 연적하는 당운망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도 독무를 뚫고 가야 한다면?
-바람으로 날려 버리든지, 불로 태우십시오.
-바람은 곤란한데. 독무 주변에 인가가 많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럼 잘 태우십쇼.
-태우라고?
-대체로 독은 불에 약합니다. 정히 독무로 들어가야 한다면 태우고 가십시오.
-불로?
-그럼 물로 태웁니까?
-아니, 화기(火氣)도 되는지 궁금해서 그러지.
-태울 수 있는 건 뭐든 됩니다.
분명히 당운망은 화기를 포함해 태울 수 있는 건 뭐든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풍화겁륜(風火劫輪)이 있다.
지금까지 풍화겁륜을 펼칠 때 단한 번도 불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불이 필요했다.
연적하는 천둔검을 힐끔 보았다.
천둔검의 주인인 여동빈은 화룡진인(火龍眞人)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화룡, 즉 불과도 관계가 있음이 틀림없다.
‘천둔검아, 알지? 지금은 불처럼 일어나는 바람이 아니라, 진짜 불바람이 필요하다고.’
천둔검이 알아들었는지 ‘우웅-’ 하고 검명을 흘렸다.
연적하는 독무를 향해 풍화겁륜을 펼쳤다.
의형검기(意形劍氣)란 검의(劍意)를 현실에 재현해 내는 것을 말한다.
화르르륵-! 콰르르르-!
지름이 무려 십 장(약 30미터)에 달하는, 수레바퀴 모양의 화염이 굴러갔다.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풍화겁륜은 주위의 모든 것을 태우며 전진했다.
풍화겁륜이 지나간 자리마다 새까만 재만 남았다.
인면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캬아아아-!”
풍화겁륜에 직격당한 인면사가 비명을 지르며 펄떡거렸다.
풍화겁륜의 불길에 인면사의 몸통이 빨갛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녹아내렸다.
곧이어 인면사는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래도 연적하는 검결지를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이참에 산월신당을 감싸고 있는 독기를 싹 다 불태울 생각이었다.
이 독기를 없애야 괴질도 사라질 터였다.
연적하가 검결지를 허공에 한 바퀴 돌리자 풍화겁륜이 신당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화르륵- 화르륵-.
“어?”
연적하의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거대한 불의 수레바퀴가 신당 주위를 돌자 사방에서 불길이 일어난 것이다.
신당 주변의 잡목림을 태운 불이 군자산으로 퍼져 나갔다.
‘아차!’ 싶어서 풍화겁륜을 거두어들였지만 이미 불은 걷잡을 수 없게 퍼진 뒤였다.
“난리 났네.”
불과 연기로 뒤덮인 군자산을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화기로 뇌신과 독무를 없앤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런 대형 산불이라니!
‘그냥 달아날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털어 냈다.
백성들을 위해 독무를 없애겠다고 와서는, 산불을 내고 달아나다니?
말도 안 되는 짓이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던 연적하가 멈칫했다.
‘가만, 검의(劍意)로 화기(火氣)를 구현했다면 물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차피 화기(火氣)나 수기(水氣)나 오행지기라는 점에서 보면 같았다.
마침 구천구검에 현녀강우(玄女降雨)라는 초식이 있다.
‘검기를 비처럼 내리게 한다’는 의미지만 검기 대신 수기를 염원하면 될 것도 같았다.
‘풍화겁륜’처럼 검기 대신 물방울이 쏟아질지 누가 아냐 말이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딱 현녀강우까지만 써 보고 안 되면 달아나야겠다.’
최선을 다해도 안 되면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연적하는 다시 천둔검을 노려보며 염원했다.
‘천둔검아, 알지? 검기가 아니라 진짜 물이 필요하다. 제발, 물! 물! 물!’
또다시 천둔검이 ‘우웅-!’ 하고 울었다.
연적하는 이를 악물고 불길을 노려보았다.
정말 말귀를 알아들은 건지, 자신의 영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자-!”
뜨거운 외침과 함께 연적하는 현녀강우를 펼쳤다.
쿠르르르- 쿠르르르-.
이제는 어둑어둑한 초저녁 하늘에서 연신 우렛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뭔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연적하가 그토록 바라던 수기, 즉 물방울이었다.
쏴아아아-.
군자산을 집어삼킬 것처럼 번져 가던 불길이 주춤하더니 조금씩 사그라졌다.
잿더미가 된 산월신당 앞마당에서 연적하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핫!”
말로만 듣던 신선들의 호풍환우(呼風映雨)가 이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니!
이제야 자신이 반신(半神)의 경지라는 게 실감 났다.
한참을 웃던 연적하는 불이 완전히 꺼지자 터덜터덜 아래로 내려갔다.
***
악양.
파릉 동쪽 유흥가.
천화각.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마친 유자양은 오랜만에 천화각을 찾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후에 괴청년에게 천화각의 기녀 금향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금향이 당겼다.
그가 가게로 들어가자 천화각의 주인, 추여몽이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유 대협! 어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오실 때가 됐는데 하던 참이에요. 마침 어제 좋은 술이 들어왔답니다. 그 술을 보니 유 대협 생각이 어찌나 나던지.”
이윽고 추여몽은 유자양을 무희들이 춤추는 누대 바로 아래로 이끌었다.
그곳은 천화각에서 가장 좋은 자리니 추여몽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유자양은 자리에 앉지 않지 않고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방으로 가고 싶은데.”
기루에서 방으로 간다는 것은 단지 술이 목적이 아니라는 소리다.
추여몽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그를 매실(梅室)로 데리고 갔다.
매난국죽의 사군자(四君子)는 천화각에서도 특실이라 할 수 있다.
그제야 유자양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유자양이 자리에 앉자 마자 추여몽이 살갑게 물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방을 다 찾았데요? 누굴 불러 드릴까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자양이 말했다.
“금향이.”
“금향이는 다른 손님을 모시고 있어서 어렵고, 소소는 어때요? 소교도 시간이 되는데.”
“금향이.”
유자양은 금향이만 찾았다.
전에 없던 유자양의 고집에 추여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 대협이 꼭 금향이를 봐야겠다면 어쩔 수 없는데……. 금향이는 잠자리 시중은 안 드는 거 알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금향이나 데리고 오쇼.”
“아니, 유 대협. 우리가 하루 이틀 볼 사이도 아니고. 또 유 대협도 천화각에서 막 못되게 굴면 안 되는 거잖아. 금향이 한테 무슨 일 생기면 안 돼.”
추여몽이 조마조마한 눈으로 유자양을 보았다.
비록 악하방이 뒤를 봐주고는 있지만 악하방 사람들도 가끔 술에 취하면 진상을 부렸다.
‘유자양은 악하방에서도 고수라서 그를 제지할 사람이 없을 텐데…….’
악하방의 방주가 이만한 일로 나설 리는 없고,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사나운 것 같았다.
유자양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추 대저(大始), 내가 언제 천화각에서 사고 치는 거 봤어? 금향이나 냉큼 데리고 오쇼.”
“지금 손님들 모시고 있다니까.”
“아, 진짜. 나도 오늘은 손님으로 왔다니까. 나보다 귀한 손님 아니면 데리고 오쇼.”
“에휴! 알았어요. 지금 데리고 올게. 진짜 밤 시중은 안 돼. 알죠?”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그러네. 금향이가 싫다면 나도 안 해. 사람을 뭐로 보고.”
“우리 유 대협이 허튼소리 안 하는 건 나도 알죠. 그럼 잠시만 기다려 봐요.”
잠시 후 추여몽이 취기에 볼이 발그스름하게 물든 기녀의 손을 잡고 왔다.
천화각에서 제일 잘나가는 금향이었다.
추여몽이 손으로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이리 와 앉거라.”
금향은 추여몽을 한차례 보고는 유자양의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럼, 유 대협. 잘 부탁해요.”
추여몽은 노파심에 다시 한마디 당부를 곁들이고 매실에서 나갔다.
주인이 나가자 유자양은 금향에게 빈잔을 내밀었다.
금향이 잔을 채우자 유자양은 입안에 털어 넣고, 빈잔을 흔들어 보였다.
금향은 서둘러 잔을 채웠다. 유자양은 또다시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러기를 십여 차례 하자 유자양의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올랐다.
어색한 분위기에 금향이 흥을 돋우려 하는데, 유자양이 대뜸 물었다.
“너도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냐?”